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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이재성 분단희생자추모사업회장

“나눌 수 있는 오늘이 있기에 언제나 행복합니다”

▲ 이재성 회장은 “부처님께서도 고해를 건너 피안에 이르기 위한 여섯 가지 실천덕목 가운데 첫 번째로 보시를 설하셨다”며 나눔의 공덕을 강조했다.

스물일곱 청년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고된 훈련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는 장병들의 무거운 발걸음엔 어머니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동생뻘 되는 젊은 청년들의 모습이 안쓰러워 마침 가지고 있던 절편 한 상자를 건넸다. 꼭 전해주고 싶었던 곳이 있어서 준비했건만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십수명의 장병들은 “고맙다”는 인사를 건내는가 싶더니 이내 허겁지겁 입으로 떡을 밀어 넣기 바빴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애처로워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1960년대 군부대 포교 발원해
장병들 먹일 공양은 손수 준비
팔순 바라보는 지금까지 지속
전쟁희생자 추모사업회 설립도

모두가 배고프고 힘겨웠던 1960년대, 가난한 나라살림에 군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처님께서 보시는 행복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는 원을 세웠다. ‘앞선 세대의 잘못으로 꽃 같은 나이에 부모형제를 떠나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어린 동생들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리라.’ 그리고 그 약속은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반세기 어머니의 손길로 장병들을 보듬어 온 이재성(79·혜광) 분단희생자추모사업회장이 바로 주인공이다.

 
그를 아는 도반과 불자들은 ‘참 눈물 많고 순진한 어른’이라고 말한다. 마음이 따뜻하고 순진하니 이견이 없다. 연꽃마을 이사장 각현 스님은 “부처님 전에 삼배를 올리고 기도하는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이 회장의 불심이 어떠한지 쉽게 알아차릴 것”이라고 말했다. 장병들을 위로하고 법당을 지어 보시하겠다는 부처님과의 약속을 곧이곧대로 성심껏 지켜왔으니 이만하면 일상이 수행자라 했다. 김효율 인천대 교수는 “보시가 생활인 원력보살로 항상 모든 이들의 행복과 복덕을 기도한다”고 했다. 장병들의 공양을 위해 수백인분의 카레와 짜장을 손수 준비하고 작은 선물이라도 쥐어주고 마음으로 품어 안는 모습을 보면 틀림없는 우리 어머니의 모습, 자비로운 관세음보살님의 모습이란다.

이 회장의 따뜻한 마음과 굳건한 신심은 어머니에게 물려받았다. 서울의 한 부유한 집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부모님 덕에 일찌감치 큰스님들을 친견하는 복덕을 누렸다. 어머니 손을 잡고 전국의 유명사찰과 기도도량을 순례했고 탄허, 청담 스님 무릎 위에 앉아 재롱을 떨던 그 때 그 모습은 엊그제 일처럼 여전히 생생하다. 스님들은 옛날이야기를 해주듯 부처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어린 그의 마음에 고스란히 담겨졌다.

“꼭 부처님 같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게 꿈이었어요. 부처님께서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었느니 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점심을 싸오지 못하는 친구들과 도시락을 나눴고, 연필이며 공책도 친구들과 함께 썼습니다. 심지어 뒤주를 뒤져 한웅큼 쌀을 퍼내 집 앞 담벼락 구멍에 넣어 놓곤 했습니다. 필요한 사람 누구나 가져갈 수 있도록 말이죠. 참 감사한 것은 그럼에도 부모님은 야단 한 번 치신 적이 없었어요. 제 심성에 넉넉히 나누고 포용하라는 가르침을 담아주신 듯합니다.”

꿈 많던 중학생 무렵,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와 상흔은 충격 그 자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총칼에 쓰러졌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본 몸과 마음에선 끝없이 눈물이 흘렀다. 의지해야만 했다. 어머님께서 그러하셨듯이 관세음보살님께 매달렸다. 그래야 살 것만 같았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빛이었다. ‘관세음보살님’을 입과 귀, 몸과 마음으로 염송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어머님께서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의 위신력이라면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모든 중생들이 함께 행복할 수 있다고 기도하신 그 마음, 그 믿음으로 염송하고 또 염송했다.

그는 작은 것이라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면 이웃과 나누었다. 신기하게도 그런 마음이 간절해지자 맑은 지하수가 샘솟듯이 무언가가 자꾸 생겼다. 자비의 샘물은 마르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어른 같은 청소년기를 보내고 대학을 졸업할 즈음, 부모님은 그에게 유학을 권했다. 미국유학 비자도 받았건만 떠날 수가 없었다. 배고픔에, 추위에 울부짖는 아이들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유학비용이면 참 많은 아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이번만큼은 부모님도 물러서지 않았다.

“무작정 집을 나와 홍천 수타사로 향했습니다. 그곳에 머물면서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했어요.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당당히 사회로 나가자, 더 이상 부모님의 도움이 아닌 스스로 돈을 벌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인연 있는 분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명동에 양장점을 열었습니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애지중지 키운 막내아들이 유학길마저 버리고 옷을 만들겠다 하니 부모님에게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남자가 여자 옷을 만든다는 것은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집안의 반대는 극심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굶기를 밥 먹듯 하면서도 독학으로 옷 만드는 일을 독하게 배웠다. 춥고 힘들고 배고픈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낙숫물에 바위가 뚫린다 하지 않았던가! 어는 순간 그의 양장점에는 고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입소문을 타더니 삽시간에 ‘일류 디자이너’라는 별칭이 붙었다. 양장 일을 시작한지 불과 3년여만의 일이다.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집을 나서면서 부처님과 약속한 서원은 늘 마음 한 켠에 생채기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자비여행을 시작했다. 옷을 팔아 번 돈으로 전국을 다니면서 배고픈 이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나눔의 손길을 내밀었다.

“군장병들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도 음식을 대접하러 가는 길에서 우연히 시작된 일입니다. 떡 한 상자를 게 눈 감추듯 해치우는데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청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어린 나이지 않습니까. 얼마나 배가 고프고 가족이 그립겠습니까? 집 떠나 고생하는 동생들에게 따뜻한 친형이 되어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 때부터 매주 일요일이면 떡이며 빵, 짜장, 카레 등 장병들이 좋아하는 먹을거리와 음료수를 싸들고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 군법당을 찾아다녔습니다.”

동생을 챙기는 형의 마음으로 시작된 자비행은 반세기 세월이 흐르면서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손주가 그리운 할아버지의 마음으로 변해갔다. 이 회장은 동생에게, 아들에게, 손주에게 먹일 음식이라며 지금도 직접 장을 보고 식재료를 다듬어 음식을 장만한다. 동생과 아들과 손주들의 숫자도 자꾸 늘어간다. 300명에서 500명으로, 설을 맞아서는 1000명으로 법당은 항상 만원버스다.

장병들 챙기러 자주 찾는 전방부대지만 남북을 갈라놓은 철조망 앞에만 서면 그는 가슴으로 눈물을 흘린다.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경험한 그로서는 끔찍했던 전쟁의 악몽을 잊을 수가 없다. 특히 참혹한 전쟁 과정에서 두려움과 고통 속에 숨져간 어린 영가들을 생각하면 한국전쟁의 복판에 있는 듯 온몸이 고통스럽다. 고통을 걷어내기 위해 그는 JSA(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영수사를 개원했다. 2012년 분단희생자추모사업회를 결성한 것도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씻어내고 싶어서였다.

“2004년인가요? 5년여의 노력 끝에 어렵게 JSA에 영수사를 건립했습니다. 젊은이들, 특히 불자 장병들에게 부처님은 부모와 가족을 대신할 귀의처이지요. JSA는 그 어느 지역보다 긴장도와 스트레스가 많은 곳으로, 법당은 장병들을 위해 꼭 필요한 힐링공간이었습니다. 더욱이 남북을 갈라놓은 철책은 전쟁의 한 중심지로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 속에 많은 이들이 죽어간 가슴 아픈 곳입니다. 불쌍하고 가여운 영가들이 부처님 말씀을 듣고 극락왕생을 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분단희생자추모사업회를 설립한 이유입니다.”

팔순을 앞둔 이 회장의 주말은 변함이 없다. 체력이 예전만 못해 전처럼 500명, 1000명을 위한 음식을 할 수는 없지만 100~200명 분량은 아직도 너끈하다. 그에게 마지막 바람이 있다면 임진강 건너 6개부대 장병들의 통합법회를 위해 법당을 마련하는 것이다. 비워있는 건물이 있어 10년째 호소하고 있지만 국방부는 요지부동이다. 반면 교회와 성당은 번듯하게 건물까지 갖추었다. 안타까운 현실에 또 눈물이 흐른다.

도반들은 우스갯소리로 그가 장병들에게 쏟아 부은 돈을 모았다면 벌써 재벌이 됐을 것이라 입을 모은다. 이 회장은 재벌보다 더 큰 부자라고 응수한다. 60만 장병이 모두 아들이고 부처님이라는 든든한 ‘빽’(배경)이 있으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 행복하고 그 행복을 나누는 삶, 그것이 그가 확신하는 부처님의 삶이다.

“작은 것이라도 나누면 나누는 만큼 행복해집니다. 나눔은 재물에만 해당하는 게 아닙니다. 무거운 짐을 함께 들어주는 것도 나눔이고, 아픈 마음을 토닥이는 것도 나눔입니다. 그러다 보면 건강하게 됩니다. 건강은 행복한 삶이 주는 보너스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생사의 고해를 건너 피안에 이르기 위한 여섯 가지 실천덕목 가운데 첫 번째로 보시를 설하셨습니다. 건강한 노년, 행복한 노년, 아름다운 노년을 바란다면 보시를 실천하세요.”

내 생애 가장 행복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가장 절정의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가장 소중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 지금 이곳이다. ‘벽암록’의 가르침이다. 이 회장은 눈물짓는 이 없이 모두가 크게 웃는 오늘을 발원한다. 오늘은 그에게 부처님의 날이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268호 / 2014년 11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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