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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조계종 종정 서암 스님 사퇴

“조계종단 바른 궤도 진입토록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

▲ 서암 스님은 “오직 부처님 교법에 충실한 개혁만이 병들어가는 한국불교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을 수 있다”며 개혁세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은 개혁세력들이 ‘불신임’을 결의하는 이유가 됐다. 스님은 1994년 4월26일 스스로 종정직에서 물러났다.

원로스님들께 올립니다.
부덕한 사람을 종정으로 추대시켜 종단과 국민들께 큰 걱정을 끼쳐드려 무어라 사죄해야 할 길이 없습니다. 1600여년 유구한 불조(佛祖)의 유덕이 일시에 침몰되는 듯 실로 그 죄업이 막중함은 한출첨배(汗出添背)로소이다. 오늘 그 중죄를 절감하고 모든 소임을 원로대덕 앞에 정식으로 되돌려 드리오며 조용히 종단 밖으로 물러나 혈루(血淚)의 참회로 잔일(殘日)을 보내겠습니다. 본인에게는 하등 전달이 없이 타처에서 불신임 결의를 하셨는지는 풀리지 않는 의혹으로 남아 있습니다. 바라옵건데 원로대덕 스님께서는 현명하신 중지를 모아 앞으로 조계종단이 바른 궤도에 진입하도록 더욱 힘써 주시기를 대망(代望)하옵니다. 물러날 기회를 얻지 못하여 오늘까지 늦어졌아오며 오늘 비로소 처음 원로회의 석상에서 정히 퇴임인사를 올리나이다. (서암 스님이 1994년 4월26일 발표한 사퇴문 전문.)

1994년 4월26일 대각사서
거취 표명 원로회의 소집
원로들 고의불참으로 무산

마지막까지 종단안정 당부
불신임결의는 여전히 ‘의혹’
‘서암 개혁론’ 재평가돼야

1994년 4월26일 오전 조계종 종정 서암 스님은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종단의 혼란을 막고자 종정으로서 이미 세 차례나 교시를 내렸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우려했던 대로 폭력사태가 발생했고, 그로 인해 한국불교의 위상은 한 없이 추락했다. 오히려 스님은 초법적 승려대회를 금지했다는 이유로 개혁세력으로부터 불신임이라는 수모까지 당했다. 서암 스님은 더 이상 자신이 설 자리가 없음을 직감했다.

서암 스님은 회고록(‘그대 보지 못했는가’, 정토출판)에서 “나는 더 이상 종정 자리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종정이란 최고 어른의 자리는 어른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어른으로서의 일을 할 수 있을 때만 그 가치를 지닌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와 있었다”고 당시의 심경을 토로했다.

스님은 4월26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 대각사에서 원로회의를 소집했다. 종정으로서의 마지막 거취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미 개혁회의 측에 서 있었던 원로들은 이마저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조계종 원로회의록(1994년 4월18일)에 따르면 원로의원 석주 스님은 회의 말미에 “4월26일 대각사에서 원로회의를 연다는 전보가 왔는데 어떤 내용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원로의장 혜암 스님은 “원두 스님의 장난이니 참석할 필요가 없다”고 일언지하에 묵살했다.

결국 4월26일 원로회의는 정족수를 채우지 못했다. 회의가 열린 대각사에는 비룡 스님과 도천 스님만 참석했다. 서암 스님은 참담한 심정을 억누르고, 그래도 도반으로서 의리를 지켜준 두 원로 스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스님은 기자들과 만나 준비해 온 ‘원로 스님들에게 올립니다’라는 글을 읽어 내려갔다. 스님은 “1600여년 유구한 불조의 유덕이 일시에 침몰되는 듯 실로 그 죄업이 막중하다”며 “오늘 그 중죄를 절감하고 모든 소임을 원로대덕 앞에 정식으로 되돌려 드린다”고 공식 사퇴를 선언했다. “조용히 종단 밖으로 물러나 혈루의 참회로 여생을 보내겠다”는 뜻도 전했다.

그러나 스님은 “본인에게는 하등의 전달 없이 타처에서 불신임 결의를 하셨는지 풀리지 않는 의혹으로 남아 있다”며 “물러날 기회를 얻지 못해 오늘 비로소 처음 원로회의 석상에서 퇴임인사를 올린다”고 밝혔다. 자신의 사퇴가 승려대회와 원로회의의 ‘불신임 결의’에 따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했다. 4월15일 조계종 제10대 마지막 임시종회에서 “종정 스님이 어디에 숨었는지 만날 겨를이 없어 종단의 불을 끄기 위해 불가피하게 불신임을 했다”는 혜암 스님의 말을 반박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스님은 “원로대덕 스님께서는 현명하신 중지를 모아 앞으로 조계종단이 바른 궤도에 진입하도록 더욱 힘써 달라”고 당부했다. 짧은 사퇴의 변을 마무리 한 스님은 그 길로 대각사를 떠났다. 순탄치 않았던 4개월간의 짧은 종정직을 마치는 순간이었다.

서암 스님은 격동의 근현대불교사에서 출가수행자로서 사표가 됐던 인물이다. 1914년 경북 풍기에서 태어난 스님은 1928년 15세의 나이로 경북 예천 서악사에서 화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3년이라는 긴 행자생활 끝에 1932년 문경 김용사에서 낙순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35년 김용사에서 금오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스님은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고된 행자생활 속에서도 ‘초발심자경문’과 ‘치문경훈’ 등을 익혔고, 김용사 강원을 마친 뒤에는 독학으로 일본 유학의 길에 올랐다. 그러나 일본 유학은 순탄치 않았다. 변변한 후원자가 없었던 탓에 늘 학업과 힘든 노동을 병행해야 했다. 하루 한 끼는 고사하고 며칠씩 굶는 일이 다반사였다. ‘폐결핵’ 진단을 받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결국 학업의 꿈을 접고 귀국했다.

사형선고와 같았던 병명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구도의 열정을 꺾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만을 기다리며 사는 것은 헛되다. 이제부터 생사의 근본도리를 놓치지 않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김용사 선원에서 수선안거를 시작했다. 이후 계룡산 나한굴을 비롯해 정혜사, 상원사, 해인사, 망월사, 복천암, 대승사 묘적암 등 수행처에서 안거 정진했다. 특히 지리산 칠불암에서 금오 스님과 ‘공부하다 죽겠다’는 결사 서약을 맺고 생식으로 연명하며 장좌불와 용맹정진을 거듭했다.

치열한 구도행은 스님이 50대 후반의 나이에 봉암사 조실로 추대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스님은 이후 10여년 간 자신이 조실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대중과 함께 생활하며 봉암사 수좌들의 수행을 이끌었다. 낙후된 사찰을 새롭게 중창했고,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봉암사가 수행전문도량으로 거듭날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서암 스님은 1975년 조계종 제10대 총무원장에 취임했다. 당시 조계종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태고종과의 갈등은 어느 정도 해소됐지만 종권을 두고 종단 내부에서 끊임없는 갈등과 반목이 이어졌다. 종정 서옹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총무원장을 맡은 서암 스님은 우선 조계사를 수행도량으로 정비했다. 그 무렵 조계사는 종권다툼의 중심지로 재정과 신도관리가 엉망이었다. 스님은 아침마다 직접 마당을 쓸며 도량을 가꿔나갔다. 재정도 투명하게 관리했다. 신도가 늘고 재정이 건실해지자 조계사를 차지하려는 세력들이 점차 커져갔다. 조계사를 두고 권력다툼이 재연될 조짐이 보이자 스님은 그 길로 총무원장을 사직하고 봉암사로 돌아갔다. 총무원장에 취임한 지 불과 2달만이었다.

스님은 1991년 조계종 원로의장에 추대됐다. 총무원장에 취임할 때도 그랬듯 이 시기 종단은 혼란스러웠다. 성철 스님의 종정 연임을 두고 적지 않은 잡음이 일었다. 불국사 조실 월산 스님을 종정으로 추대하려는 측과 성철 스님을 다시 모셔야 한다는 측이 격렬히 대립했다. 그러나 서암 스님의 노력 끝에 성철 스님이 다시 종정에 선출되면서 종정추대 논란은 일단락됐다.

서암 스님은 종단개혁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스님은 1993년 11월30일  자신이 위원장으로 있었던 종단개혁위원회를 통해 ‘석존의 교법에 의한 종단재건’이라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개혁안은 기존 종단 틀 내에서 교육과 제도개혁을 통한 변화를 추구했다. 승가 갈마법을 시행하고 율장에 의해 종단이 운영되는 것을 기본토대로 삼았다. 교육과 재정, 의례, 포교, 총무원, 중앙종회, 원로회의 등에 대한 제도개선도 포함했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장기집권을 노리던 의현 총무원장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서암 스님은 1993년 12월24일 입적한 성철 스님의 뒤를 이어 제8대 종정에 추대됐다. 이 무렵 종단의 행정과 입법, 사법의 권한을 틀어쥐고 있던 의현 총무원장의 횡포는 나날이 커져 갔다. 권력 독점에 따른 부작용이 적지 않은 곳에서 나타났다. 의현 총무원장의 3선 연임과 맞물려 불거진 상무대 비리의혹은 종단 안팎에서 거센 저항을 몰고 왔다. 종단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서암 스님 역시 의현 총무원장의 3선 연임은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994년 3월23일 서암 스님은 원로들과 만나 “의현 총무원장의 3선 연임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중앙종회는 3월30일 의현 총무원장의 3선을 가결했다. 이 때 중앙종회가 서암 스님의 의견을 수용했다면 불교가 세간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던 사태도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를 중심으로 개혁세력이 결집되면서 의현 총무원장 퇴진 운동이 본격화 됐다. 범종추는 의현 총무원장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종권창출을 염두에 뒀다. 그러나 서암 스님은 여기에 동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님은 범종추가 추진한 승려대회를 교시를 통해 만류했다. 이 일로 개혁세력들로부터 불신임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지만 스님은 끝내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서암 스님은 회고록에서 “종정인 내가 개혁 그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세속의 역사에서 보았듯 수단과 방법이 나쁘면 아무리 숭고한 목적도 퇴색되고 왜곡되기 쉽다. 또 종교에 있어 폭력이란 종교 자체의 뿌리를 흔들고 스스로를 부정하는 결과에 이르게 한다. 이런 자기 부정의 길을 가도록 방관할 종정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교시 발표 이유를 밝혔다.

종정에서 물러난 스님은 봉암사 조실까지 사임하고 태백산 자락에 토굴을 지어 무위자적한 삶을 살았다. 그리곤 2003년 3월29일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90년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오직 부처님 교법에 충실한 개혁만이 병들어가는 한국불교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서암 스님의 개혁론과 행적은 20년이 지난 오늘날 반드시 재평가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262호 / 2014년 9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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