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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대변(大辯) 스님의 거지꼴

기자명 성재헌

“행색이 초라하지 도는 초라하지 않다네”

▲ 일러스트=이승윤

가을이다. 논두렁 잡초도 씨를 맺는 계절이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가지를 뻗고, 속살을 채워 여물어 간다는 것, 비단 식물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사람의 일생도, 또 뜻을 둔 과업도 생장숙장(生長熟藏)의 과정을 거치긴 마찬가지이다. 찬 기운이 가시지 않은 옅은 봄볕에 기적처럼 싹을 틔우고, 모진 비바람 속에서 용케 꽃을 피우고, 찌는 더위와 물벼락을 견디고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어떨까? 가을 찬바람에 이보다 쓸쓸한 일도 없지 싶다.

불법(佛法) 공부도 예외는 아니지 싶다. 애초에 무위(無爲)의 성자(聖者)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불법 공부 역시 유위(有爲)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따라서 분명한 목표와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고, 그 노력은 결과를 성취해야 마땅하다. 즉 그 단어에 내포된 의미야 다르겠지만 ‘성공(成功)’이란 세간에서도 출세간에서도 필요한 것이다.

세상살이에서는 흔히 부와 명예를 성취하는 것을 두고 ‘성공’이라 말한다. 그럼, 출세간의 가르침인 불법에서는 무엇을 ‘성공’이라 할까? 번민과 갈등을 벗어나 평온한 삶을 성취하는 것이고, 궁극에는 죽음의 공포마저 뛰어넘는 명쾌한 통찰력을 갖추는 것이다. 즉 무위(無爲)의 열반과 해탈, 그것이 불법 공부를 한 사람들이 거둬야할 열매이다.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대로 나름 열반과 해탈이라는 열매를 맺어 그 달콤함을 맛본다면, 그는 불법을 공부한 보람이 있다고 할 것이다.

주위를 돌아보면 불법 공부의 성공 여부를 세간법의 기준으로 판가름하는 경우가 있다. 애초에 돈과 명성이란 불법과 상관없는 것이다. 도리어 번뇌와 갈등을 양산하는 골칫거리로 보고 경계하고 멀리하라는 말씀을 부처님도 하시고, 조사들께서도 하셨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부처님과 조사들의 숫자는 적고, 세간법에 휘둘리는 보통사람들은 많다. 그러니 진정으로 출세간법의 열매를 얻어 스스로 행복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절로 가슴이 후련해진다. 대변(大辯) 스님도 그런 분 가운데 하나셨다.

대위법태(大潙法泰) 선사의 수좌(首座)로 긴 세월을 보내던 대변(大辯) 스님이 드디어 세상에 나와 여산(廬山) 서현사(棲賢寺)의 주지가 되었다. 대변 스님은 큰 사찰의 주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차림새며 일상생활이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옷이라고 해봐야 늘 입던 누더기 한 벌이 고작이고, 귀한 손님이 찾아와도 대접은 소탈한 웃음에 차 한 잔이 고작이었다. 신자들이 비단으로 지은 좋은 법복을 선물하면 정중히 거절하였고, 도저히 거절하지 못할 상황이면 받아두었다가 노스님들에게 골고루 나눠드렸다. 번번이 이러자 시자들이 불만을 토로하였다.

“어른 스님께서 위엄이 있으셔야지 저희들도 따라 체면이 서지 않겠습니까. 좋은 옷이 들어오면 다음에는 제발 거절하지 마십시오.”

대변 스님이 싱긋이 웃으셨다.

“좋은 옷으로 위엄이 설 것 같으면, 아예 관도 쓰고 복대도 둘러야겠구나.”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말이 아니면?”

“서현사 주지스님은 거지꼴이라고 하도 수군거리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대변이 깔깔대며 배꼽을 잡았다.

“맞는 말이네, 맞는 말이야.”

“스님은 거지라고 놀림 받는 게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한참을 웃던 스님이 길게 숨을 돌리고 시자에게 말씀하셨다.

“비구(比丘)의 뜻이 걸사(乞士)가 아니냐. 거지를 거지라고 하는 게 뭐가 잘못이냐? 도리어 남들 눈에도 거지로 보일 정도가 되었다니, 난 도리어 뿌듯하구나.”

“스님은 이 절의 최고 어른이십니다. 좋은 옷 입는다고 탓할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시자의 안타까운 눈빛에도 대변 스님은 그저 웃으실 뿐이었다.

“나는 좋은 옷 입고, 좋은 음식 먹으려고 평생 불법 공부한 게 아니다, 이놈아.”

그 후로도 절의 스님들이며 신자들이 누차 말씀드렸지만 도통 바뀌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지사의 초청으로 산을 내려갔는데, 날이 저물어 구강(九江)의 동림사(東林寺)에서 하룻밤 묶게 되었다. 인사를 하러 방장실로 올라온 대변 스님을 보고 혼융(混融) 스님은 마루에 서서 혀를 찼다. 대변 스님은 대나무지팡이에 떨어진 짚신을 신고 있었다.

“한 사찰의 주지라는 자가, 그것도 지사를 만나러 간다는 자가 이 꼴이 뭔가!”

대변 스님은 웃으며 대꾸하였다.

“인생살이 뜻대로 살면 그게 행복인데, 제게 무슨 허물이 있다고 이러십니까?”

비단가사를 걸친 혼융 노장은 너덜너덜한 누더기를 걸친 후배를 마당에 세워놓고 꾸짖었다.

“스님이란 모름지기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지. 행동거지가 이 모양이면 스스로를 업신여기는 꼴이 아닌가? 예의가 형편없구나.”

그러자 대변 스님이 정중히 합장하고 혼융 스님에게 말씀드렸다.

“조각된 용은 비를 뿌릴 수 없고, 그림 속 떡으로는 주린 배를 채울 수 없습니다. 납자들이 안으로 실다운 덕을 갖추지 못하고서 밖으로 화려하게 꾸미는 것에만 신경 쓴다면, 그건 썩어서 물이 줄줄 새는 배에다 화려하게 단청을 하고 허수아비 사공으로 육지에 닿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실로 구경거리야 되겠지만 물을 건너다 갑자기 풍파라도 만나면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혼융 노장은 불쾌하단 표정으로 문을 닫아버렸다. 원주의 안내로 객실로 내려온 대변 스님은 붓과 벼루를 청해 게송 한 수를 써놓고, 조용히 그 절을 떠났다.

서현사 주지 볼품없다 소리 하지 마소
행색이 초라하지 도는 초라하지 않네
떨어진 짚신이지만 호랑이처럼 사납고
대나무 지팡이지만 용처럼 꿈틀거린다네

목마르면 조계의 감로수를 마시고
배고프면 밤송이를 통째로 삼키나니
구리 대가리에 무쇠 마빡인 자들아
모조리 아상만 산처럼 드높구나 

다음날 아침, 혼융 스님은 이 게송을 보고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1261호 / 2014년 9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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