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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4·10 승려대회

1994년 종단개혁의 정점…출재가 개혁의지 결집

▲ 1994년 4월10일 조계사에서 열린 전국승려대회는 스님과 신도 3500여명이 동참했다. 종단개혁에 대한 사부대중의 열망이 컸음을 대변한다. 그러나 대회 직후 발생한 폭력사태는 승려대회의 긍정성을 퇴색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민족사 제공

“이제 더 이상 숨길 것이 없을 만큼 불교교단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났다. 혹한을 이겨낸 씨앗만이 꽃을 피우듯 한풍의 이 혼란과 격동이야말로 개혁의 희망이다. 반야의 검을 높이 치켜들고 장엄하게 불교개혁의 대열로 나서야 한다. 불교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이며, 보살의 길로 나서는 일임을 선언하노니 금강역사의 힘으로 불교개혁을 위해 고난의 길을 떠나자.”(1994년 4월10일 전국승려대회 개혁선언문)

대중 3500명 조계사 운집
승려대회 사상 최대 규모
의현 총무원장 체제 종식
원력 모아 종단개혁 다짐
 
의현 총무원장 퇴진 결의
집행부 해산…종정불신임
대중 박수로 ‘동의’ 통과
 
총무원 접수시도로 폭력
칼·벽돌·유리 등 난무
언론들 “중세시대 공성전”
 
1994년 4월10일 세간의 눈과 귀는 서울 조계사로 향했다. 이날 아침부터 신문과 방송은 의현 총무원장 측과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의 충돌을 우려했다.
 
범종추는 3월26일 구종법회부터 보름간 진행된 의현 총무원장 퇴진 운동의 종지부를 찍겠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구태세력을 몰아내고 종단개혁을 이루는 것이 대세”라며 종도들의 전국승려대회 동참을 호소했다. 의현 총무원장 측도 반발했다. 총무원 측은 “승려대회는 종정 교시를 무시한 불법 집회”임을 내세웠다. 총무원 청사를 두꺼운 철제문으로 꽉 걸어 잠그고 만전을 기했다. 승려대회가 임박할수록 조계사 인근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경찰은 13개 중대 1500여명을 조계사 인근에 배치했다. 3월29일 의현 총무원장 측의 요청으로 조계사 경내에 들어섰다 따가운 비판을 받은 탓인지 이번에는 조계사 주변만 경계했다. 다만 경찰은 폭력사태가 재발할 경우 즉각 개입할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이 시각 조계사 인근 도로는 휴일임에도 교통정체로 몸살을 앓았다. 아침 일찍부터 전국에서 올라온 전세버스가 길게 늘어섰다. 도로는 버스와 승용차가 얽혀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조계사 경내에는 ‘의현 총무원장 퇴진하라’ ‘신명을 바쳐 종단개혁을 이루자’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가 곳곳에 내걸렸다. 오후가 되자 조계사 앞마당은 스님과 신도들로 발디딜틈 없이 빽빽했다. 승려대회 봉행위 측은 이날 스님 2500명과 재가불자 1000명이 참가한 것으로 추산했다. 역대 승려대회 사상 최대 규모였다.
 
오후 1시 서옹 전 종정과 혜암 스님 등 원로들이 대회장에 들어서면서 승려대회는 시작됐다. 삼귀의와 반야심경에 이어 서옹 스님이 법석에 올랐다. ‘1994년 4월10일 전국승려대회 녹취록’에 따르면 이날 서옹 스님은 불교개혁은 시대적 사명임을 강조했다. 스님은 “정복과 파괴가 아니라 인간과 대자연을 존중해서 아름다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이 불교”라고 강조했다. 이런 불교의 가르침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종단개혁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대회장을 맡은 혜암 스님은 “이제 한국불교는 뼈를 깎는 참회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한국불교의 앞날이 벼랑 끝에 서있음에도 치열한 문제의식을 갖고 개혁하려는 몸부림이 없다”며 “파사현정하겠다는 출가 장부의 기개와 실천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스님은 “한 순간의 비분강개가 아니라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신명을 바쳐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세우겠다는 서원이 금강과 같이 굳건할 때 개혁은 성취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참석대중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봉행위원장 탄성 스님은 “정화하고 개혁하겠다는 의지가 투철하다면 우리 자신들의 허물을 경책하는 정직한 용기가 필요하다”며 “오늘 이 전국승려대회와 향후 개혁의 실천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교적 양심과 행동에 기초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승려대회를 앞두고 종단 안팎에서 제기된 우려를 의식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이날 승려대회에서는 의현 총무원장에 대한 거친 발언들이 쏟아졌다.
 
중앙승가대학을 대표해 나선 한 학인 스님은 의현 총무원장을 “매종노”라며 “처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의 불교현실은 매종노 서의현 한 개인으로 인해 그 위상이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며 “서 원장의 권모술수와 탄압 속에 분노만으로 땅에 쓰러져 있을 것이 아니라 땅을 딛고 일제히 일어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명진 스님은 “의현 총무원장은 승적을 박탈하는 체탈도첩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님은 “개혁을 이루는 날까지 참회하는 심정으로 법복마저 부처님 전에 반납하겠다”며 분위기를 띄웠다.
 
승려대회에 참석한 대중들은 의현 총무원장의 부도덕성을 고발하는 발언에 함께 분노했고, 종단개혁을 함께 이루자는 호소에는 박수로 화답했다. 승려대회는 원로회의 결의사항 발표에서 절정을 이뤘다. 사회자 현진 스님은 “원로 스님들이 분연히 일어나 원로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결의를 했다”고 소개했다. 사회자는 “원로 스님들이 △의현 총무원장 및 집행부 불신임 △의현 스님 일체 공직박탈 △종단개혁위원회 해산 △종정 불신임 △개혁회의 출범을 결의했다”고 말했다. 대중들은 박수와 함께 ‘동의한다’고 외쳤다.
 
그러나 이날 아침 서울 종로 칠보사에서 열린 원로회의에서는 ‘종정 불신임’을 결의한 사실이 없었다. 원로회의는 “종정 스님이 승려대회 금지교시를 발표한 것은 종헌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기에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달라”는 촉구만 결의했다. 대신 종정 스님에 대한 불신임 여부는 승려대회에서 대중들에게 묻기로 했었다. 혜암 스님은 승려대회에서 “종정 불신임 결의에 동의하냐”고 물었고, 대중들은 박수로 동의했다. ‘종단의 최고 권위와 지위를 갖는’ 종정 스님을 대중재판형식으로 불신임한 것은 조계종사에서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대중들은 ‘개혁회의 출범’도 결의했다.
 
도법 스님은 개혁회의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도법 스님은 “조계종 개혁회의는 입법·행정·사법 등의 모든 권한을 위임 받은 한시적인 종단 최고기관”이라고 설명했다. 개혁종단 출범에 앞서 종단 개혁의 틀을 기초하겠다고 밝혔다. 종회의원과 본사주지, 선원대표, 교직자, 범종추 대중 등 100~120명의 개혁회의를 구성해 현 집행부 해산과 업무를 이전 받겠다고 말했다.
 
개혁회의 의장은 통도사 방장 월하 스님이, 부의장은 설조 스님과 종회의장 종하 스님이 맡기로 했다. 종하 스님이 개혁회의 부의장으로 이름을 올린 것이 의외였다. 종하 스님은 3월30일 의현 총무원장의 3선 연임을 주도한 중앙종회 의장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도법 스님은 이날 “부의장으로 선임된 또 한 분(종하 스님)은 대중 스님들께서 현명한 판단과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며 “승려대회 이후부터는 대중적 열의와 신의보다 냉철하고 현실적으로 다뤄가야만 개혁이 흔들리지 않고 추진될 수 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한겨레신문(1994년 4월11일자)은 “기존 세력을 끌어안기 위한 포석”으로 분석했다. 특히 “승려대회 이후 기존 종회의원들의 사퇴를 촉구하고 종단개혁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면서 의현 총무원장 측에서 제기할 수 있는 소송사태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뜻”이라고 해석했다.
 
2시간여 동안 진행된 승려대회는 ‘종단개혁을 염원하는 사부대중 발원문’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승려대회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느닷없이 사회자는 “우리 종도의 재산인 총무원을 인수하는데 동의하냐”고 물었다. 대회장 혜암 스님도 “총무원 청사 접수결의에 동의합니까?”를 재차 외쳤다. 대중들은 다시 박수로 결의했다.
 
‘총무원 청사 접수’ 결의로 조계사는 순식간에 술렁였다. 참석 대중들은 일제히 총무원 청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황은 일촉즉발로 치달았다. 총무원 청사에서는 털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스님들이 나와 이를 지켜봤다. 확성기를 통해 “오늘 집회는 불법”임을 강조하며 “청사를 내줄 수 없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1시간여 동안 양측은 팽팽한 신경전을 펼쳤다. 경찰도 예의주시했다. 그러나 4시50분경 호법단 스님 20여명이 청사 2층 난간에 알루미늄 사다리를 설치하고 진입을 시도했다.
 
청사 진입에 성공한 스님들은 용접기와 절단기 등을 동원해 총무원 측이 설치한 장애물들을 제거했다. 총무원 측 스님들도 격렬하게 저항했다. 소방호수로 물을 뿌리고 벽돌과 유리병을 투척했다. 식칼이 등장하고 소화기에서 하얀 분말 가루도 터져 나왔다. 총무원측 스님들과 범종추 측 스님들은 서로를 향해 무차별적 공격을 가했다. 언론은 이날의 장면을 ‘중세시대 공성전(攻城戰)’에 빗대 비판했다.
 
오후 5시10분경 9개 중대 1000여명의 경찰이 조계사 경내에 투입됐다. 그러나 경찰의 진압에도 난투극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양측의 폭력사태는 이날 밤 10시가 넘어서야 잦아들었다.
 
1994년 4월10일 승려대회는 조계종 개혁에서 정점을 찍는 일대 사건이었다. 스님과 재가불자가 한 자리에 모여 종단 개혁의 의지를 다졌고, 3월26일 구종법회부터 시작된 의현 총무원장 퇴진운동의 종지부를 찍는 전기를 마련했다. 그럼에도 대회 직후 발생한 폭력사태는 승려대회가 갖는 긍정성을 퇴색시키는 요인이 됐다. 승려대회가 애초부터 폭력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공격성을 갖고 있는 비불교적 집회라는 비판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근대불교연구자인 김광식은 “승려대회는 계율의 측면에서 논란의 소지가 있고, 세간에서는 분규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며 “승려대회 자체에 초법적인 권위가 인정된다면 추후에도 승려대회에 의지해 모든 문제와 모순을 해소하려는 기대심리가 작용해 종헌종법의 권위가 무너지고 반불교적 행태가 지속될 것”이라고 지적했다.(‘근현대불교와 승려대회’, 불교교단사연구소)
 
당시 원로회의 사무처장 원두 스님도 “4·10 승려대회는 종정의 집회금지 교시를 거역하고 불신임까지 진행했으며, 적법한 원로회의 결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된 것”이라며 “종단 내 분쟁 해결법인 칠멸쟁법을 위반한 불법 집회”라고 비판했다. (‘4·10승려대회 식순·기록의 분석과 사법부 판단)
 
서암 종정 스님은 종단개혁을 긍정하고 직접 개혁안까지 마련했다. 그럼에도 불신임이라는 불명예를 감내하면서 승려대회를 금지하라고 교시를 내린 것은 승단 내부가 분열되고 불교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폭력사태를 예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254호 / 2014년 7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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