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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중심서 여자로 살아남기

기자명 옥복연

“기회에도 자격이 있는 거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이 빌딩 로비를 밟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했는 줄 알아?” 최근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드라마 ‘미생’에서 오과장이 계약직 사원 장그래에게, 정규직이 될 희망을 갖지 말라며 충고하는 말이다. 프로 바둑기사를 꿈꾸던 장그래가 생계 때문에 바둑을 포기하고, 회사에 들어와 겪는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시대에 고졸 검정고시출신 장그래는 그 능력을 인정받아도 결코 그 팀에서 ‘우리’가 될 수 없었다. 학벌이나 스펙이 자격미달이므로 팀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에 시청자들은 공감한다.

이 드라마에는 ‘우리’에 끼지 못하는 또 다른 신입사원 안영이가 있다. 성격 좋고, 능력 있고, 아버지의 빚까지 감당하는, 요새 보기 드문 젊은 여성이다. 수석으로 인턴으로 입사한 그녀는 외국어도 유창하고 일도 잘하는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 너무 출중해서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정규직 사원이 된 후 그녀가 보여준 업무 능력은 상사들도 감탄할 정도이니, 당연히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팀에서 구박덩어리가 된다. 왜 그럴까?

안영이의 상사들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상관인 마부장에게 ‘능력 있는 여자’는 곧 ‘버르장머리 없고 대가 센 여자’이고, “내가 회의실에서까지 분 냄새를 맡아야겠어?”라며 안영이에게 소리치는 전형적인 마초이다. 정과장은 상사에게 적당히 아부하고 부하직원도 잘 챙기는 눈치 백단이지만, 잘난 신입 안영이가 부담스럽다. 유대리는 소심하고 모질지도 못하면서 마초 상사들 속에서 어느새 마초 코스프레가 몸에 배어 안영이를 괴롭힌다. 하대리는 유능하고 매사가 확실한 성격이지만, 여성상사에 대한 나쁜 경험 이후 여성들은 같이 일할 수 없는 종족으로 치부하며 안영이를 재수 없다고 여긴다.

이처럼 안영이가 구박당하는 이유는 ‘여자’인 주제에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이런 현실에서 그녀의 생존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상사에게 부당함을 따지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억울함을 하소연하거나, 회사를 그만 두었을까? 그럴 수는 없다. 대출금도 갚아야 하고, 아버지 빚도 갚아야 하고, 생계도 해결해야 하고, 무엇보다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직장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무조건 복종하기’이다. 자신의 아이템을 상사에게 양보하고, 책상 닦고 복사하고 심지어는 담배심부름까지 한다. 힘들게 하루하루 견딘 덕분에 팀원들은 그녀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어간다. 이 드라마에서 안영이는 팀원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이건 드라마니까. 하지만 현실에서라면 안영이 같은 능력 있는 여성이 이렇게 버텨낼 수 있을까?

만약 안영이가 이처럼 찌질한 ‘잘난’ 남자들의 역차별을 딛고서 직장에서 살아남는다면, 20년 쯤 후에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 드라마에서 그녀의 미래를 짐작케 하는 두 명의 여성상사가 등장한다. 뛰어난 실력에 엄청난 카리스마로 사내 남자직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인 미혼의 재무부장, 그리고 능력 있는 워킹맘으로 남자 사원들이 선호하는 직장상사이자 여직원들의 성공적인 롤모델이지만 실제로는 딸의 양육 문제로 남편과 갈등을 겪으며 퇴직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선차장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안영이는 어떤 삶을 선택해야 행복할까?

직장 선배여성들은 그녀에게 진지하게 충고한다. 재무부장은 회계업무를 열심히 배워둘 것을 권하고, 선차장은 결혼하지 말라고 한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실력만이 여성이 직장에서 살아남는 길이며, 결혼과 육아는 직장생활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남성중심의 마초문화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육아를 여성이 책임져야 한다면, 이십 년 후 그녀는 선배여성들의 전철을 똑같이 밟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자로 살아남는다는 것이, 현재도 암울하지만 미래도 우울하다. 남성들이여, 딸들에게 희망을….

옥복연 byok2003@hanmail.net

[1274호 / 2014년 12월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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