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인 이야기’

1990년대 중반, 회사 퇴근 후 한 번에 100권의 책을 등에 지고 계단을 오르내리던 때가 있었다. 도매서점에서 한 4년 ‘알바(?)’했으니 무수히 많은 책들이 필자 등에 업혔다. 어느 날, 화려한 듯 간결한 디자인의 책이 입고 됐다. 처음엔 50권, 며칠 뒤 200권이 들어오더니 어느 새 1000권, 2000권이 밀려왔다. ‘천년의 로마 역사에 대중을 초대한 수작’이라 평가 받았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의 이야기다.

‘로마인 이야기’ 열풍은 10년 넘게 지속됐다. 좀 비약해서, 지하철 승객 10명 중 한 명은 이 책을 보고 있었던 듯싶다. 어떤 학교는 아예 책을 대량으로 구입해 학생들에게 나눠 주었다. 모 기업은 사원들에게 이 책을 읽게 하고 독후감을 쓰게 했다는 기사도 떴다. 11권이 나올 때까지도 필자는 이 책을 읽지 않았다. 변명하자면 ‘너무 고생해서 꼴 보기도’ 싫었다. ‘도대체 무슨 책인데 이 난리냐’며 첫 페이지를 연 건 ‘당신은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한 지인과의 ‘술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6권 읽는 도중 집어 던졌다. 공존보다는 경쟁, 개인보다는 조직(국가)에 의미 부여하며 제국주의 정당성을전하고 있는 작가 의도가 자주 신경을 건드렸지만 ‘내기’ 때문에 밀고 갔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인내심이 폭발했다.

‘문명도가 높은 민족이라면, 로마인이 문명화라고 부르는 로마화의 이점을 이해할 수 있다. …로마의 패권 아래서 사는 각 민족에게는 각자 장기로 삼는 분야에서 활약할 기회와 무대가 주어졌다.’ 이 대목은 이렇게 들렸다. ‘문명도가 높은 지식인이라면, 일본인이 내선일체라고 부르는 일본화의 이점을 이해할 수 있다.’

결국 그 지인에게 술을 샀다. 그런데 그 지인은 ‘로마인 이야기’ 11권을 내밀며 접은 쪽 한 번 보란다. 지인은 아예 빨간 볼펜으로 ‘로마’를 ‘일본’으로 표기해 놓았다.

‘로마(일본)인은 처음부터 대제국을 만들 작정으로 정복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군사행동을 계속하다 보니 저절로 대제국이 형성된 것이다. 결코 농담이 아니다. 안보를 위한 속주화는 로마(일본)인에게는 친숙한 정책이었다. 트라야누스 황제(일본 천황)가 다키아(조선)를 속주화한 것이 가장 가까운 사례였다.’

그렇다. 작가는 태평양전쟁의 주범 일본의 범죄 행위를 로마인 이야기에 덮어 ‘미화’하고 싶었던 거다.
위안부 심층보도에 적극적이었던 일본 ‘아사히신문’이 얼마 전 태평양전쟁 당시 한반도에서 징용 노무자와 위안부를 ‘사냥’했다고 증언했던 고(故) 고요시다 세이지 관련 기사를 취소했다. 그 증언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자 아베 총리를 필두로 한 일본 보수파가 ‘이 때다’라는 듯 들고 일어나며 아사히신문사를 향해 보도 책임을 따져 묻기 시작했다. 이미 대학 강단에 선 전직기자까지 끌어내리고 있는 실정이니 쉽게 누그러질 것 같지 않다. 심각한 건 인터넷 상이지만 ‘살해 협박’까지 나돌고 있다는 점이다. 위안부 문제를 거론했던 아사히신문사 전·현직 기자들의 명단이 공공연히 인터넷 상에 올라와 있다. 

인기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고노(河野) 담화 작성에 관여한 정치인과 아사히신문 관계자를 국회 청문회장에 세우고 생중계 해야 한다’며 불난 집에 기름 붓고 있다. 위안부에 대해 ‘누가 명칭을 붙였는지 알 수 없으나 참 상냥한 이름을 붙였다’는 망언도 서슴지 않고 있는 시오노 나나미다. 서점가에 장식된 ‘로마인 이야기’를 보고 ‘일본인 이야기’라 읽는 사람이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불현듯 스쳐간다. ‘누가 이 책을 전국 열풍으로 몰아갔던 것일까?’ 수만 권의 ‘일본인 이야기’를 등에 지고 버텨야 했던 허리가 아프다. ‘일본인 이야기’ 보급에 일조했던 허리여서 더 아프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264호 / 2014년 10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