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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김득신, ‘포대흠신’

기자명 조정육

“안다 하여 거드름 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실천하라”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 바라밀과 다르지 않고, 바라밀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올바른 가르침이 곧 바라밀입니다.” 승만경

열반 이르기 위한 방편인
육바라밀 설하는 승만부인

포대화상은 보시행 통해
미륵보살 화신으로 추앙

믿음을 실천으로 옮기면
일심을 증득할 수 있어

▲ 김득신, ‘포대흠신’, 조선후기, 종이에 색, 27.2×22.8cm. 간송미술관.

선운사에 갔다. 선운사를 생각할 때마다 최영미의 시가 떠올랐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으로 시작된 ‘선운사에서’는 동백꽃이 피어야 선운사일 것 같은 착각마저 일으켰다. 오랫동안 선운사를 그리워하게 만든 시다. 지금은 가을이라서 동백꽃은 볼 수 없었다. 다만 잎사귀만 무성했다. 내년 봄에 와야겠다. 선운사를 잊지 못하게 한 글은 또 있다. 윤대녕의 ‘상춘곡’이다. 작가가 미당 서정주의 말을 빌려 책 속에 묘사한 만세루는 그야말로 환영 같았다. 미당은 아직 피지도 않은 동백을 보고 간다며 선운사에 왔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신기루 같은 말을 남겼다. 흐린 날 만세루에 가보면 공기가 무거워진 선운사 경내는 영산전 목조삼존불에서 퍼져 나온 향내로 그윽하다고. 내가 간 날은 하늘이 쨍그렁 소리가 날 정도로 맑았다. 공기가 무겁기는커녕 지나치게 가벼워 향내는 맡을 수 없었다. 꽃무릇도 다 지고 단풍은 기미도 느껴지지 않는 어정쩡한 시기에 왔다. 낭패다.

승만부인이 세운 수많은 서원은 하나의 큰 서원(一大願)에 포함되는데, 그것은 정법(正法)을 섭수(攝受)하는 일이라고 했다. 즉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인가. 승만부인이 부처님께 말했다.

“부처님,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 바라밀과 다르지 않고, 바라밀은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 바라밀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선남자 선여인이 보시를 통해 성숙시켜야 할 중생은 보시로서 성숙시키는데, 몸과 팔 다리를 잘라 보시하면서까지 저들의 뜻에 따라 보호하면서 성숙시킵니다. 그렇게 성숙한 중생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보시바라밀입니다.”

보시바라밀에서 시작된 승만부인의 설명은 지계바라밀, 인욕바라밀, 정진바라밀, 선정바라밀, 지혜바라밀로 계속된다. 바라밀(波羅蜜)은 산스크리트어로 바라밀다, 파라미다라고도 하는데 도피안(到彼岸)이라 번역한다. 모든 번뇌에 얽매인 고통의 세계인 생사고해를 건너서 이상경(理想境)인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하는 보살 수행의 총칭이다. 보살이 열반에 이르기 위해 실천해야 할 행동지침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육바라밀을 제시했는데 그것이 바로 승만부인이 말한 내용이다.

낮잠을 잔 것일까. 김득신(金得臣,1754~1822)이 그린 ‘포대흠신(布袋欠伸)’은 보는 순간 웃음이 절로 나온다. 나무에 기댄 스님이 입을 쩌억 벌려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편다. 몸이 찌뿌듯할 때 기지개를 켜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시원함을. 마치 죽어 있던 세포들이 일시에 살아난 듯한 상쾌함을 느낀다. 스님도 지금 세포가 살아나는 순간의 즐거움을 충분히 맛보고 있다. 그런 스님을 훔쳐보듯 소나무줄기가 허공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소나무는 사철 푸른 나무라서 계절은 가늠하기 힘들다. 배를 드러낸 채 맨발로 땅바닥에 앉아 있을 정도라면 그다지 추운 날씨는 아닐 것이다. 꼼꼼하게 그린 소나무에 비해 재빠른 필치로 단숨에 끝낸 듯한 인물표현법이 대조적이다. 화가의 능숙한 솜씨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김득신은 화원(畵員)을 지낸 화가로 김홍도의 뒤를 이어 인물과 풍속화에 능했다.

‘포대흠신(布袋欠伸)’의 흠(欠)은 하품하다는 뜻이고 신(伸)은 기지개를 펴다는 뜻이다. 그림에는 제목이 적혀있지 않는 것으로 봐서 후대에 붙인 듯하다. 그렇다면 앞의 ‘포대’는 왜 붙였을까. 포대는 포대화상(布袋和尙)이다. 포대화상은 후량(後粱)의 고승으로 정응대사(定應大師)를 지칭한다. 늘 작대기에 포대를 메고 다녀 포대화상이란 별명을 얻었다. 포대화상은 동냥한 음식과 물건을 포대 속에 가지고 다니면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대머리에 배불뚝이인 포대화상은 항상 호탕하게 웃는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그는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았다. 그림 속 스님이 포대화상이라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굳이 제목에 포대화상을 넣은 것은 이런 도상적인 특징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포대화상은 그림뿐만 아니라 조각으로도 많이 조성됐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절 입구에 모셔져 있는 경우가 많아 불교를 모르는 사람도 친숙한 화상이다.

환한 얼굴로 남에게 베푸는 행위는 종교와 상관없이 환영받는다. 육바라밀의 첫 번째가 보시바라밀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승만부인이 제시한 보시바라밀은 그 차원이 다르다. 단지 돈이나 물건을 주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팔 다리를 잘라 보시하는 차원까지 나아간다. 부처님이 배고픈 호랑이를 살리기 위해 절벽에서 몸을 던진 사신사호(捨身飼虎)의 본생담(本生譚)을 계승한 정신이다. 입으로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어려운 수행이다.

실천의 중요성은 단지 불교에만 국한된 가르침이 아니다. 유가(儒家)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이다. 어느 날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물었다. “군자(君子)가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말보다는 행동을 앞세워라. 그러면 사람들은 너를 따른다.” 공자의 말이 이어졌다. “군자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대하여 차별을 두지 않고, 소인은 차별을 두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대하지 않는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따라할 수 있지 않을까. 승만보살의 서원처럼 자신의 몸을 던져 보시하는 차원까지는 힘들더라도 공자의 가르침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 아니다. 사실은 이 정도도 무척 힘들다. ‘나’라는 ‘아상(我相)’이 떨어져나가지 않는 한 차별하는 마음없이 행동하기는 쉽지 않다. 포대화상은 포대자루에 담긴 물건을 필요한 사람에게 주었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주고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은 외면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떠한가. 싫은 사람은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대화를 하더라도 마치 빚 독촉을 하러간 빚쟁이 얼굴을 하고서 만난다. 그러니 아무리 비싼 화장품을 발라도 명품피부를 만들 수 없다. 눈빛을 고쳐주는 화장품은 없기 때문이다.

허름한 옷을 입어도 후광을 드리운 사람이 있다. 맨발로 걸어 다녀도 성스러운 사람이 있다. 내면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는 그 진리를 잊을 때가 많다. 대머리에 배불뚝이인 포대화상이 가는 곳마다 환영받는 이유는 환한 웃음 때문이다. 가진 것을 전부 나눠 준 보시바라밀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은 돈이 아니다. 잘 생긴 외모나 높은 관직이 아니다. 얼마나 학문(學問)이 깊은가 하는 것이다. 학문이 깊은 것은 글을 잘 쓰거나 해박한 지식을 갖춘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글을 잘 쓰는 것은 재주가 뛰어난 것이다. 해박한 지식도 마찬가지다.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단지 재주가 출중할 뿐이지 학문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글 쓰는 재주나 지식으로 학문을 얘기한다면 박사나 전문가들은 모두 성자(聖者)가 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어디 그런가. 박사 중에 못된 인간들이 더 많다. 전문가 중에 사기꾼이 더 많다. 박사와 전문가는 그 분야에 조금 더 재주가 많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학문이 깊다 할 수 있을까. 사람의 도리를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다. 책은 읽은 적은 없지만 사람이 지켜야 될 도리를 실천하며 바르게 살면 그 사람이 학문이 깊은 사람이다. 학교에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해 가방끈은 짧지만 볼 때마다 존경심이 우러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학문이 깊은 사람이다. 어른을 보면 공경할 줄 알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도와줄 줄 안다. 학문이 깊은 사람이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겸허히 묻고 배울 수 있는 사람. 역시 학문이 깊은 사람이다. 남이 보거나 말거나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 학문이 깊은 사람이다. 학문은 그저 책 속에 담겨 있는 죽은 지식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거기에 비추어 나의 부족한 점을 채우고 나 자신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조금 안다하여 거드름피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경전을 읽고 절을 하고 염불을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신해행증(信解行證)에서 첫 번째는 믿음이다. 그러나 믿음(信)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깊은 이해(解)와 실천(行)이 뒤따르지 않는 한 일심을 증득(證)할 수 없다. 실천은 얼마나 아름다운 바라밀인가.

선운사 경내를 둘러보고 만세루에 앉았다. 동백꽃도 꽃무릇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며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만세루는 문이 없다. 법회하는 날 사람이 많아 대웅보전에 들어갈 수 없을 때는 만세루에서 예불에 참여하도록 지은 건물이란다. 기둥도 서까래도 다듬지 않은 원목 그대로의 미를 느낄 수 있는 건물이다. 무료함을 달래려 두리번거리다 대웅보전을 바라보았다. 무심히 건물을 구경하는데 지팡이를 든 노스님이 눈에 들어왔다. 노스님 뒤로는 서너명의 여행객들이 뒤따랐다. 노스님은 다리가 불편한 듯 움직일 때마다 몸이 앞뒤로 출렁거렸다. 노쇠한 몸을 지팡이에 의지해 경내를 돌아다니면서 사찰을 안내하고 있었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주들을 데리고 산책하는 것 같았다.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럽고 진지해보이던지 갑자기 선운사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흐뭇한 마음으로 공양간으로 향하는데 또 다른 노스님 두 분이 걸어오셨다. 이곳저곳에 유독 노스님들이 많이 보였다. 알고 보니 선운사는 주지 법만 스님의 원력으로 승려노후수행마을을 만든 사찰이었다.

그동안 우리 불자들은 노스님들에게 얼마나 모질게 대했던가. 스님들이 조금만 몸이 아파도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수행자가 얼마나 수행을 안했으면 몸이 아플까. 노후에 오갈 데가 없는 스님을 향해서도 매몰차게 말했다. 오죽 변변찮으면 시봉하는 상좌 한 명 없을까. 그렇게 심판하듯 스님을 대하던 사람들의 마음은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누구 한 명 나서서 스님들의 노후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오죽하면 노년에 몸을 의탁할 데가 없어 토굴에서 쓸쓸히 생을 마치는 스님까지 있었을까. 그러니 선운사의 승려노후수행마을 조성은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서도 획기적인 일일 것이다.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주는 포대화상의 보시행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주지스님의 법문조차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법문할 때 웅얼거리듯 유창하지 못한 눌변조차도 하심을 위한 겸손으로 보였다. 선운사는 사계절이 아름다운 절이다. 그러나 풍경은 아름다운 사람 앞에서 빛을 잃는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사람은 더욱 아름답다. 나도 내 삶 속에서 육바라밀을 실천해야겠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66호 / 2014년 10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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