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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예경관(禮敬觀)

부처님 향한 단순 예경이 수행방편으로 승화

▲ 그림=김승연 화백

불교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부터 출발한 종교다. 불교의 뿌리인 부처님은 세상을 창조한 신도 아니고 생사여탈권을 가진 절대자도 아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런 부처님을 세상의 어떤 존재보다도 위대하고 완전하다고 생각한다. 부처님은 인간이지만 그 위치는 세상을 창조한 신들도 감히 넘볼 수 없는 더욱 높은 곳에 있다. 부처님은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東西南北)을 걸으며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외쳤다.

초기는 당시 예법에 따라 예경
대승은 완전한 조복 형식 취해

인간인 부처님에 대한 예법이
제법본성 향한 공경으로 진화

이때 동서남북의 어떤 신들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부처님은  성도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는 이제 신들과 인간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최상의 존재가 되었다고 밝혔다. 부처님 스스로 자신의 위대성을 확신하고 이를 세상에 공표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은 세상에 계실 때부터 육신이 소멸한 지금까지도 제자들과 중생들로부터 최상의 예우와 추앙을 받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을 추앙하고 예경하는 태도와 방식에 있어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에 큰 차이를 보인다. 초기불교의 경우 부처님을 10가지 정도로 표현한다. 여래십호(如來十號)라고 하는데 부처님을 여래(如來) 응공(應供) 정변지(正遍知) 세간해(世間解) 무상사(無上士) 조어장부(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 불세존(佛世尊)으로 부르고 공경한다. 경전에는 천계의 왕들도 수시로 나타나 부처님을 예경하고 법을 청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초기불교는 제자들과 신도들이 부처님을 예경하는 방식에 있어 매우 단순한 형식을 띈다. 제자들의 경우 부처님을 뵈면 우리가 행하는 것처럼 절을 하기보다는 오른쪽으로 세 번을 도는 방식으로 예를 표했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처님을 돌 때에 오른 쪽으로 도는 이유는 자신의 몸에 무기가 없음을 보여주는 당시의 예법에 따른 것이다. 당시 인도는 무기를 몸에 숨기거나 차고 다니는 풍습이 있었다. 보통 오른쪽 가슴이나 옆구리에 무기를 소지했기 때문에 상대로 하여금 무기가 없으니 안심하라는 의미에서 오른쪽 어깨를 보이고 오른편으로 돌게 되었다고 한다. 제자들은 이렇게 부처님을 세 번 돌고 난 후 공양을 올리거나 법을 청한다. 심지어 법을 파괴하려는 악마의 경우에도 가끔은 부처님께 이런 식의 예를 취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초기불교의 예경에 비해 대승불교의 예경은 형식면에서나 내용면에서 훨씬 적극적이다. 일단 대승불교의 예법은 부처님께 몸과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는 형식을 취한다. 합장의 경우 초기불교는 양손바닥을 합하는 견실합장(堅實合掌) 하나만이 있는 반면 대승불교는 견실합장 외에도 허실합장(虛實合掌) 금강합장(金剛合掌) 연화합장(蓮花合掌) 지권합장(智卷合掌)등 무려 열 두 종류의 합장이 있다. 예를 표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대승불교는 단순히 부처님을 중심으로 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절을 하거나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던지는 오체투지의 방법을 취한다.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라 백번, 천번을 넘어 예경하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계속한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예법의 차이 중에 두드러진 점은 대승불교는 예법을 진리를 깨닫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는데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것으로 수행을 삼았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신도들의 경우 불교를 믿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금생과 내생에 복을 얻기 위함이었다. 신도들은 복을 받으려는 행위로 부처님이나 제자들에게 공양과 보시를 올린다. 초기불교의 신도들의 경우 복이라는 것은 부처님께 맨몸으로 하는 예경을 통해 얻어진다기보다 공양과 보시를 통해 얻어진다고 믿었다. 이에 반해 대승불교는 공양과 보시를 포함한 모든 예경을 단순한 공경과 귀의의 표시로만 여기지 않고 진리로 향하는 수행으로 여겼다. 초기불교보다 훨씬 강도 높게 마음의 항복을 강조했던 대승불교는 예법을 중시여기고 끊임없이 부처님을 공경하며 전생의 업장을 참회하라고 가르친다.

예경은 곧 번뇌를 조복 받고 죄업을 소멸시키는 탁월한 방법 중에 하나였던 것이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의 첫 머리에 부처님을 예경하는 제불예경원(諸佛禮敬願)이 나온다. 이것을 보면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을 향한 예경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에 대한 지위가 훨씬 강조되고 표현하는 방식도 격상된다. 대승불교에서는 여래십호 외에 보왕(寶王) 덕왕(德王) 각황(覺皇) 천중천(天中天)으로 부르며 그 위대함과 거룩함 앞에서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는다.

자아(自我)가 실재한다는 착각에 가려 속박을 받는 중생들에게 맨 먼저 필요한 수행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버리는 일이다. 대승불교는 이를 예경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초기불교에서의 부처님은 어찌됐든 석가모니라는 한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은 현재 우리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분을 대신하는 귀의의 대상이 필요하다. 그 대상이 불상이다. 초기불교는 불상을 부처님 대신으로 여기고 예경한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부처님을 석가모니로만 여기지 않고 제법의 본성으로 여긴다.

일체의 만법 속에 깃들여진 본래의 성품을 부처로 삼고 끝내 석가모니 부처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대승불교는 제법의 본성을 부처로 보기 때문에 부처님을 향한 예경은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동안 한국불교의 신행흐름을 보면 과거에는 참회를 위해서나 공덕의 성취를 위해 부처님을 예경했다. 백팔배, 천배, 삼천배 수행 등이 그것이다. 불자들은 이를 통해 내면의 힘을 얻고 번뇌와 탐욕을 버리고자 했다. 하지만 남방불교 유입에 따른 불교의 변화는 예경의 방식과 목적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주된 수행으로 삼고 있는 남방불교의 흐름 속에서 대승불교의 예경법은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있다. 절하는 모습보다 좌선하는 모습이 훨씬 지혜롭고 수승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이제열 법림법회 법사  yoomalee@hanmail.net

[1263호 / 2014년 10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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