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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행기(行機) 스님의 자비로움

기자명 성재헌

파계 제자도 할·방 대신 따뜻한 말로 지도

▲ 일러스트=이승윤
지혜가 없으면 자신을 구제할 수 없고, 자비가 없으면 타인을 구제할 수 없다. 지혜가 없는 자비는 애착의 다른 형태이고, 자비가 없는 지혜는 교만의 다른 형태일 뿐이다. 따라서 참다운 자비를 갖춰야 그를 지혜로운 자라 인정할 수 있고, 참다운 지혜를 갖춰야 그를 자비로운 자라 인정할 수 있다. 지혜와 자비, 만약 둘 가운데 어느 하나가 부족하다면 아직은 인천의 스승이라 칭하기에 모자란다 하겠다.

송나라 때 간당 행기(簡堂行機) 선사라는 분이 계셨다. 풍모와 재주가 빼어났던 그는 양씨(楊氏) 집안의 촉망받던 수재였다. 주변에서는 다들 그가 장차 높은 관직에 오르리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아내와 노비들을 버려두고 홀연히 집에서 사라졌다. 그 길로 출가한 스님은 생사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아 오랜 세월 산천을 떠돌았다. 그러다 만년에 천태산 호국사(護國寺)에서 차암 경원(此庵景元) 선사를 친견하고 남몰래 체득한 바가 있었다.

차암 선사는 제자의 공부가 성숙할 때임을 눈치 채고, 스님을 완산(莞山)의 자그마한 암자에 머물도록 명하였다. 솥단지 하나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살림에 시주라고는 쌀 한 되도 들어오지 않는 궁벽한 암자였다. 하지만 스님은 그런 처지를 불편해하지 않고, 자신의 신세를 탓하지도 않았다. 암자에 도착한 그날부터 몸소 괭이를 들고 화전을 일구었고, 명아주국과 기장밥으로 끼니를 이으면서도 밤낮으로 참구할 뿐이었다. 깊은 어둠 속에서 간간이 추위와 외로움이 사무칠 때면 자신이 지은 노래를 불렀다.

화로엔 불씨 없고
나그네 바랑 텅텅 비었는데
저무는 한 해에 버들개지처럼
흩날리는 눈발
누더기로 머리 덮으면
깡마른 몸 후끈해
여기가 적막산골인가,
도무지 모르겠네.

육신의 안락함과 세상의 부귀영달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변함없는 절개는 곧 사방에 소문이 났고, 세상에서는 그를 ‘기도인’이라 불렀다. 험난한 산길을 돌아 납자들이 찾아들었다. 그럴 때마다 행기 스님은 따뜻한 기장밥을 내놓으며 정중히 말하였다.

“선지식을 찾아오셨다면 잘못 오셨습니다. 저는 아직 안온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진솔한 고백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납자들은 좀처럼 떠나려 하질 않았다. 온화한 풍모와 소탈한 웃음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스님은 그런 납자들을 차마 내칠 수 없어 방을 같이 쓰면서 함께 일하고, 함께 참선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마당을 거닐다가 어떤 스님의 도끼질에 쓰러지는 나무를 보고 그간의 의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고뇌가 없는 땅에 몸소 두 발을 디딘 스님은 그날부터 대중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선지식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퍼져 더 많은 사람들이 완산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대중과 함께 공양을 하고, 화전을 가꾸고, 참선을 하고, 잠자리에 드는 스님의 삶은 변함이 없었다. 또한 사람이 많아지고 살림살이가 커져 이전에 없던 문제들이 불거졌지만 스님은 역정을 내거나 꾸짖기는커녕 눈살 한번 찌푸리는 일이 없었다.
한번은 한 젊은 스님이 법회 자리에서 대들듯이 물었다.

“청정한 성품이 뭡니까? 당장 눈앞에 내 놓아보십시오.”

“성미가 급하구나.”

“성품자리를 보아 단박에 부처가 되는 것이 달마의 종지라 했습니다. 매일 청소나 하고, 농사나 짓고, 나무토막처럼 웅크리고만 있으니, 언제 해탈하고 언제 부처가 되겠습니까.”

스님이 젊은 납자를 앞으로 불렀다.

“도를 배운다는 것은 나무를 심는 것과 비슷해. 작은 씨앗을 심어 정성스럽게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때를 기다려야지. 그렇게 세월이 지나 잎이 무성해져야 베어다 땔감으로 쓰고, 좀 더 자라면 서까래도 만들고, 더 자라면 기둥도 만들고, 더 오래 묵어야 대들보로 쓸 수 있지.”

행기 선사가 환하게 웃으며 젊은 스님의 손을 잡았다.

“자네는 어떤 부처가 되고 싶은가? 땔감 부처가 되고 싶은가, 서까래 부처가 되고 싶은가, 기둥이나 대들보 부처가 되고 싶은가?”

젊은 스님의 어깨를 다독이며 스님이 말씀하셨다.

“세상에 허튼 일이란 없어. 노력한 만큼 쓸모도 커지는 거야.”

언젠가 일로 아랫마을에 갔던 납자가 한밤중에 술에 취해 돌아온 일이 있었다. 다음날 아침, 대중공사가 벌어졌다. 그는 대중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다들 당장 보따리를 싸라며 목청에 날을 세웠다. 그러자 어간에 앉은 행기 선사가 손을 들어 대중을 제지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자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알고 있는가?” “네, 스님.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 됐네. 자네 자리로 돌아가게.”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허물을 방치하면 대중의 기강이 무너집니다.”

“호미로 막을 일을 왜 가래로 막으려 하십니까.”

스님이 다시 대중을 제지하였다.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허물없는 사람만 모였다면 수행할 필요도 없지. 수행자란 서로를 격려하면서 나날이 허물을 줄여가고 선근을 키워가는 사람들이야. 사람이라면 누군들 허물이 없겠는가. 중요한 것은 허물인 줄 알고 허물을 고친다는 점이야. 그렇게만 하다면 그가 곧 훌륭한 수행자 아니겠는가?”

봄 햇살처럼 따뜻한 가르침에 대중도 더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또 언젠가 관아에 일이 있어 하산하던 길이었다. 마을을 지나다가 사내의 한 맺힌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다. 선사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집으로 찾아갔다.

“울음이 서글프더군요. 무슨 연유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학질이 돌아 아내와 아들이 죽었습니다. 가난 탓에 약도 한 첩 써보지 못했는데, 이젠 시신을 거둘 관조차 없군요. 이게 다 못난 남편, 못난 아비를 만난 탓이지요.”

딱한 사정을 보다 못한 스님은 관아의 약속을 미루었다. 그리고 시장으로 가서 관을 빌려 장례를 치르도록 도와주었다.

이후 선사는 구강(九江)의 원통사(圓通寺), 천태산 경성암(景星巖), 은정사(隱靜寺) 등지에서 널리 교화를 펼쳤는데, 명리(名利)에 초연한 절개와 친소(親疎)를 가리지 않는 자비로움에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행기 선사께서 열반하시던 날엔 천한 심부름꾼들까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1274호 / 2014년 12월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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