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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선원장 진옹 월성 스님

“악행도 나를 일깨우는 스승…세상에 내칠 사람 없어”

▲ ▲ 월성 스님은 1952년 구례 화엄사로 출가해 금오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한 후 20년 넘게 해인사, 송광사, 칠불사, 불국사, 각화사선원 등 전국 제방선원에서 수선안거했다. 1975년 복천암과 인연을 맺은 후 지금까지 복천선원에 주석하고 있다. 최근 저서 ‘오도에서 열반까지’(사유수)를 선보였다.

속리산 복천선원장 진옹 월성(震翁 月性) 스님은 최근 역대 한국선사들의 오도·열반 경지를 표출한 ‘오도에서 열반까지’(사유수)를 선보였다. 책 ‘머리말’ 끝에 새겨진 한 줄이 복천암으로 향하게 했다. ‘오늘 하루도 눈 뜨면 오도송을, 눈 감으면 열반송을 부르는 행복한 날 되시길 바랍니다.’

스님 된 친구 부처님 자랑에
덕숭좌장 금오 스님에게 출가

‘까까중’ 놀림 견뎌내며 탁발
스승 말없는 법문 ‘하심’ 체득

사형 탄성 당부에 복천암 맡아
40년간 머물며 선객들과 정진

신미대사 자료수집·연구 매진
한글창제 주인공 세상에 알려

한 사람 걸을 만한 오솔길 끝에 월성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요사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름은 뭐라 했을까’ 궁금했는데 이런! 현판이 없다. 방사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이 압권인데 눈만 보아도 누군지 단박에 알 만한 풍모를 지녔다. ‘좌선하다 졸기만 하는 놈은 필요 없으니 당장 선원을 떠나라!’ 호령했던 ‘덕숭문중 금까마귀’ 금오 스님이다. 벽면 한 자리에 시 한 수 걸려 있다.

‘十年端坐擁心城(십년단좌옹심성, 십년을 단정히 앉아 마음의 성을 지키니) / 慣得深林鳥不驚(관득심림조불경, 깊은 숲의 새가 놀라지 않게 길들었구나) / 昨夜松潭風雨惡(작야송담풍우악, 어젯밤 소나무 숲에 비바람 사납더니) / 魚生一角鶴三聲(어생일각학삼성, 물고기에 뿔이 나고 학은 세 번 울음 우네).’
“서산 스님을 좋아하시는지요?”

월성 스님, 족자 한 번 쓰윽 보고는 “누가 써 준건데…. 난, 몰라요. 글도 뜻도 전혀 모릅니다.”

이런! 잘못 짚었다. ‘학이 세 번 운 연유’라도 여쭤보았으면 소참법문 한 토막이라도 들었을 터인데, ‘좋고 나쁨’의 분별 털어 낸 선지식에게 누구 한 사람 꼭 집어 ‘좋아하시느냐?’ 묻다니. 벽에 걸린 족자 하나로 상대를 평가하려는 ‘못된 선입관’을 에둘러 나무라는 것임에 분명하다. 글을 모를 리 없는 월성 스님이다.

어려서 사서삼경을 가까이하며 한자를 새겼던지라 경전 몇 장 보고 ‘불교는 심오할 것’이라 생각했던 월성 스님. 그런 그 때, 하필 이웃 친구가 스님이 되어 고향 남원으로 돌아왔다. 그 친구, 아니 그 스님 하루 종일 불교 얘기뿐이다. 만면에 웃음 머금으며 ‘부처님 자랑’하는 스님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승복 하나 걸쳤지만 세상을 다 가진 듯 자신만만해 하는 그 스님이 정말 부러웠다. 그 길로 곧장 실상사로 향했다.

‘수행하러 왔다’하니 ‘출가 안 하면 도량에선 수행할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정식 행자가 아닌, 그렇다고 거사도 아닌 채 산사에 머물렀다. 어느날, 정말이지 눈이 부리부리 해 숨이 턱 막힐 듯한 스님 한 분이 수좌들과 도량에 들어섰다. 화엄사 가는 길에 하룻밤 묵으려 잠시 들른 금오 스님 일행이었다. 한 눈에 ‘큰 재목’이라는 걸 직감했던 것일까! 다음날 아침, 금오 스님이 말했다.

“일어서라. 가자!”

차도 없던 그때, 80리 걸어 노고단을 넘고 거기서 30리를 더 걸어 화엄사에 도착한 후 삭발했다. 그 때 함께 머리를 깎았던 스님이 조계종 전 총무원장 월주 스님이다.

▲ 복천암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이뭣고 다리’를 건너야만 한다.

‘이뭣고’ 화두 하나 들고 화엄사, 불국사, 칠불선원, 태백산 동암 등 전국의 제방선원을 찾아 은산철벽과 마주했다. 문경 봉암사 백련암에 있을 때 금오 스님 제자 중 한 분인 월남 스님이 찾아왔다. 월성 스님의 직계 사형이다.

“탄성 스님이 법주사로 오라 하시네!”

탄성 스님 역시 금오 스님 제자로서 월성 스님의 사형이다. 솔직히 법주사행은 마땅치 않았다. 백련암 기운 덕에 정진 힘이 한참 붙고 있던 차였는데 법주사로 오라니!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는 일. 탄성 스님의 당부도 중했지만 법주사에서 봉암사까지 먼 걸음한 월남 사형의 노고가 너무도 귀하지 않은가.

‘하룻밤 묵고 오자!’

탄성 스님을 만났지만 ‘복천암서 하룻밤 보내시라’는 인사 외엔 별 말씀이 없었다. 법주사보다 더 깊은 산중에 자리한 복천암의 고즈넉함은 좋았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주지를 맡고 있던 스님이 “편히 쉬시라!” 인사 한 번 건네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후 밤늦게까지 촛불 하나 켜 놓고 뭔 일을 하고 있었다.
‘암주도 할 일이 많은가?’

▲ 동산, 고암, 성철 등 당대 내로라하는 선지식들이 수행했던 복천선원.

다음 날 아침. 그 암주, 월성 스님 앞에 서류 뭉치 놓으며 “스님, 잘 계십시오.” 하고는 줄행랑이다! 이 모든 게 탄성 스님의 뜻일 터. 복천선원 유명세에 수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터인데 곡식은 어떻게 장만한단 말인가. 기왓장 한 장 시주 받을 자신(?) 없던 월성 스님이었으니 당시 곤혹감이란 지금도 형언하기 어렵다고 한다. 복천암 인연은 1975년 그렇게 닿았고 지금까지도 스님은 이 도량을 떠나지 않고 있다. 비 새던 암자를 지금의 사격으로 갖춰 놓은 것도 월성 스님이다.

복천암에 바랑 놓은지 4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좀 지겹지 않으신가?” 여쭤 보니 “어제 온 듯하다”며 미소를 짓는다. “사진 속 금오 스님이 지금도 호령하는 것 같다” 하자 잠시 창밖 한 번 내다보고는 이른다.

“대단하셨지. 그 분 밑에서 배겨나기만 하면 뭔가 되는데. 그게 참 어려웠어요. 뭣 보다 참선 중에 조는 꼴을 못 보시는 어른이셨지. 죽비고, 주먹이고 그냥 한 방 날아가!”

‘참선수행 중 졸고 앉아 있으면 꿈 속 떡장사에게 떡은 얻어먹을지언정 견성성불을 이루기는 애초부터 글렀어’(‘꽃이 지니 바람 부네’ 중 인용)라 했던 금오 스님이니 그러고도 남았을 법하다.

“그래도 가장 힘들었던 건 탁발이었어요. 걸망 하나 짊어지고 나가 봐요. 개들은 짖지, 애들은 ‘까까머리 중 왔다’며 놀리지. 집주인에게 문전박대라도 당해 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내리면…. 허허, 참.”
자존심 상해 논두렁이나 밭둑에 풀썩 주저앉기 일쑤였다. ‘이 짓하러 사문에 들어왔나?’ 내상 입은 일부 스님들은 그 자리에서 곧장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월성 스님도 많은 눈물을 삼켰다고 털어놨다. 금오 스님 별명 중 하나가 ‘움막 중’이다. 보임 중 거지 무리에 들어가 7일 동안 똑같은 생활을 한 금오 스님은 이후에도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2년 동안 거지행세를 하며 고행을 자청했다. 그 때 몸소 얻은 ‘그 무언가’를 제자들에게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주는 건 재미있고 행복하지. 받는 건 어렵고 창피한 일이야. 탁발을 통해 ‘하심’을 체득하게 하고 싶었던 겁니다.”

▲ 복천암 전경.

은사의 깊은 뜻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기에 월성 스님은 끝까지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리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로 손꼽히는 한글. 그 한글을 창제한 사람은 세종이 아닌, 그렇다고 신숙주, 성삼문도 아닌 신미(信眉, 1405?~1480?) 대사라는 사실을 만 천하에 전한 주인공이 월성 스님이다. 복천암 주지 소임을 맡은 직후 이 도량에 주석하고 있던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의 주역이란 사실을 접하고는 자료수집에 심혈을 기울였다. 신미대사와 관련된 족보와 신미대사의 친동생 김수온이 썼다는 ‘복천보장’을 전달받은 인연도 신미대사의 한글창제 사실을 밝히겠다는 월성 스님의 열정에 기인한 결과였으리라. 월성 스님은 ‘복천보장’과 영산 김씨 족보를 통해 신미대사가 한학뿐 아니라 범어에도 능통한 학승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집현전에 초빙돼 한글창제에 임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월성 스님의 열정에 힘입어 신숙주, 성삼문 등의 집현전 학자들이 세종을 도와 한글을 창제했다는 가설은 이제 힘을 잃었다.

“세종실록만 유심히 살펴봐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성삼문은 한글이 창제될 무렵 집현전에 들어 왔습니다. 신숙주는 한글창제 2년 전에 들어왔지만 입성하자마자 그 다음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들이 한글창제에 관여할리 없습니다. 한글창제 반포를 반대했던 게 누굽니까? 집현전 부제학 실무담당 최만리를 비롯해 신석조, 김문, 정창손 등은 한글반포 상소문까지 올렸습니다.”

당시 집현전 학자들이 세종에게 올린 상소문 주요 내용은 이렇다. ‘굳이 언문을 만들어야 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재상에서 신하들까지 널리 상의한 후 후행해야 할 것인데 갑자기 널리 펴려하니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창제와는 거의 무관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유학자들의 반대를 일찌감치 예상한 세종이 신미대사에게 ‘은밀히 한글을 창제하라’ 당부했을 겁니다.”

세종이 신미대사에게 ‘혜각존자’라는 법호를 내린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월성 스님은 강조했다.

“세종은 신미대사가 머무르던 복천암 불사를 지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미대사에게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법호도 내렸습니다. ‘존자’라는 명칭과 함께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祐國利世·우국이세)’는 문구까지 포함시킨 것만 보아도 신미대사를 향한 세종의 마음이 얼마나 지대했는지 알 수 있지요.”

세종의 최대 프로젝트 중 하나였던 ‘한글창제’ 과업을 직접 이룬 신미대사였기에 ‘혜각존자’라는 법호를 세종이 직접 내렸다는 설명이다. 신미대사의 한글창제 사실은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에 명시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억불숭유시대였습니다. 신미대사 업적은 철저히 가려지고 삭제됐습니다. 왜곡된 신미대사에 대한 기록 복원과 함께 한글창제의 역사를 새롭게 정립해야 합니다.”

‘신미대사가 한글을 창제했다’는 사실이 교과서에 실리기를 월성 스님은 내심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복천암 힘만으로는 버거워 보인다. 지속적인 학술세미나를 통한 연구가 뒷받침되지 않고는 어려워 보이는데 재정이 녹록치 않다.

월성 스님은 세납 80이 넘어서도 선원장을 맡으며 눈 푸른 납자들과 함께 용맹정진하고 있다. 수좌의 혜안에 비친 ‘지혜의 일언’이 듣고 싶어 사부대중을 향한 메시지를 부탁드렸다. 그러나 스님은 “깊이 있는 법문은 큰스님께 들으시라”며 손사래 친다. 하여, 사는 동안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 하나를 다시 부탁드렸다.

“좋은 사람, 착한 행동은 그대로 배워야하니 스승입니다. 하지만 악한 사람, 나쁜 행동도 우리의 스승으로 삼아야 합니다. ‘저렇게 말하고 행동하면 안 돼’라고 일러주잖아요.”

▲ 한글창제 주역 신미대사 부도탑(右). 제자 학조화상 부도탑(左).

‘깨우쳐 주면 스승’이라는 뜻이다. 세상에 내칠 사람 없다는 가르침이다. 복천선원의 일주문을 두드려 보라. ‘무심(無心)’의 ‘눈(眼)’을 소유한 수좌의 기품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산을 내려오는데 한 생각이 스쳐갔다. 우리가 쓰고 있는 문자 ‘한글’을 누가 만들었는지 밝히는 게 복천암만의 일인가? ‘한글로 세상과 소통’하는 모든 사람들의 몫이다. 신미대사 부도탑이 눈에 아른거린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261호 / 2014년 9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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