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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수기관(授記觀)

부처와 중생 근본 차이 없어…수기는 무의미

▲ 그림=김승연 화백

역사적으로 볼 때 세상에 출연하신 부처님은 석가모니 한 분 뿐이다. 불교는 석가모니부처에 의해 세워진 가르침이다. 그 분이 없었다면 불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경전에는 많은 부처님들이 석가모니 이전에도 존재했다고 나온다. 과거 일곱 분의 부처님이나 스물네 분의 부처님 혹은 천 분의 부처님 설 등이 그것이다. 부처님의 출현은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계속된다.

한시대 한분의 부처님 출현
초기불교는 엄격한 수기관

동시대에 여러 부처님 출현
대승은 수기를 방편으로 간주

초기경전은 한 시대에 한분의 부처가 출현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대승경전에는 무수한 불국토에 무수하게 많은 부처님들이 출현한다. 경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뒤를 이어 미륵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다고 설하고 있다. 미륵부처님은 아일다라는 보살의 후신으로 현재 도솔천에 머무르면서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 앞으로 오십육억칠천만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게 되면 아일다보살은 성불하여 미륵부처님이라는 칭호를 얻고 석가모니부처님이 교화하지 못한 나머지 중생들을 전부 교화시킨다.

그런데 과거 부처님이 되었건 미래 부처님이 되었건 부처들이 세상에 출현하는데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 수기(授記)이다. 수기란 부처님이 보살에게 다음 세상에 부처가 될 것을 예언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들은 과거의 부처들로부터 성불을 미리 예언 받았고 이에 따라 불과를 이루어 세상을 교화한다. 가섭부처님을 비롯한 과거 일곱 분의 부처님과 스물네 분의 부처님이 모두 바로 이전의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았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아 성불했다. 앞으로 출현한다는 미륵부처님 역시도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아 성불을 하게 된다. 초기불교에서 이런 일대일의 수기방법은 성불을 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사항으로 보고 있다. 이는 부처님의 설법방식을 나눈 십이부 경전 중에 수기 항목이 들어가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문답식으로 법을 설하다가 특정한 수행자에게 미래세에 부처가 될 것을 예언한다. 예언대로라면 미래 부처님은 이미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은 아일다보살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누구도 성불하기는 불가능하다. 한 시대에 한 분의 부처님만이 이 세상에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상좌부 불교권에서 성불한다는 용어를 쓰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행을 해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경지는 아라한으로 성불을 목표로 수행한다는 것은 너무도 특별한 경우이다. 초기경전은 수행자가 부처를 이루기 위해서는 부처님을 만나 수기를 받아야 하고 무려 삼아승지겁 동안 보살도를 닦아야만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평범한 인간의 시각에서 본다면 부처님은 신화적 존재로 사실적 인물로 받아들이기란 힘들다.

이런 초기불교의 수기방식에 대해 대승불교에서는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한다. 대승경전은 초기경전처럼 수기를 중요하게 보지 않는다. 도리어 본래성불설(本來成佛設)이나 일체법진여설(一切法眞如設) 등에 입각한다면 초기경전의 수기방식은 당위성이 희박해진다. ‘금강경’의 “여래가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어떤 법도 얻은 바가 없다”는 내용은 법은 본래 공한 것이므로 얻을 수 없다는 의미인 동시에 전통적인 수기의 방식을 거부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유마경’에 수기의 당사자인 미륵보살에게 유마거사가 “수기란 과거 현재 미래가 본래 없으므로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며 일체 법과 중생들이 진여이기 때문에 이미 미륵보살과 더불어 수기를 받은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 이를 보면 대승불교에서 요구하고 있는 수기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확실해진다. 일체법이 공함과 진여임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대승불교에서는 세간 그대로의 모습과 중생들 모두가 이미 성불한 것이기에 새삼 특정한 인물을 성불의 대상으로 삼아 수기를 줄 필요성이 없다. 대승의 차원에서는 과거의 부처님과 현재의 부처님 그리고 미래의 부처님 사이에는 아무런 구분이 없다. 부처와 중생의 사이에 있어서도 아무런 차별이 없다. 다만 미혹 차원에서 삼세의 부처님이 각각 나타나고 부처와 중생 간에 높고 낮음의 차별이 있을 뿐 본래의 모습은 동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대승불교의 태도는 수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과거 부처님과 미래 부처님들에 관해 크게 비중을 두지 않게 되는 신행 형태로 발전한다. 한국불교가 미래부처님인 미륵신앙의 영향이 컸다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법에 입각한 순수한 미륵신앙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역사 속에서 자칭 미륵이라고 행세한 사람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미륵의 진면목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다. 지금도 자신들의 교조가 미륵이라고 믿고 따르는 종교들이 판을 치고 있다. 불교와의 상관관계에서 본다면 무명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대승불교 차원에서 본다면 미륵부처님은 이미 세상의 이법을 통해 구현된 존재이며 삼세 속에 존재하면서도 삼세를 초월한 존재이다. 일체의 모든 존재와 중생 그리고 미륵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 여기에서는 한 개인의 특별한 인격체가 수기를 받고 세상에 출현한다는 일은 묵살된다.

대승불교에서 과거 일곱 분의 부처님과 스물다섯 분의 부처님은 과거의 부처님이 아니다. 미래부처님인 미륵부처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부처님을 시간 별로 나누고 개체로 보는 것은 무지이며 부처와 진리 그리고 세상과 중생을 차별되게 보는 것은 미혹이다.

초기불교의 수기는 수행의 결과에 의해 내려진다. 상상할 수 없는 세월동안 오로지 구도만을 위해 살았을 때에 내려진다.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 삶을 털끝만큼이라도 산다면 수기는 결코 받을 수 없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수기는 수행에 관계없이 모든 중생들에게 골고루 내려져 있다. 그 본성이 이미 부처이기 때문이다. 다만 중생들이 미혹해 진실을 보지 못할 뿐이다.

초기불교는 부정으로 출발하여 긍정으로 나아간다. 이에 반해 대승불교는 긍정으로부터 출발하여 긍정으로 나아간다. 어두운 현실을 떨치고 밝음으로 나아가려는 수기가 초기불교의 수기라면 현실 그대로가 밝음임을 깨닫는 수기가 대승불교의 수기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불교에서 수기는 그리 비중이 높지 않다. 그러나 수행의 목표를 설정하고 수행을 해 나가는데 있어 수기는 불자들에게 나름대로의 큰 의미가 있다. 간혹 불교계에서 마정수기 법회를 여는 모습을 보게 된다. 과연 수기의 진정한 알고 법회를 여는지는 미지수이다.

이제열 법림법회 법사  yoomalee@hanmail.net

[1261호 / 2014년 9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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