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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작자미상, ‘미원장배석도’

기자명 조정육

“저 속에 알맹이 있거늘, 언제까지 껍질에 집착할 텐가”

“너는 무엇 때문에 목욕까지 하고, 동서남북상하의 여섯 군데를 향해 예배하느냐?” 육방예경

돌에 대한 도취 ‘미원장배석도’
참 멋 아는 풍류가 모습 그려내
맹목적으로 따라하는 것과 달라
껍질 속 본질 바라볼 수 있어야

▲ “ 작자미상, ‘미원장배석도’, 조선후기, 종이에 연한 색, 105.7×58.7cm, 삼성리움미술관.

“지금 뭐 하냐?”

“일하는데요.”

“무슨 일? 저녁 밥 짓냐?”

“아니요…. 글 쓰고 있었어요.”

“너의 집에서 동백까지는 얼마나 걸리냐?”

“?”

낮에 헤어진 시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유성에 살고 계신 시부모님을 모시고 당고모가 사는 용인 동백에 갔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태워드린 지 서너시간만에 갑자기 전화를 하셔서 이것저것 물으신다. 왜 그러시지? 평소에 그렇게까지 며느리의 사생활을 꼬치꼬치 캐는 분이 아니신데. 더 이상했다. 알고 보니 사연이 급박했다. 목걸이를 당고모 집 앞에 버리고 왔으니 혹시 시간 되면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목걸이를 버리다니. 무슨 소린가. 아흔이 넘은 당고모는 스스로 걷기조차 힘들 정도로 연로하셨다. 노인의 앞날은 예측할 수 없는 법. 살아계실 때 당고모를 보겠다며 올라오신 시부모님은 환자를 만나는 것이 왠지 꺼림칙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시어머니에게 조언을 했다. 환자 집에 갈 때는 고춧가루, 소금, 후추를 싸가지고 가서 나올 때 버리라는 조언이었다. 소위 부정풀이를 하라는 것이었다. 시어머니는 그 말대로 ‘부정을 없애주는 물건’을 비닐에 싸서 가방에 넣었다. 그런데 당고모집이 너무 더웠다. 목에 건 도자기목걸이가 칙칙 감길 정도로 더웠다. 시어머니는 목걸이를 풀어 또 다른 비닐에 싸서 가방에 넣었다. 그러다 나올 때 목걸이를 싼 비닐을 버리고 온 것이었다.

부처님께서 왕사성 영축산에서 천이백오십 명의 비구와 함께 계실 때의 일이다. 부처님께서 공양하실 때가 되어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들고 성안으로 들어가셨다. 성안에 선생(善生)이란 장자의 아들이 살았는데 그는 아침마다 성 밖으로 나와 목욕하고 언덕에 올라가 동서남북상하, 여섯 곳을 향해 예배하곤 했다.

부처님께서 선생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 때문에 목욕까지 하고, 육방(六方)에 예배하느냐?”

“저의 아버지가 임종할 때, ‘네가 예배하고 싶거든 먼저 동서남북상하의 여섯 군데를 향해 예배하라’고 유언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예배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선생에게 말씀하셨다.

“거기에는 방위의 이름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현의 법에서는 단지 여섯 방향에 예배함으로써 공경하지 않는다.”

선생 거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 성현의 법 안에서 육방에 예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재가자가 네 가지 결업(結業:번뇌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악업)을 알고, 네 가지 악한 행동을 삼가며, 재물이 손실되는 여섯 가지(六損財業)를 알고 육방에 예배를 한다면, 이번 생애서도 행복하고, 내생에서도 좋은 과보를 받을 것이다.”

네 가지 결업이란 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이다. 네 가지 악한 행동은 탐심, 진심, 치심, 두려움이다. 재물이 손실되는 여섯 가지는 지나치게 술을 많이 마시고, 노름하며, 방탕하고, 기악(伎樂)에 미혹되어 있으며, 좋지 않은 친구를 사귀고, 게으른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육방에 예배하는 것이다.

멋진 경치를 구경하는 걸까. 두 명의 동자를 거느린 선비가 절벽 위에 매달린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다. 어떤 나무를 보고 있는 걸까. 머리 위의 나무를 보는 것이 의심이 들 정도로 나무는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우람하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그렇다. 선비가 바라보는 것은 나무가 아니다. 나무가 매달린 바위다. 심하게 주름지고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는 허공으로 위태롭게 돌출되어 세월의 나이테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 키 작은 나무와 풀이 피부처럼 붙어 있으니 그 형상이 기묘하면서도 운치 있다. 그런데 바위를 감상하는 선비의 자세가 이상하다. 두 손을 맞잡아 팔을 들어 올린 모습이 꼭 바위를 향해 절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18세기 후반)가 그린 이 작품의 제목은 ‘미원장배석도(米元章拜石圖)’다. ‘미원장이 돌에 절을 하다’는 뜻이다. 미원장은 북송(北宋)의 서화가(書畫家)인 미불(米芾:1051-1107)로 원장(元章)은 그의 자(字)다. 미불은 금석(金石)과 고기(古器)를 애완(愛玩)하였는데 특히 기이한 돌을 좋아했다. 그런 어느 날 그는 보기 드물게 기괴한 돌을 발견했다. 심히 기쁜 미불은 의관을 갖춰 입고 뜰 아래로 내려가 돌에 절을 했다. 이 이야기는 ‘미전배석(米顚拜石)’ 혹은 ‘원장배석’이라는 제목으로 많은 작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미전(米顚)은 미불의 별호(別號)다. 미불은 그의 아들 미우인(米友仁)과 함께 모두 서화에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여 진나라 때의 명필 왕희지(王羲之)와 왕헌지(王獻之) 부자에 비견되곤 했다. 그들 부자는 산수화를 그리는 표현법 중 하나인 미가산수법(米家山水法)을 창안했다. 붓을 옆으로 뉘어 횡으로 점을 찍는 미가산수법은 녹음이 무성한 여름 산이나 나무를 그릴 때 많이 사용된다. 안개가 자욱하고 습윤한 풍경을 그릴 때도 애용되는 기법이다.

‘미원장배석도’는 이명기 스스로가 밝혀 놓았듯 김홍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화면 중간에 ‘원장이 돌에 절하다(元章拜石)’라는 제목과 함께 ‘단원 김홍도의 뜻에 따라 그렸다. 화산관(筆檀園意 華山館)’이라고 적어 놓은 것처럼 묵법과 필법에서 김홍도의 화풍이 느껴진다. 머리에 쓴 복건(幅巾)과 몸에 걸친 심의(深衣)는 선묘로 표현한 반면 바위와 폭포는 진한 먹과 연한 먹을 적절히 배합하여 변화를 주었다. 모두 김홍도가 즐겨 쓰던 표현법이다. 인물화를 잘 그린 이명기와 김홍도의 친밀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서직수초상(徐直修肖像)’을 함께 그릴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 이명기의 작품은 지난 번에 ‘송하독서도(松下讀書圖)’에서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미불이 돌을 보고 절하는 행위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벽(癖)으로 봐야 한다. 벽은 버릇이다. 버릇 중에서도 무엇을 너무 지나치게 즐기는 버릇이다. 어느 정도의 버릇을 벽이라 할까. 벽에 대해서는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許筠:1569-1618)이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서 아주 정확하게 설명해놓았다. 그는 ‘혜강(嵇康)의 쇠붙이 다루기를 좋아한 것과 무자(武子)의 말을 좋아한 것과 육우(陸羽)의 차(茶)를 좋아한 것과 미전(米顚)이 바위에게 절한 것과 예운림(倪雲林:예찬(倪瓚)의 깨끗한 것을 좋아한 것은, 다 벽(癖)으로써 그 뇌락(磊落), 준일(雋逸)한 기개를 보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그 말이 맛이 없고 면목(面目)이 가증스러운 사람은 다 벽이 없는 무리들’이라고 정의한 다음 ‘진정으로 벽이 있다면 거기에 빠지고 도취되어 생사(生死)조차 돌아보지 않는다’고 단정했다. 한마디로 벽이야말로 참멋을 아는 풍류가의 골수취미생활이라는 것이다. 이런 풍류를 끌어안고 사는 사람은 진정한 매니아다. 혜강, 무자, 육우, 미불, 예찬 등은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한가락 한 사람들이다. 매니아를 넘어 전문가 중의 전문가였다. 어느 정도로 깊이 빠져서 살까. 허균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옛적에 화벽(花癖)이 있는 이는 어디에 기이한 꽃이 있다는 소문만 들으면 아무리 깊은 산골짜기나 높은 산봉우리라도 미끄러지거나 다리를 저는 것을 꺼리지 않고 찾아가되, 혹심한 추위와 무더운 더위에 피부가 얼어터지고 땀이 비 오듯 하여도 일체 아랑곳하지 않았다. 즉 어느 꽃이 피기 시작하면 금침(衾枕)까지 가지고 가서 그 꽃나무 아래 묵으면서, 그 꽃이 피기 시작하고 만발하고 시들고 떨어지는 과정을 낱낱이 관찰한 뒤에야 떠나는가 하면, 혹 천만 개의 꽃으로써 그 변화를 궁리하기도 하고 혹 한두 개의 가지로써 그 의취를 즐기기도 하고 혹 잎을 냄새 맡아 보고 나서 꽃의 대소(大小)를 짐작하기도 하고 혹 뿌리를 보고 나서 빛깔의 홍백(紅白)을 분별하기도 하였으니, 이는 진정 꽃을 사랑한다 하겠고 또 진정 일 만들기를 좋아한다 하겠다.’

모름지기 이 정도는 되어야 벽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벽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탐닉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무엇인가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대상에 빠져드는 모습은 보기 좋다. 심지어 숭고하기까지 하다. 문제는 자신이 하는 행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남이 하니까 맹목적으로 따라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서는 멋도 아름다움도 발견할 수 없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백일을 작정하고 관세음보살 염불을 하다가도 누가 지장보살염불이 좋다고 하면 솔깃해서 지장보살염불로 바꾼다. 지장보살 염불을 하다가도 누가 광명진언이 좋다고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곧바로 광명진언으로 바꾼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백일동안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한 가지 염불만 하겠다던 초발심은 이미 잊은 지 오래다. 어떤 기도가 영험하다면 그까짓 초발심쯤이야 문제될 것이 없다. 모든 기도는 나름의 특징이 있다. 나름의 목적이 있고 효험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기도를 하는 사람의 자세와 간절함이다. 핵심을 잊고 오직 결과만 바란다는 것은 본질이 제거된 껍질과 같다. 이런 말을 해봤자 이미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같은 종교 내에서 기도법을 바꾸는 것은 그나마 양반이다. 종교 자체를 바꾸어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특정 종교에 귀의하여 열심히 기도하다가도 자신이 원하는 기도가 성취되지 않으면 미련 없이 돌아서서 다른 종교로 바꾼다. 기도의 응답만 받을 수 있다면 가차 없다. 그래서 지금도 절에서 교회로, 교회에서 성당으로, 성당에서 다시 절로 좀 더 힘 센 대상을 찾아 종교편력을 멈추지 않는 방랑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

이렇게 우리는 부초처럼 흔들린다. 무거운 운명을 바꿔나가야 할 삶의 자세가 공기보다 가볍다. 고춧가루와 소금과 후추를 버림으로써 내게 다가올 재앙을 막을 수 있다면 그건 재앙도 아니다. 오히려 귀한 목걸이만 잃어버릴 수도 있다. 동서남북상하에 절을 한다고 해서 육방에 예배하고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 고춧가루를 버리든 바위에 절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할 때는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진짜 부정풀이일까. 어떤 것이 육방이고 육방에 예배하는 것일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땅히 육방을 알아야 한다. 부모는 동방이고, 스승은 남방이며, 아내는 서방이고, 친척은 북방이며, 아래 사람은 하방이고, 사문과 바라문 등 성현은 상방이다.”

우리 모두는 육방에 예배해야 한다. 허공이 아니라 내 삶 속의 육방에 말이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56호 / 2014년 8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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