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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인연을 묻는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기자명 정장진

복잡한 인연 속에 살아가는 ‘나’는 늘 변화하는 존재

▲ 주인공 해원은 유부남 교수의 연인이었지만, 아니기도 했다. 인연 속에 존재하는 ‘나’는 가변적인 인물일 뿐,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홍상수 감독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영화 전문지인 ‘씨네 21’이 뽑은 2013년 올해의 영화로 뽑힌 영화다. 그래서 수보리도 잔뜩 기대를 갖고 이 영화를 봤다. 하지만 90분 동안 화면은 서울 사직공원 일대와 남한산성 등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지극히 낯익은 주변 풍경만 늘어놓을 뿐 좀 이상했다. 한 번이 아니라 낯익은 풍경을 여러 번 중첩해서 지루하게 보여준다. 또 이 영화에는 일반인들이 영화 하면 떠올리는 극적인 반전이나 화려한 액션도 없다. 주제도 없는 것 같고 교훈도 없다.
 
영화 전문지가 선정한 작품
낯익은 풍경·반전·액션 없어
감독의 의도적 연출 알아채야
 
주인공·주변 인물 관계 불분명
누구의 딸·애인도 아닌 ‘해원’
누구의 딸·애인도 될 수 있어
 
사실 이 영화는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인데, 교훈 같은 것은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슬픔도 기쁨도 잔잔한 미소조차도 없다. 감동은 고사하고 한 마디로 재미라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는 영화가 홍상수 감독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다. 홍상수의 영화에 익숙한 이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에 의당 있게 마련인 것들이 없는 이 점이 바로 이 영화의 특징이고 나아가서는 영화에서는 사라져버린 없는 것들이 감독의 의도적인 연출의 결과임을 알게 되는 순간 영화는 다시 홍상수 식의 재미를, 다시 말해 거의 불교적 깨달음을 가져다준다.
 
▲ 영화 속 해원은 가족관계가 분명하지 않다. 김씨인지 박씨인지 불분명하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없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다름 아니라 영화 제목이 일러주듯이, 여주인공 해원의 가족이다. 우선 해원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서 관객들은 해원의 성을 알 수가 없다. 김씨인지 박씨인지 영화에서는 알 수가 없다. 어머니는 영화에 나온다. 그러나 거의 어머니가 아닌 것처럼 나온다.
 
인간은 아버지 어머니 없이는 태어날 수가 없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아버지가 없다. 잠시 언급은 되지만 등장하지를 않는다. 이런 인물 설정은 처음부터 이 영화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봐달라는 감독의 주문일지도 모른다. 영화 제목 자체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영화 속의 인물들일 뿐, 현실 속의 인물들을 재현하거나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감독은 주인공 해원의 가족관계를 극도로 간략하게만 언급할 뿐이다(이는 영화의 한계만이 아니라 모든 서사 장르의 한계이다. 아버지 어머니 없는 영화와 소설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홍상수는 이 한계에 도전을 하고 있다).
 
영화 초입에 등장하는 어머니 역시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머니가 아닐 정도로 피상적으로만 묘사된다. 해원과 어머니는 5년 동안 떨어져 살았지만 이 짧지 않은 이별의 세월에 대해 감독은 전혀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5년이 지나 두 모녀는 다시 만났지만 바로 다음날 어머니는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 5년 만에 만났지만 내일 떠나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어머니와의 마지막 만남, 보통 영화라면 엉엉 울면서 봐야 할 엄청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사건이지만 영화는 아무 말도 하질 않는다. 마치 이런 이야기들은 가슴 절절한 사연을 잘 그려내는 다른 통속 영화들이 담당할 이야기 거리라는 듯이.
 
해원을 둘러싼 가족관계가 거의 아무런 중요성도 지니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의 사랑 역시 누군가에게 집착하는 사랑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해원은 자기가 다니는 학교의 교수인 성준을 만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아이까지 있는 유부남인 성준을 사랑하고, 성준이 사랑을 하는 것이니 이는 전형적인 불륜이다. 일 년 정도 헤어져 있다가 해원을 다시 만난 성준은 더욱 더 해원에게 매달린다. 그러나 성준은 해원과 헤어져 있는 동안 해원이 같은 과 동급생을 만나 육체적인 사랑도 나누었다는 것을 알자 버럭 화를 내며 해원을 향해 욕을 쏟아낸다.
 
“너 미쳤어? 너 미쳤니, 너 미쳤어! 너 미친년이야 너! 아니 어떻게 나랑 헤어지고 그딴 놈이랑…. 내가 너 얼마나 사랑했는데! 얼마나 우리가 힘들게 헤어졌니, 우리가! 이런 X발 X같은!”
 
성준의 이 분노와 욕설은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 보통의 멜로 드라마가 아님을 잘 일러준다. 아울러 해원이 왜 누구의 딸도 아닌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해원에게 화를 내고 욕을 퍼붓는 성준은 육체적 관계는 사랑하는 사람하고만 맺어야 하는 관계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일러준다. 그렇다면 부인을 놔두고 자신이 몰래 해원과 나눈 사랑은 무엇인가? 이 불륜은 비단 성준만이 아니라 해원이 언니라고 부르는 다른 여인에게서도 볼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이 언니라 불리는 여인이 불륜의 상대인 남자를 데리고 ‘당당하게’ 해원을 만나러 온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성준도 동석을 한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이 영화가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았을 터인데, 홍상수의 감독의 영화에서는 육체적 관계가 연을 만드는 혹은 연을 확인하는 계기로서의 의미를 지니지 못 한다. 영화는 말한다.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야”라고.
해원은 어머니의 딸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른 여인이 해원의 어머니일 수도 있고 또 아버지도 따로 있을 수도 있다. 영화가 해원의 가족관계를 분명히 하지 않고 있으니 이런 의혹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래서 스스로 각본도 쓰고 연출도 한 감독은 영화에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라는 제목을 붙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허구인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불분명한 관계가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보면 이는 단견이자 큰 오산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나오는 꿈속 한 장면에서 해원이 한 외국 여성에게 한 말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당신은 정말 제 딸하고 많이 닮았어요. 당신 얼굴하고, 눈 하고요.” “그녀처럼 될 수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팔겠어요. 난 뭐라도 할 거예요.”
 
▲ 혜원은 꿈속에서 만난 외국인을 영혼까지 팔아서라도 닮고 싶어한다.

어머니를 기다리다 식당에서 잠이 든 해원이 꿈속에서 만나 길을 묻는 한 외국 여성에게 길을 일러주면서 나눈 대화의 한 부분이다. 꿈속 장면인데다가 더욱 의미 있는 것은 “내 영혼이라도 팔겠어요”라는 말이다.
 
꿈속에서 한 말이니 그대로 믿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같은 이유로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인식 전환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그녀처럼 될 수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팔겠어요”라는 이 말이 영화 속 꿈속에서 한 말이라는 점을 조금 강조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허구이지만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과장하고 왜곡하며 재구성하면서 이룰 수 없었던 혹은 하지 말았어야 할 어떤 것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꿈으로서 영화는 어쩌면 어떤 꿈보다 더한 꿈일지도 모른다. 해원의 꿈은 장자의 호접지몽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 속의 꿈이니 꿈속의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어디서부터 꿈인지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사실 해원이 길을 묻는 외국 여성을 만나는 장면이 꿈처럼 스르르 화면을 뭉개며 묘사되며 꿈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도 않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분명치 않은 것이다. 게다가 해원은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영혼을 팔다니! 기껏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의 딸도 될 수 있다. 누구의 애인도 아닌 해원은 같은 이유로 누구의 애인도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살과 뼈를 지닌 실존체인 해원은 그럴 수가 없다. 누구의 딸도 아닌 그 상태로, 누구의 애인도 아닌 그 조건으로 모든 이의 딸과 애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꿈속에서만 가능하다. 영화 속에서만. 아마도 해원은 그런 영화라면 영혼도 팔 수 있었을 것이다. 나비처럼 날아 영화 속으로 아니 영화 속의 꿈속으로 날아 갈 것이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더욱 더 꿈인 것이다. 홍상수는 이 꿈을 영화로 만들어 보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위험하고 실패를 각오해야 했다. ‘씨네 21’의 30인 필진이 2013년의 영화로 선정했지만 영화에 대해 글 쓰는 필진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외면 받는 영화를 각오해야 했던 것이다. 그의 선택에 박수 같은 것을 보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각오 자체는 박수 받을 만 하지만 작품은 아직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꿈 보다 해몽이 좋으면 영화 전문지 전문가들에게는 박수를 받을 것이다.
 
홍상수는 사물과 인간들에게 전혀 다른 성질과 품격의 카메라를 들이댄다. 아니 그의 카메라는 거의 20세기 회화의 문을 연 세잔느 식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려고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눈으로 하여금 세계를 그렇게 보도록 하는, 사물들 사이에서 그것들을 모이고 흩어지게 하는 구성과 조형의 원리를 세잔느가 탐구하려고 했다면, 홍상수 역시 그러하다. 주인공의 가족관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육체적 관계도 그렇게 핵심적인 것은 아니야, 사실 우린 모두 잠시 이 세계에 머물다 가는 거야, 우린 꿈속의 꿈을 꾸는 거야, 울고불고 난리 피지 말아, 울고불고 하는 영화는 거짓말이잖아, 우리는 영화 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에서 살고 있잖아, 보다 견고한 것, 허상이 아닌 실체, 모습들이 아니라 그 모습들의 보다 근원적 원리….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 싶다.” 잘 알려진 정현종의 시다. 한 편의 선시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그렇지만 갈 수는 없다.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그 섬에 간 사람은 인류 역사상 몇 안될 것이다. 부처님, 예수님, 공자…. 그 누구의 딸도 아닌 상태에서 모든 사람들의 딸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 사이의 섬에 가야 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가고 싶다는 욕망은 필요하다. 이 욕망이 있어야, 다시 말해 이 원(願)이 있어야 부처님을 믿든 예수님을 믿든, 섬에 도착한 존재들의 부름에 귀를 열어놓을 수가 있다. 홍상수에게 영화는 그리고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시인이 가고 싶다는 섬을 말하는 방법이다. 해원은 섬이 아니라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원(願)의 표현이었다. 영화는 불가능한 일에 도전할 때 영화의 한계와 함께 진면목을 드러낸다. 눈에 보이는 것이, 살로 느끼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결코 다일 수가 없다는 깨달음이 영화가 도전 할 때, 실패 할 때, 찾아올 것이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이다. 모든 남자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여자, 창녀이자 동시에 성녀인 불가능한 여인, 모두들 그 곳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그녀의 이름이 해원이다. 해원, 한자로 쓰면 아마 ‘海願’이라고 써야 할 것이다. 그녀에게는 아버지의 이름 같은 것은 없다.
 
정장진 문화사가 jjj1956@korea.ac.kr

[1257호 / 2014년 8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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