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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금강산 화암사

기자명 김택근

적멸의 절대자유 품은 금강산 첫 봉우리 용화도량

▲ 화암사는 수바위를 배경으로 금강산 일만이천봉 첫 봉우리 신선봉 아래 자리 잡았다.

고성 화암사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첫 봉우리라는 신선봉 아래 있다. 한반도의 허리가 동강났기에 남쪽에서는 건봉사와 더불어 금강산에 속해있는 유이(唯二)한 사찰이다. 그러니까 북에서 살피면 금강산 최남단에 위치한 셈이다. 통일이 되었다면 나름 처음과 마지막이란 의미를 부여받아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진표율사가 화엄대교 강론하고
769년 화엄사 이름 붙여 창건
동쪽 발연사·서쪽 장안사 두어
금강산을 미륵부처 정토로 삼아

다섯 차례 화재로 큰 손실 입어
원위치서 남쪽으로 100m 이전
1912년에 화암사로 공식 개칭

15년째 사찰 지키는 웅산 스님
높이 14m 미륵부처님 모신 뒤
현대문명 적폐 씻는 도량 발원

화암사(주지 웅산 스님)를 찾아가는 길, 설악산 울산바위가 계속 따라왔다. 화암사가 가까워지자 절 앞에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있다. 바로 절의 상징이며 역사인 수바위다. 수바위는 벼이삭 수(穗)자를 쓴다. 그래서 쌀바위라고도 부른다. 벼 낟가리처럼 생겨서 그렇게 불렀다. 수바위는 화암사를 창건한 진표율사를 비롯하여 고승들이 정진했던 수도장이기도 했다. 울산바위는 ‘우는 산’이라는 뜻의 우리말을 한자화한 것이라니, 울산 바위 앞에 거대한 수바위는 배고픈 울산바위에게 쌀을 보시하는 듯했다.

▲ 화암사의 상징인 수바위는 계란모양 거대 암석에 왕관모양 바위가 놓여 있는 형상이다. 진표율사를 비롯해 고승들이 정진했던 수도장이기도 했다.

수바위에는 계란모양 거대한 암석에 왕관모양의 또 다른 바위가 놓여 있다. 그 위에 둘레가 5m쯤 되는 웅덩이가 있다. 이 웅덩이에는 물이 항상 고여 있어 가뭄이 들면 웅덩이 물을 떠서 주위에 뿌리고 기우제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면 하늘이 이 웅덩이를 채우려 비를 내린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바위 이름에 물 수(水)자를 써야한다는 사람도 있고, 바위의 생김이 범상치 않으니 빼어날 수(秀)자를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수(穗)바위, 쌀바위라 부르게 된 설화가 버젓이 전해 내려온다.

화암사는 산이 깊고 길이 험해서 무척 양식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마을로 내려가 탁발해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절집 식구들은 늘 배가 고팠다. 그러던 어느 날 정진하던 두 스님의 꿈에 똑같이 백발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수바위에 조그만 구멍이 하나 있으니 지팡이를 넣고 세 번 흔들면 끼니때마다 2인분의 쌀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 두 스님이 수바위로 올라가 구멍에 지팡이를 넣고 흔드니 딱 2인분의 쌀이 나왔다. 쌀바위는 그렇게 두 스님을 고승으로 키웠다.

그런 어느 날 객승이 찾아들었다. 객승은 바위 구멍에서 지팡이를 세 번 흔들어 2인분의 쌀이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세속의 어리석음을 버리지 못한 그는 불현듯 욕심이 생겨났다. 혼자 많이 먹고 싶었다. 300번을 흔들면 200인분의 쌀이 나올 것이라며 지팡이를 집어넣고 마구 휘저었다. 그러자 바위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 후 바위는 쌀을 토해내지 않았다. 이 설화에 기인하여 수바위 아래 절을 벼화, 바위암을 써서 화암(禾巖)사라 부르게 되었다.

화암사는 신라 혜공왕 5년(769년)에 진표율사가 창건했다. 처음 이름은 화엄사였다. 금강산 화엄사 사적기는 이렇게 전한다.

‘옛날 진표율사께서 창건하시어 화엄(華嚴)이라 편액하셨다. 화엄이라 한 것은 화엄대교를 강론하여 인천(人天)의 여체(餘滯)를 씻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액(題額)하셨으니 속세에서는 화암이라 칭하였다.…율사께서 화엄경으로 신도 100명을 교화하니 대낮에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 31명이요, 그 나머지 69명은 돈오무상(頓悟無上)을 얻었다. 그러므로 절 이름을 화엄사라 했다.’

진표율사는 금산사와 법주사를 창건하고 금강산에 들어 세 절을 세웠다. 동쪽에는 발연사, 서쪽에는 장안사, 남쪽에는 화암사를 두어 금강산을 미륵부처님의 정토로 삼았다.

사적기 등에 따르면 화암사는 다섯 차례나 화재로 큰 손실을 입었다. 불이 잦은 이유는 절 남쪽에 있는 수바위와 북쪽에 있는 코끼리모양의 바위가 서로 맥이 화해롭지 못하고 상충하여 그 화기가 절로 떨어졌기 때문이란다. 그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지금의 절은 창건당시 위치에서 남쪽으로 1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기는 1623년에 일어난 화재의 참상을 이렇게 전한다.

‘부처를 모신 감실과 승료가 거듭 화재를 입어 빈터만이 남으니, 구름은 향대를 시름겨워하고, 숲 아래 시냇물은 오열하였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중창하였음을 장하게 기록하고 있다.

‘아! 이 절이 여러 번 폐흥(廢興)함은 조화무수(造化無數)의 사연(使然)이 아님이 없으니, 어찌 그 사이에 인력(人力)을 용납하랴. 하늘이 길고 오래도록 이 산이 무너지지 않고, 전현(前賢)과 후철(後喆)이 서로 이어 의지하여 돌아가, 이 절의 쇠퇴와 성흥을 몇 번이나 보았는지 알지 못하니, 참으로 천지와 더불어 선후(先後)하여 시종이 없이 다하였구나.’

1863년(고종 원년)에 또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이전했는데 바로 지금의 화암사 자리이다. 그리고 1912년에 화암사로 공식 개칭했다.

▲ 주지 웅산 스님은 화암사에 치유 공간인 ‘산사의 숲’ 조성 발원을 세웠다.

화암사는 인근에 150만 평에 이르는 산야를 보유하고 있다. 화암사를 지켰던 스님들이 남긴 귀한 유산이다. 15년째 화암사를 지키고 있는 주지 웅산 스님은 이곳에 치유 공간인 ‘산사의 숲’을 조성하는 불사를 진행하고 있다. 불자는 물론이고 일반인들도 가족 단위로 산사의 숲에 들게 하여 현대문명의 적폐를 씻기고 싶다.

일주문 밖 야영장은 1991년 세계 청소년들이 모여 국적을 떠나 호연지기를 길렀던 세계잼버리대회수련장이다. 옛날에는 신라 화랑들의 마무리 훈련장이었고, 승병들의 연병장으로도 활용했던 곳이란다. 웅산 스님은 화암사를 둘러싼 곳곳이 역사의 현장이기에 이야기가 있는 순례코스를 개발하겠다고 한다. 앞으로는 사계절 순례단이 끊이지 않도록 하겠다는 원을 세웠다. 화암사를 찾는 사람에게 스님은 이렇게 이른다.

“참된 설법은 말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문자 이전에 있습니다. 침묵의 언어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도(道)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 화암사 산자락에 자리 잡은 미륵대불. 속초 시내와 동해안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이곳에서는 겨울 혹한에도 훈풍이, 한여름 폭염에도 청풍이 분다고 한다.

화암사는 또 미륵대불 석조전을 조성하고 있다. 이미 미륵대불 모시고 점안법회를 가진 바 있다. 미륵불의 크기는 높이가 14m에 이르고 뒤편에 1080불을 모셨다. 화암사 산자락에 조성된 석조전에 올라가 보니 속초 시내와 동해안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겨울 혹한에도 훈풍이, 한여름 폭염에도 이곳에는 청풍이 분다고 한다. 불사는 주지 웅산 스님의 꿈에서 비롯됐다. 꿈에 노승이 나타나 연화보좌를 펴고 좌선을 하다가 사라졌다. 기이하게 여겨 절 주변을 세밀하게 살폈다. 그리고 절에서 100m 정도 떨어진 뒷산에서 노승이 앉았던 주변풍경과 흡사한 자리를 찾아냈다. 그곳에서 앞을 보니 한마디로 일망무제(一望無際)였다. 들녘이 한없이 뻗어나가 동해에 이르렀다. 옆을 보니 험준한 멧부리들이 그 곳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스님은 미륵불을 모실 영지임을 깨닫고 불사를 발원했다. 영은암에 주석하고 있는 정휴 스님(화암사 회주)은 연기문에서 이렇게 찬했다.

‘하늘이 숨겨놓은 영지가 틀림없었다. 그래서 때로는 백운이 해를 붙들고 신령한 기운을 드러내었고, 때로는 보월이 운행을 멈추어 상서로움을 나타내 주었다.…용화도량을 이루려고 길을 내고 터를 닦자 미륵보살을 모실 연화보좌의 모습이 드러났고 사방을 둘러싼 산봉우리들이 이곳을 향해 묵례를 하듯 다가섰다.’

앞으로 미륵대불은 용화도량 화암사를 지키고, 성지순례를 오는 신도들의 발걸음을 머물게 할 것이다. 웅산 스님은 영험함은 결국 인간이 만드는 것이지 부처님이 그냥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즉 절집 식구들과 신도들의 간절한 기도가 쌓여야 미륵이 하생할 것이고 용화세계가 펼쳐질 것이라는 얘기다.

스님은 작금의 절집 풍토에 대해서도 한마디 얘기했다.

“지식은 널려있지만 지혜가 부족한 세상인데 절집도 그런 것 같아요. 지혜에 자비가 깃들지 않으면 삿된 지식에 불과 합니다. 법문이라는 것도 자신이 체득하지 못한 것을 남에게 전하면 안 됩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남이 어찌 알겠습니까. 또 아픈 사람에게 약방의 감초만 처방해서야 되겠습니까. 사람의 병을 봐서 처방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방편은 쓸지언정 기만은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스님은 종교인은 시대를 역류해야 한다고 했다. 시대의 흐름은 대개 탁한 것이니, ‘역류’란 그 탁함을 알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종교인은 죽은 고기마냥 떠내려가면 안 된다고 했다.

이제 곧 화암사는 온통 눈 속에 묻힐 것이다. 그러면 화암사의 주변은 가장 비범한 풍경을 드러낼 것이다. 높은 산과 깊은 골이 만들어내는 적멸의 절대자유, 그 속에 화암사가 깜박 거릴 것이다. 혹 허기지면 울산바위를 동무삼아 눈길을 걸어보기 바란다. 걷다보면 수바위가 넉넉하게 그대를 품을 것이다.

김택근 본지 고문 wtk222@hanmail.net

[1271호 / 2014년 11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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