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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원명유, ‘도원춘색’

기자명 조정육

“살아 숨 쉬고 있는 지금 여기가 무릉도원이라”

“일체 만상의 경계는 모두 자성이 아니니, 일체가 모두 자기 마음의 현량임을 스스로 깨달아 마음속으로 증득한다면 자기 마음의 현량 망상은 일체 일어나지 않는다.” 능가경

조선시대 작가 즐겨그린 주제
무릉에 있는 복숭아꽃밭 그림
시인 도연명 ‘도화원기’ 영향
행복한 세상 향한 마음 담겨

‘도원춘색’ 초가 두 채가 전부
무릉도원은 특별하단 관념 깨
지금 이대로의 ‘내’가 부처님

‘능가경’은 대단히 어렵고 난해하다. 대혜대사(大慧大師)가 석가모니부처님께 질문한 108가지의 내용에 대한 답을 적은 경전인데 상당한 인내심과 구도심을 가져야 공부할 수 있다. 수학공식을 외우듯 정리하며 공부해야 하는 경전이다. 공부하기가 힘든 만큼 공부를 끝냈을 때의 뿌듯함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크다.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더라도 거듭해서 읽으면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전구불이 켜지듯 깨닫게 되는 경전이다. 지난 회에는 대혜대사의 질문을 살펴보면서 무생법인을 얻는 기쁨에 비하면 세속적 신통은 딱지치기나 구슬치기에 불과하다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무생법인은 무엇인가?

무생법인(無生法忍)은 생멸(生滅)을 멀리 떠난 후 진여실상(眞如實相)의 이치다. 불생불멸하는 진여(眞如) 법성(法性)을 인지하고 거기에 안주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진여는 무엇인가. 제법의 본체다. 인식된 모든 현상의 근본이다. 왜 진여인가. 허환(虛幻)을 벗어나 진실하기 때문에 진(眞)이라 하고 항시 머물러 변하지 않고 바뀌지 않으므로 여(如)라 한다. 진여는 만법의 본체로 깨끗한 곳에 있든 더러운 곳에 있든 그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다이아몬드 속성이 흙속에 있든 돌 속에 있든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법성은 무엇인가. 있는 그대로의 본성이나 상태로 우주 만물의 본체다. 모든 현상이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자 변하지 않는 진리다. 법성은 진여실상이라고도 한다.

일체 중생들은 모두 진여실상에서 차이가 없다. 법계 자성과 법신 여래가 변해서 생겨나므로 본래부터 모두 여래의 신력(神力)속에 있다. 마치 바람이 불면 파도가 출렁거리지만 파도 자체는 바다와 한 몸이라는 사실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귀머거리나 소경, 벙어리나 절름발이라도 진여법성, 진여실상에서는 여래와 똑같다. 사기꾼이나 살인자라도 여래와 똑같은 진여법성을 가지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대각을 이루신 내용도 바로 그것이다.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감탄사였다. 불성은 곧 진여실상이다. 그런데 왜 중생은 부처가 아닌가. 심(心), 의(意), 식(識)의 습기가 오온(五蘊:색수상행식)을 형성해 중생으로 하여금 망상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중생이 겪게 되는 수많은 경계는 모두 자기 마음 안팎의 망상이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일체의 현식(現識) 작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연이 화합하여 만상을 형성하지만 시간과 공간이 쌓아 놓은 현상일 뿐이다.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다. 영원하지 않는 것을 영원하다고 믿는 것이 망상이다. 모든 사물의 과정에는 비록 생겨나고 존재하며 소멸하는 정황이 있으나 이들은 모두 현상의 작용일 뿐이다. 진여 자성의 근본에는 본래 생겨남이 없다. 그러므로 소멸이라 할 것도 없으니 일체가 모두 자기 마음이 드러난 것이다.

이와 같이 관찰해 증득할 수 있다면 자기 마음이 일으킨 의타기성(依他起性)과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의 분별심을 소멸시킬 수 있다. 즉 일체 중생이 윤회하는 중생계를 벗어나 생사와 열반이 평등해 서로 다르지 않은 경계에 도달할 수 있다. 의타기성은 무엇인가. 인연에 의해 생겨나는 모든 것이다. 우주 만유의 일체법은 인연에 의해 생겨나며 인연을 떠나서는 근본적으로 생겨남이 없다. 그것을 주재할 어떤 조물주의 존재도 없기 때문에 스스로 생겨나지 않는다. 일체법의 자성에는 본래 얻을 수 있는 본체의 모습이 없다. 그런데 안팎 경계의 연(緣)에 의해 상이 생겨나면 확실히 그것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 의타기성이다. 변계소집성은 무엇인가. 온갖 것을 두루 따져 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인연 따라 일어나는 의타기성과 변계소집성은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공(空)하다. 여래의 정각을 증득한 자는 이 속에서 세워진 법상을 모두 자기 마음이 집착하는 현상이라는 것을 안다. 명(名)이니 상(相)이니 분별(分別)이니 하는 망상이 의타기성과 변계소집성의 두 자성이 일으킨 작용이라는 것을 꿰뚫는다. 이런 진리를 자각해 얻게 되면 여여(如如)의 경계로 들어선다. 이것이 바로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원성실성은 영생불멸(永生不滅)하는 우주(宇宙)의 묘체(妙諦)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마음(心)이니 대상(物)이니 중생(衆生)이니 하는 삼자는 모두 유심의 현량(現量)이 일으킨 것이다. 현량은 사물을 지각하는 방법의 하나로 비판하고 분별함이 없이 바깥의 현상을 그대로 깨달아 아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무생법인을 증득할 수 있을까. 무시이래의 잘못과 허망한 습기에 훈습된 일체의 번뇌를 끊어버리면 된다. 삼계(三界)가 유심(唯心)이고 만법(萬法)이 유식(有識)이다. 만법은 마음으로부터 생긴다. 일체 유식이 모두 마음과 연관되어 있다. 일체 만상이 성공연기(性空緣起:사물은 그 본성이 공하며 인연화합에 의해 현실로 나타나 존재한다)임을 알면 무상(無相)의 경계에 들어설 수 있다. 우주의 일체제법의 자성은 모두 오직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으로 그 본성은 절로 유무를 떠난다. 이미 유무를 떠날 수 있다면 다시는 어떤 상에 집착하는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진여의 실상으로 무생법인의 증득이다.

조선시대 작가들이 가장 즐겨 그린 화제(畵題) 중 하나가 무릉도원(武陵桃源)이다. 무릉도원은 무릉에 있는 복숭아꽃밭이란 뜻이다. 다른 유명한 장소를 제치고 굳이 무릉이라는 장소가 선택된 것은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유명세 때문이다. 도연명은 중국 동진(東晉)때 시인으로 이름은 잠(潛), 자는 연명(淵明)이다. 그는 탁월한 두 개의 글을 써서 중국문학사에 이름을 올렸다. ‘귀거래사(歸去來辭)’와 ‘도화원기(桃花源記)’다. ‘귀거래사’는 그가 41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면서 쓴 변명이다. 그 변명이 얼마나 멋있고 과감해 보였던지 그의 글을 읽는 샐러리맨들마다 사표를 던지고 귀농해버리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반면 귀농을 꿈꾸면서도 직장을 떠나지 못한 남겨진 자들은 비애감에 젖었다. 뛰어난 문학작품이 주는 병폐다.

‘도화원기’는 비애에서 멈추지 않는다. 무릉에 사는 어부가 복숭아꽃이 떠내려오는 물길을 거슬러 가보니 무릉도원에 도달했다는 ‘도화원기’는 허다한 사람들을 환상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무릉도원은 단순히 복숭아꽃이 피어있는 장소가 아니다. 근심 걱정이 없고 행복과 즐거움만 있는 곳이다. 파라다이스 혹은 유토피아와 동의어고 극락, 천당과 유사한 단어다. 결코 현실에 실재하지는 않지만 있을 것 같은 장소. 그곳이 유토피아고 파라다이스다. 사람들은 삶 속에서 조금만 어려움에 부딪쳐도 무릉도원을 생각했다. 조금만 괴로움에 빠져도 무릉도원을 떠올렸고 조금만 재미가 없어도 무릉도원을 그리워했다. 무릉도원을 그린 수많은 그림이 무릉도원 신드롬을 반영한다. 안견(安堅, 조선 전기)을 비롯하여 이하곤(李夏坤, 1677~1724), 원명유(元命維, 1740~1774), 이광사(李匡師, 1705~1777), 김수철(金秀哲, 조선후기), 조석진(趙錫晉, 1853~1920), 안중식(安中植, 1861~1919), 변관식(卞寬植, 1899~1976) 등 작가들이 무릉도원을 그렸다. 조선초기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이다. 50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이 주제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작품 속에서 잊지 않고 소재로 취한 것은 어부, 배, 물, 복숭아꽃 그리고 도원에 사는 사람들이다.

▲ 사진설명 : 원명유, ‘도원춘색’, 비단에 색, 19.8×27.1cm, 간송미술관.

그런데 연농(硏農) 원명유가 그린 ‘도원춘색(桃園春色)’은 다르다. 물가에 초가집 두 채가 그려져 있을 뿐이다. 초가집은 위태롭게 솟아 오른 산을 등지고 서 있을 뿐 인기척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어부도 배도 도원에 사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곳이 무릉도원이란다. 정말 이곳이 무릉도원일까. 무릉도원은 특별한 곳이 아니다. 바로 지금 여기 이곳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다. 너무나 평범해서 무시하기 쉬운 곳이 무릉도원이다. 여기가 무릉도원이란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떠나봐야 안다. 원명유는 ‘도원춘색’ 화면 왼편에 ‘법왕숙명필의(法王叔明筆意:왕숙명이 그리던 뜻을 본받다)’라 적고 연농작(硏農作)이라 관서한 후 도장을 찍었다. 왕숙명은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의 한 사람인 왕몽(王蒙, 1308~1385)이다. 소털과 같은 구불거리는 선을 잇대어서 그린 우모준(牛毛?)으로 유명한 작가다. 산의 형태를 뭉게구름이 소용돌이치듯 그린 와운준(渦雲?)도 왕몽의 기법을 응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생법인을 증득하면 어떻게 될까. 거룩하고 찬란한 모습으로 바뀔까. 몸에서는 향내가 나고 얼굴은 아기처럼 부드러워지며 오장육부는 부품을 새로 갈아 끼운 듯 성능이 좋아질까. 그렇지 않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그대로다. 만약 눈에 보이는 어떤 경계를 기대하고 수행한다면 이것은 마구니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설령 그런 경계를 만나더라도 허공 속의 환화(幻化)로 무시해야 한다. 무생법인을 증득하기 이전에도 산은 산이었고 물은 물이었다. 무생법인을 증득한 후에도 여전히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다만 그 이전과 이후의 물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 바뀌었을 뿐이다. 꿈에서 깨어나 꿈 이야기를 하듯 알아차릴 뿐이다. 무릉도원에 살면서도 무릉도원인 줄 모르다가 비로소 알게 된 것과 같다. 알고 보니 무릉도원이었다. 무생법인을 증득하면 집을 떠나지 않고서도 집이 무릉도원이라는 것을 안다. 지금 이대로의 내가 진여불성을 지닌 부처라는 것을 안다.

1년 동안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재로 글을 쓰다 보니 계속 같은 얘기만 되풀이한 것 같다.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한 것 같은 느낌이다. 이것이 말의 한계, 언어와 문자의 한계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실한 경계는 언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 이것이 언어와 문자의 숙명이다. 표현할 수 없는데 표현해야 되는 모순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개인이 수행해서 증득하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많은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딸기의 맛을 전해줄 수 없다. 직접 먹어봐야 한다. 먹어보는 행위는 수행이다. 먹어보고 딸기 맛을 아는 것은 증득이다. 그러나 증득은 바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깨닫고도 수행이 필요한 이유다. 만약 자기 마음의 분별 망상을 깨끗이 없애고자 한다면 점차 닦아야 한다. 결코 하루아침에 갑자기 알 수는 없다. 무생법인의 증득도 그러하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72호 / 2014년 12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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