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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일본 사이초가 구카이에게

“국가가 출가자를 제한하는 제도는 적절치 못합니다”

“약속대로 진언(眞言)의 전수를 허락하신다니 한없이 기쁩니다. 변함없는 두터운 후의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요즘 진언과 천태가 나란히 잘 전수되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념하고 있습니다. 지금 스님의 배려까지 받게 되니 제 마음이 더 없이 굳건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참으로 인도하기 어렵고, 또한 국가가 출가자를 제한하고 통제하는 제도는 너무나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진언과 천태의 양종은 서로 통할 뿐 아니라 궁극적인 가르침의 경지도 하나일 것입니다.”
 
일본 헤이안 불교 두 거목
편지 주고받으며 깊은 교유
 
함께 견당선 타고 당나라행
사이초는 천태사상 전수
구카이는 밀교사상 습득
 
귀국 후 서로 도왔지만
제자 등 문제로 결국 결별
 
종파와 성향 크게 달랐지만
헤이안불교 이끈 선각자
 
▲ 일본 천태종 개조 사이초 진영. 11세기 그려진 이 그림은 일본 국보로 지정됐으며, 현재 이치조지(一乘寺)에 보관돼 있다.

810년 8월, 일본 천태종 개조 사이초(最澄, 767∼822)는 감격스러웠다. 구카이(空海, 774∼835)로부터 진언의 전수를 허락받은 것이다. 사이초는 천태사상은 물론 계율과 선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여겼다. 다만 새로운 사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밀교에 대한 이해 부족이 늘 아쉬움으로 남았다. 사이초의 갈증을 채워줄 유일한 인물이 구카이였다. 천황과 가까웠던 사이초는 상소를 올려 구카이가 수도인 교토로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왔다. 그가 누구보다 뛰어남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사이초는 진리에 대한 고집스러움과 뜨거운 열정을 지녔다. 한 종파의 개조인 사이초가 세속의 나이도 어리고 법랍도 훨씬 적은 구카이를 진언의 스승으로 받든 것도 그의 열정에서 비롯됐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절벽에서라도 뛰어내릴 각오가 돼 있던 그였다. 이런 사이초의 눈에도 구카이는 참으로 비범했다.

일본 진언종 개조인 구카이는 사누키국(讚岐國)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외가 쪽은 학문으로 유명했다. 그중 외숙부인 아토 노오타리(阿刀大足)는 간무(桓武, 737~806)천황의 아들인 이요친왕의 가정교사를 맡을 정도로 뛰어난 학자였다. 구카이는 15살 때 외숙부를 따라 상경한 뒤 최고 교육기관인 대학에 합격했다. 관료로 진출하기 위한 수재과정을 밟던 그는 천재적인 어학실력과 문장으로 늘 주목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구카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한 사문과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구카이는 그로부터 ‘허공장구문지법(虛空藏求聞持法)’을 전해 들었다. 이 진언을 백만 번 독송하면 모든 불경의 경문을 암송하게 된다는 놀라운 밀교수행법이었다.

제가백가에 두루 밝았던 구카이가 처음부터 그 말을 믿었던 것은 아니다. 단순한 호기심에 시작했지만 독송하면 할수록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암송 능력과 무관했다. 무상(無常)에 대한 절절한 체험이었다. 어린 시절 두 형을 잃어야했던 구카이. 그는 ‘귀한 보석처럼 아름다운 미인도 밀려오는 작은 파도보다 빨리 황천길로 떠나고, 고귀한 천자도 죽으면 한줌 재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지 않던가’라고 읊었다. 구카이는 인생이 얼마나 허망하게 스러질 수 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20살 구카이는 모든 젊은이들의 선망이었던 대학을 그만두었다. 대신 정식 득도와 수계를 거치지 않은 사도승(私度僧)의 길을 선택했다. 산중의 숲을 집으로 삼고 오로지 수행에 전념했다. 오른손에는 108염주를 들고, 어깨에는 풀로 만든 돗자리를 둘러멨다. 자유로이 산천을 오가며 진언을 행하는 전형적인 방랑 수행자였다.

24살 때 일본 한문학사(漢文學史)의 백미로 평가받는 ‘삼교지귀(三敎指歸)’를 지었던 구카이. 자신의 출가선언서이기도 한 이 글에서 불교가 가장 수승한 가르침임을 천명했던 그는 31살 때 정식 출가자의 수순을 밟았다. 사도승으로서 배움에 한계가 있음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구카이는 출가한 그해 여러 어려운 관문을 거쳐 당나라로 떠나는 제16차 견당선에 탈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 일본 진언종 개조 구카이 진영 일부. 1313년 조성된 것으로 교토 도지(東寺)에 보관돼 있다.

804년 7월6일, 사이초와 구카이의 첫 만남도 이 때였다. 38살의 사이초는 천태교학을 흥륭케 하려는 간무천황의 명을 받아 당에서 1년 동안의 체재를 허락받은 상태였다. 4대의 견당선 중 명성이 자자했던 사이초는 두 번째 배에 탔다. 무명의 구카이는 첫 번째 배에 올랐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험난한 뱃길. 생사를 넘나드는 두 달간의 항해 끝에 목적지인 명주(明州)에 도착한 배는 오직 두 번째 배뿐이었다. 첫 번째 배는 남쪽으로 표류해 복주(福州)에 닿았고, 세 번째 배는 규슈로 되돌아갔다. 네 번째 배는 폭풍에 휩쓸려 아예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중국 후한의 효헌황제 후예라는 사이초. 오미국(近江國) 출신으로 12살에 출가한 그는 19살 때 도다이지(東大寺)에서 계를 받고는 돌연 히에이산(比叡山)으로 잠적했다. 사이초는 홀로 12년간 산에서 지내면 학문과 수행에 전념했다. 31살 때 천황을 가까이 모시는 관직을 맡은 그는 ‘법화경’은 물론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 저술 강의에 탁월한 역량을 선보였다. 그런 과정에서 사이초는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 보다 깊이 천태를 배우겠다는 뜻을 세웠다.

사이초는 어려서부터 당에서 건너온 율사 감진을 깊이 존경했다. 그가 천태사상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천태의 문헌을 처음 가져왔던 감진의 영향이 컸다. 어쩌면 사이초의 의식 깊은 곳에서는 자신에게 대륙인의 피가 흐른다는 생각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에 도착한 사이초는 꿈에도 그리던 천태산으로 향했다. 그는 천태 지의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그곳에서 보살계를 받았고, 좌주 행만(行萬)으로부터 천태의 법을 널리 펴라는 부촉을 받았다. 사이초가 당에 머무는 동안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불경의 수집이었다. 그는 온갖 노력을 기울여 9개월 뒤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230부 460권에 이르는 방대한 전적을 실을 수 있었다.

한편 첫 번째 배에 탔던 구카이는 5개월 험난한 여정 끝에 당의 수도 장안에 도착했다. 얼마 후 그는 청룡사(靑龍寺)에서 일생의 스승 혜과(慧果, 746~805)를 만났다. 불공삼장의 법을 이은 혜과는 구카이를 반갑게 맞으며 말했다.

“나는 네가 오는 것을 미리 알고 기다린 지 오래다. 오늘 서로 이렇게 만나게 되니 참으로 기쁘구나. 내 수명이 다하고 있는데도 법을 부촉할 사람이 없었다.”

혜과는 이국의 젊은 승려에게 마지막 생명의 심지를 불살라가며 정성껏 가르쳤다. 구카이도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밀교의 정수를 온몸으로 습득해갔다. 그해 12월15일, 혜과는 구카이에게 불사리를 전수하며 “세세생생 우리 서로 스승과 제자가 되어 밀교를 널리 전하자. 그대는 어서 귀국해 배운 가르침을 널리 전하라”는 말을 남기고 입적했다.

구카이는 혜과의 장례식을 마치고 다음해 10월, 귀국길에 올랐다. 그가 탄 배에는 경전·논소·진언 등 216부 461권, 혜과가 남긴 유물 13종을 비롯해 불상·만다라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장차 일본에 밀교의 새바람을 일으킬 중요한 전적들이었다.

구카이가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 사이초는 이미 일본의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었다. 그 배경에는 간무천황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이 때 사이초는 무명에 가까운 구카이가 수도에 정착할 수 있도록 무진 애를 썼다. 천황에게 구카이의 뛰어남을 알리는가 하면 자신을 지원하던 귀족들이 구카이를 돕도록 주선했다. 시·글씨·문장에 두루 뛰어났던 구카이는 곧 궁중과 귀족사회에서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반면 사이초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806년 간무천황이 죽고 그를 이은 사가(嵯峨, 786~842)천황은 한시와 서예에 조예가 깊었다. 그가 사이초보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던 구카이에 관심을 보인 것은 당연했다.

더욱이 시대는 천태사상이 아니라 밀교적 주술능력을 요구했다. 밀교수행의 목적은 현재의 신체 그대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다는 즉신성불(卽身成佛)에 있었다. 그러나 황실과 귀족들은 치병, 기우, 호국 등 밀교의 특정요소에 열광했다. 게다가 귀족들의 권한이 커지고 파벌이 나뉘면서 밀교의 기도법은 권력 다툼의 도구로 이용됐다.

사이초에게 당에서 불충분하게 배워온 밀교 지식은 약점으로 작용했다. 천태산에서 머물던 그는 장안에서 유행하던 밀교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사이초는 구법순례의 도반인 구카이를 적극 돕는 동시에 밀교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의존했다. 구카이도 사이초의 요청을 받아들여 밀교 서적을 기꺼이 빌려주었다. 또 사이초의 애제자인 다이한(泰範) 등에게 직접 관정을 주고 밀교를 가르쳤다.

사이초가 구카이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편지를 보낸 것도 이 때다. 810년 8월19일, 사이초는 법화일승과 진언의 가르침은 어떤 차이도 없으니 서로 법을 전하자고 제안했다. 국가의 불교통제에 대한 반대의사를 명확히 하기도 했다. 당시 불교는 철저히 국가에 소속돼 있었다. 심지어 승려들이 백성을 위해 법을 설하지도 못할 정도로 통제가 심했다. 또 국가가 매년 득도할 수 있는 승려의 수를 종파별로 정하는 ‘넨분도샤(年分度者)’는 불교의 대중화를 막는 큰 걸림돌이었다.

▲ 구카이가 사이초에게 보낸 편지의 첫 부분. 일본 국보로 교토 교오고코쿠지(敎王護國寺)에 소장돼 있다.

불교가 국가권력에서 벗어나 자주적으로 설 수 있기를 꿈꾸었던 두 사람. 이들은 경전에 대해 논의했고, 아끼는 제자들을 교환해 정성껏 지도했다. 사이초와 구카이는 종파와 나이를 초월해 서로가 인정한 최고의 벗이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813년 11월, 구카이는 ‘이취석경(理趣釋經)’을 빌려달라는 사이초의 요청을 거절하는 서한을 보냈다. 구카이는 천태종 개조인 사이초가 밀교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다고 판단했을 듯싶다.

“비장(秘藏)의 오묘함은 글을 얻는 것으로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데 있습니다. 문자로 표현된 것은 찌꺼기이고 글은 깨진 기왓장입니다.”

이어 구카이는 사이초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진실을 버리고 거짓을 줍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법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법은 당신도 따르지 않고 나도 구하지 않습니다. 옛사람은 도를 위해 도를 구하고, 지금의 사람은 명리를 위해 도를 구합니다. 명리를 위해 도를 구하는 것은 구도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도에 뜻이 있다면 자기를 잊어버리고 법을 도로 삼아야 합니다.”

구카이는 사이초에게 추구하는 길이 다르다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껄끄러운 관계는 한 동안 지속됐다. 816년 사이초는 구카이 문하에서 공부하던 제자 다이한에게 편지를 보내 “법화일승과 진언일승이 어떤 우열이 있겠느냐?”며 이제 히에이산으로 돌아올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제자가 돌아오는 대신 구카이로부터 다이한을 옹호하는 편지를 받으며 둘의 관계는 막을 내렸다.

최대의 후원자, 최고의 벗, 뛰어난 제자까지 잃은 사이초는 교토를 떠나 간토(關東)지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열정은 죽는 날까지 식지 않았다. 그는 법상종의 논객 도쿠이치(德一)와 격렬한 불성논쟁을 벌였으며, 국가를 향해 자체적으로 계를 줄 수 있는 권리를 끊임없이 요청했다. 국가로부터 불교의 자주권을 되찾으려는 처절한 외침이었다. 사이초의 오랜 노력은 사후에야 빛을 보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일째 되던 822년 6월11일, 히에이산 엔랴쿠지(延曆寺)에 대승계단을 세워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사이초의 열정으로 일궈낸 일본 최초의 자주적 교단이었다. 56살의 나이로 쓸쓸히 숨을 거뒀던 사이초. 하지만 그로부터 시작된 천태종은 자신의 제자이자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저자인 엔닌(圓仁, 794~864)대에 이르러 진언종을 능가하는 최고의 교단으로 거듭난다.

구카이는 천황과 귀족들의 비호를 받으며 밀교를 널리 홍포했다. 827년 전국에 가뭄이 들자 밀교의 수법(修法)을 펼쳐 비가 내리게 함으로써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는 ‘즉신성불의(卽身成佛義)’ ‘성자실상의(聲字實相義)’ 등을 비롯해 인도, 중국, 일본의 모든 종교와 철학을 종합적으로 비판한 방대한 스케일의 사상서 ‘비밀만다라십주심론(秘密曼茶羅十住心論)’ 등 200여종의 명저들을 잇달아 집필했다. 또 농민들을 위해 치수관리를 맡는가하면 만년에는 학문과 예술을 종합적으로 가르치는 슈게이슈치인(綜芸種智院)을 설립하는 등 교육사업도 전개했다. 슈게이슈치인은 일본에서 처음 서민에게 개방된 무료 교육기관으로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닌 평등한 존재라는 구카이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헤이안(平安) 불교의 양대 산맥이자 가마쿠라 신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히에이산의 전교대사(傳敎大師) 사이초와 고야산의 홍법대사 구카이.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홍법대사진적집성(弘法大師眞蹟集成)’에 수록돼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257호 / 2014년 8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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