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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조영석, ‘바느질’

기자명 조정육

모자람에서 여유로움을 찾고, 불편함에서 너그러움을 배운다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 화엄경

후손들이 만들어준 화첩에
‘후회 필요 없다’ 제목 지어
자신의 마음 표현한 조영석

세상사 마음먹기에 달려있어
슬퍼도 즐겁게 살 줄 알아야

▲ 조영석, ‘바느질’, 종이에 연한 색, 24.4×23.5cm, 간송미술관.

내 부모님은 전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12년 전에, 아버지는 3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두 분 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고마운 분들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어머니는 12년 동안 한결같이 보고 싶어 목이 메는데 아버지는 그다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는 불효막심한 딸인가. 사람의 도리를 잊어버린 패륜아인가.

세 아낙네가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다. 한 사람은 가위질을, 두 사람은 바늘로 천을 꿰매고 있다. 배경은 전부 생략됐다. 오직 인물에만 초점을 맞췄다. 아낙들은 옹색하게 앉아있다. 자세는 조금 어색하다. 앉은 자세가 잘못돼서가 아니다. 그린 사람의 필치가 능숙하지 못해서다. 어색하다 못해 필력이 부족해 보인다. 김홍도(金弘道, 1745~?) 풍속화의 자연스러움에 눈이 길들여진 감상자라면 ‘바느질’의 인물묘사가 더욱 눈에 거슬릴 것이다. 특히 가운데 앉은 아낙네가 부자연스럽다. 그런데 이상하게 ‘바느질’은 들여다볼수록 정감이 간다. 더 없이 익숙하다. 유명한 배우들이 등장해 대본대로 능숙하게 연기한 드라마를 보다가 연기가 무엇인지도 모른 평범한 이웃들이 출연해 삶의 실제모습을 생짜로 보여준 인간극장을 보는 것 같다. 훌륭한 기교는 졸렬해 보인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세계다. 서툰 필치를 변호하려는 게 아니다. 직업화가의 장인정신을 폄하하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는 완벽한 시공을 자랑하는 직업화가의 작품도 있는 반면 취미 삼아 붓을 든 문인화가의 작품도 있다는 뜻이다.

‘바느질’은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1686~1761)이 그린 ‘사제첩(麝臍帖)’에 담겨 있다. ‘사제첩’은 그가 자신의 삶 주변에서 본 풍경을 유탄(柳炭)으로 스케치하듯 그린 화첩이다. 모두 15점이 담긴 화첩에는 새참, 우유짜기, 선반작업, 작두질, 마구간 등 서민들의 일상생활이 솔직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김홍도 풍속화에 큰 영향을 준 소재들이다. 사제(麝臍)는 사향노루의 배꼽이라는 뜻이다. 왜 그가 화첩 제목으로 사향노루의 배꼽을 선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표지에 ‘사제(麝臍)’라는 제목을 쓴 후 그 곁에 ‘남에게 보이지 말라. 범하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勿示人犯者非吾子孫)’라고 첨가한 것을 보고 추측할 수는 있다. 사향노루는 노루의 몸에서 사향(麝香)이 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사향은 사향노루 수컷의 사향주머니에서 만들어진 향즙(香汁)이다. 멀리서 맡으면 향긋한 향이 있어 고급 향수의 원료로 쓰인다. 페로몬향의 원조 격이다. 혈액순환, 의식장애, 뇌졸중 등에 뛰어난 효능이 있어 고급 약재로도 쓰인다. 사향노루가 사냥꾼의 표적이 된 것은 바로 이 사향 때문이다. 다 자란 사향노루 한 마리에서 나온 사향의 무게는 약 25g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사향노루를 죽여야 필요한 만큼의 사향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사향노루가 천연기념물이 된 원인도 사향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장자(莊子)’에서 쓸모 있음으로 해서 쓸모없어진 것의 비유를 보는 것 같다. 즉 산의 나무는 쓸모가 있어서 스스로 자기를 베게 만들고, 등불은 스스로 제 몸을 태우고, 계수나무는 계피를 먹을 수 있어서 베어지고, 옻나무는 쓸모 있어서 쪼개진다. 자신이 쓸모없다고 해서 시무룩할 일이 아니다. 사향노루의 사향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향노루는 사냥꾼에게 잡히면 자신이 죽게 된 원인이 배꼽에서 나온 사향 때문이라 생각하고 배꼽을 물어뜯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잡힌 몸이라면 배꼽을 물어뜯어봤자 소용없다. 따라서 조영석이 쓴 ‘사제’에는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 사향노루는 그렇다 치고 조영석에게는 어떤 일이 있어 사제의 이야기를 차용한 것일까.

그 사연은 ‘사제첩’에 발문을 쓴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1671~1751)의 글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이병연은 조영석 뿐 아니라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과도 친분이 두터운 시인이었다. 그림을 잘 그린 조영석은 50세에 세조(世祖) 어진(御眞)을 옮겨 그리게 될 감조관(監造官)으로 천거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붓을 들어 어진제작에 참여해야 되는 것으로 오해하고 영조(英祖)의 부름에 응하지 않아 옥살이를 했다. 당시 그림 그리는 일은 천기(賤技)라서 사대부가 그림에 능한 ‘선화자(善畵者)’로 이름이 알려진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림은 그저 마음을 수양할 때 취미 삼아 그리는 여기(餘技)일 뿐이었다. 조영석 또한 자신이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로써 유학자가 아닌 천한 기술을 지닌 공인으로 알려질 것을 두려워했다. 이것이 그가 왕의 부름을 거역한 이유였다.

그림 때문에 옥살이를 겪은 조영석은 절필을 감행한다. 더 이상 조영석의 그림을 볼 수 없게 된 후손들은 안타까웠다. 후손들은 조영석이 예전에 그린 작품을 모아 화첩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사제첩’이다. 조영석은 과거에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고 후회가 밀려왔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미 과거에 그린 그림이 아닌가. 더구나 후손들이 화첩으로 만들어 소장하고 싶어 한 그림이다. 자기가 그린 그림이라고 함부로 폐기처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향노루가 사향 때문에 사냥꾼에게 붙잡혀 자신의 배꼽을 물어뜯어봤자 소용없는 것처럼. 그래서 후손들이 묶어 온 화첩을 받아들고 표지에 제목을 적었다.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뜻의 ‘사제’와 함께 당부의 말까지 적어놓았다. 여기 그림은 재주를 자랑하기 위해 그린 것이 아니라 심심풀이삼아 스케치하듯 그렸으니 그저 집안 식구들끼리만 펼쳐 보거라. 남의 눈을 의식하고 그린 그림이 아니니 명심해야 하느니라. ‘남에게 보이지 말라. 범하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라는 의미는 만약 집안 어른인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집 밖의 사람들에게 보이면 ‘호적에서 파버리겠다’는 엄포나 다름없다. 그의 후손들은 비교적 선조의 가르침을 잘 지켰다. ‘사제첩’은 최근까지 ‘남에게 보여지지 않다’가 1980년대에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조영석의 노여움도 그다지 크지는 않으리라.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낸다.

오온이 마음을 따라 생겨나는 것이니

이 세상 모든 것은 이렇게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도 또한 그러하다.

마음과 부처,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관하라.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

화엄경을 대표하는 게송이다. 특히 마지막에 적힌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한문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이 문장을 멋들어지게 표현하면 ‘세상사 마음먹기에 달렸다’가 될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려운 시대를 살았다. 세 끼 밥을 해결하는 것이 최고의 선결과제였던 시대였다. 언제 쌀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참 힘든 시대였다. 그런데 똑같은 조건, 똑같은 상황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인생을 선택한 방법은 정반대였다. 어머니는 항상 밝고 쾌활하셨다. 아버지는 항상 어둡고 심각하셨다. 어머니는 부드러웠고 아버지는 딱딱했다. 어머니는 포용력이 있었고 아버지는 강경했다. 어머니는 담대했고 아버지는 소심했다. 이런 반응은 결코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상황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가 문제였다. 같은 밥상에서 같은 반찬을 먹고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산 부부인데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두 분을 지켜보면서 나는 인생을 대하는 소중한 태도를 배웠다. 부유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넘쳐서 여유로운 것이 아니고 편안해서 너그러운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살아내야 할 인생이라면 웃으면서 즐겁게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어머니는 그 깊은 진리를 알고 계셨다. 어머니는 불교를 모르셨다. ‘금강경’도 모르셨고 ‘화엄경’도 ‘법화경’도 모르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불교의 진수를 가장 잘 알고 실천하셨다. 낮에 밭일을 하고 돌아와 밤에 바느질을 하는 고단한 삶속에서도 어머니는 ‘왜 나만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불평이 없었다. 아무리 일을 해도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살림살이를 꾸려가면서도 주저앉은 적이 없었다. 그저 주어진 일을 하실 뿐이었다.

그럴 때 어머니의 모습은 중생들을 위해 온 몸으로 보살행을 실천하는 관세음보살이었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내면서 참아낸다는 생각조차 없는 인욕보살이었다. 보살행은 이렇게 실천하는 거라고 묵묵히 모범을 보여준 선지식이었다.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인생의 해답을 구할 동안 나는 어머니라는 스승에게서 그 해답을 찾았다. 내가 어머니를 잊지 못한 이유는 어머니의 삶에서 무주상보시의 전형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내게 말이 아닌 실천으로 불교교리를 가르치셨다. 내가 살아오면서 웬만한 시련 따위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비법은 어머니라는 선지식을 통해 보고 배운 도력 때문이다. 이것이 어머니에게 전수받은 의발의 힘이다.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그리워하는 이유다.

나의 어머니는 바느질을 잘 하셨다. 옷이 떨어지거나 헤지면 그 즉시 꿰매주고 고쳐줘서 나는 언제나 단정한 옷을 입었다. 덕분에 나는 낡은 옷은 입었을지언정 구멍 나거나 찢어진 옷은 입지 않았다.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 때문이었다. 조영석이 그린 ‘바느질’은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 같은 그리움을 주는 것은 그 안에 어머니의 희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로써 주부로써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그림의 배경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세상사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법문을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림 속 아낙네들의 얼굴에는 그늘이 없다! 우리 어머니도 그러셨다.

아름다운 명절 추석이 다가왔다. 명절이 되면 누구나 다 힘들다. 주부는 주부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색깔의 차이만 있을 뿐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기왕이면 우리 모두가 행복한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어머니라고 해서 어찌 명절이 행복하고 즐겁기만 했겠는가. 어머니라고 어찌 명절증후군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명절증후군이 없었다. 명절증후군을 명절증후군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으므로 명절증후군이 없었다. 마치 지장보살이 지옥에 가도 지옥을 지옥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것이 세상사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내용이다. 이 마음은 부처와 중생의 차별이 없다. 나도 내 자식들에게 우리 어머니처럼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60호 / 2014년 9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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