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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영덕 운서산 장육사 [끝]

기자명 김택근

곱게 늙은 도량, 탐욕 벗고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라하네

▲ 홍련암 맞은 편에 올라서면 장육사 도량이 한 눈에 들어온다. 누가 보지 않아도 홀로 정갈하다는 부주지 선우 스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나옹선사가 창건한 운서산 장육사(주지 효상 스님)는 깊이 숨어 있었다. 영덕읍내를 빠져 나온 지 오래인데도 안내표지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창수면 신기 삼거리에 다다르자 나옹선사의 반송(盤松) 유적지가 나타났다. 선사는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 불미골(일명 佛岩골)에서 태어났다. 선사는 친구의 죽음을 보고 ‘죽음’에 대해 묻고 다녔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답을 얻지 못했고, 생각할수록 인생은 그저 무상할 뿐이었다. 마침내 선사는 스무 살 때 문경 사불산 대승사 묘적암으로 출가했다. 고향을 떠나면서 자신의 반송지팡이를 거꾸로 꽂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나옹선사가 고향에 세운 사찰
1355년 고려 공민왕 때 창건
임진왜란 폐찰 운명 넘기며
불자들 신심으로 명맥 이어

나옹선사 진영 도둑 맞는 등
살림집에 가까웠던 도량
효상 스님 부임한 뒤 일신

보물 건칠관음보살좌상과
나옹선사 정진했던 홍련암
대웅전 단청·벽화 인상적

“이 나무가 자라면 내가 살아있는 것이고, 죽으면 내가 죽은 줄 아시오.”

▲ 나옹선사 반송 유적지에는 선사가 꽂았다는 나무와 정자, 시비가 서있다.

그런데 신기하게 지팡이에 움이 돋아났고, 반송은 600년도 넘게 이곳을 지키다가 1965년경 고사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반송이 살아있을 때는 당제를 지내고, 죽어서도 고사목에 동제를 지냈다고 한다. 사람들은 다시 반송을 심고 정자도 짓고 시비도 세웠다. 시비에는 불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애송하는 나옹 스님의 시가 새겨져 있다.

靑山見我 無言以生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見我 無塵以生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解脫嗔怒 解脫貪慾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山如水 生涯以去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반송유적지 인근에 나옹선사의 출생설화가 깃들어있는 ‘까치소’가 있다. 이야기는 어디서 들은 듯하지만 흥미롭다. 영해부(寧海府)에 사는 한 여인이 금빛 새 한 마리가 날아들어 알 하나를 품에 떨어뜨리고 가는 꿈을 꿨다. 그런 다음 아이를 가졌다. 만삭이 되어 해산날이 다가왔는데 공교롭게도 관아에 끌려가게 되었다. 너무나 가난하여 세금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끌려가던 도중에 그만 냇가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럼에도 무도한 관원들은 아이는 버려두고 그 어미만을 끌고 갔다. 피범벅이 치마를 입은 여인이 끌려오자 부사가 연유를 물었다.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부사는 관원들을 크게 꾸짖고 미역과 쌀을 주며 여인을 돌려보냈다. 여인은 허겁지겁 아기가 버려진 냇가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수백 마리 까치가 아기를 덮어 보호하고 있었다. 그 아기가 바로 나옹선사이고, 여인은 선사의 어머니 정씨였다. 이후 사람들은 그곳을 까치소라고 불렀다.

설화 속의 선사는 고승으로 한국불교사에 우뚝서 있다. 선승 나옹은 1347년(고려 충목왕 4년) 원나라로 건너가 불법을 공부하고 돌아와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다. 인도불교를 한국불교에 접목시켰으며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를 경주의 황룡사 절터보다 더 큰 규모로 중창했다. 정치권의 미움을 사 회암사를 떠날 때는 이를 슬퍼한 대중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에 닿을 정도였다고 한다. 57세에 입적하니 친구인 목은 이색이 비문을 지었다. 부도와 비문은 회암사에 있다.

그 나옹선사가 고향에 세운 사찰이 바로 장육사이다. 반송유적지에서도 장육사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들길은 개울을 건너고 마을을 가르고 산 밑을 스쳤다. 겨울로 들어선 들녘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크고 작은 논들은 나름 크고 작은 잠자리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늘에선 비가, 눈이, 햇볕이, 달빛과 별빛이 그리고 침묵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면 들녘은 다시 생명을 품을 것이다.

20리도 넘게 이어진 들길이 홀연 끊기고 마침내 장육사가 나타났다. 깊은 산에 깊이 박혀있는 장육사. 일주문은 저 홀로 비켜 서 있고, 대신 아직도 감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감나무 두 그루가 겨울 초입의 절 입구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저 아랫마을에서 절 구경왔다가 주저앉은 듯 그 모습이 편하다. 그리고 감나무 키보다 더 높게 떠있는 전각들. 경내로 오르는 계단은 단정했고 빗질 자국이 선명한 경내는 정갈했다.

▲ 장육사 대웅전을 만나기 위해서는 운서산방 편액이 걸린 누각 홍원루를 고개 숙여 지나야 한다.

장육사는 1355년(고려 공민왕 4년) 나옹선사가 창건한 후 조선 세종 때 산불이 나서 전소됐다. 임진왜란 중에 폐찰의 운명을 맞았으나 다시 세워졌고, 신도들이 합심하여 1937년 중수했다고 한다.‘雲棲山房(운서산방)’이란 작은 편액이 걸려있는 누각(흥원루)을 고개 숙여 지나면 대웅전이 나타난다.

한눈에 곱게 늙었다는 느낌이 든다. 대웅전이 품고 있는 부처님을 비롯 그 속의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대웅전 자체가 문화재(경북 유형문화재 제138호)로 지정되었다. 그 안에 영산회상도(경북 유형문화재 제373호)와 지장보살도(경북 유형문화재 제374호) 등 귀한 탱화가 있고, 단청은 세월에 바랬으나 아직도 색상이나 무늬가 섬세하고 장엄하다.

▲ 천의를 길게 늘어뜨리고 당비파와 피리를 연주하는 비천상.

특히 주악비천상과 좌우 벽에 그려진 보살상벽화는 화려하면서도 묘사가 구체적이다. 주악비천상은 천의(天衣)를 길게 늘어뜨리고 당비파(唐琵琶)와 피리를 연주하는 모습이다. 어디선가 피리 소리 들려오면 벽을 박차고 날아오를 것만 같다.

▲ 장육사에는 보물 1점이 있다. 관음전에 모신 건칠관음보살 좌상이다.

장육사에는 보물이 한 점 있다. 바로 관음전에 모신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933호)이다. 높이 86센티미터의 건칠좌상은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칠이란 진흙으로 속을 만들어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진흙가루를 발라 묻힌 다음 속을 빼어버린 것이다. 한데 장육사 건칠좌상은 삼베 대신에 종이를 사용했으며, 머리의 보관은 별도로 만들어 올렸다. 조선시대 보살상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복장발원문을 보면 1395년(조선 태조 4년)에 영해부사와 주민들의 시주로 조성되었고, 1407년(태종 7년) 개금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깊이 숨어있던 장육사는 효상 스님이 주지로 부임해 오기 전까지는 사람들 관심 밖에서 쇠락해 가고 있었다. 고찰의 명성 또한 겨우 서책 속에서나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절이라기 보다는 대처승의 살림집에 가까운 곳이었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장육사 대웅전에 모셔놓은 나옹선사의 진영까지 누군가 훔쳐가 버렸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마을의 칠팔십대 어르신들은 “아이 하나 점지해 달라며 어머니께서 지성으로 기도를 올렸던 산신각 산신도 수십년전 사라졌다”며 혀를 찼다. 이런 일이 일어났음에도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렇게 잊혀진 절에 새로운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12년 전 쯤 효상 스님이 인연을 맺은 것이다. 오지 중의 오지에 있었지만 장육사는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될 절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사찰도 윤회의 회전문을 들락거리지만 그것이 결국 시절인연 아니겠는가. 효상 스님은 전통사찰의 사격을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장육사의 사실(史實)을 사실(事實)대로 알려서 설득시키고, 그런 후에는 매달렸다. 마침내 불사를 거듭하여 전통사찰로서의 사격을 회복했다. 그것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누추하지도 않고, 거대하지 않지만 결코 작지도 않음이었다. 또한 나옹선사의 치열한 구도여정을 복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부주지 선우 스님은 이렇게 의미를 부여했다.

“장육사는 누가 보지 않아도 스스로 정갈하며, 누구도 없지만 홀로 깨어 있으려 합니다.”

장육사에서 살려면 외로움을 아랫마을 정자나무에 걸어두고 올라와야 한단다. 해가 지면, 아니 해가 있어도 적막하다. 찾는 이 드물기에 공부하기 좋지만 또 흔들리기 쉬운 곳이기도 하다. 그런 장육사에서 밤을 맞았다. 깊은 밤, 요사채 문틈에 쌓인 달빛을 쓸고 경내로 나가 하늘을 바라봤다. 막 보름을 지난 달이 빛을 뿌리고 있었다. 별들이 바로 머리 위에 떠있었다.

‘그래, 우리에겐 별이 있었지. 눈물처럼 맑은 그리움도 있었어. 그런데 그것들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잃은 걸까, 잊은 걸까?’

▲ 나옹선사가 치열하게 정진했다고 전해지는 홍련암.

겨울바람은 거세고 매서웠지만 풍경소리는 문득 맑았다. 귀를 세우니 홍련암 쪽에서 대숲이 울었다. 홍련암은 나옹선사가 치열하게 정진했던 수행처라 전해지고 있다. 나옹선사는 깊은 밤 저 홍련암에서 어떻게 생각을 버렸을까. 선사의 ‘산거(山居)’란 연작 중에 이런 시가 있다.

“흰 구름 쌓인 곳에 세 칸짜리 집 있으니/ 앉아도 누워도 도를 닦으며 저절로 한가하네./ 계곡물은 차갑게 흘러 깨달음의 지혜를 얘기하고/ 맑은 바람 온화한 달빛은 온 몸을 차게 하네.”

▲ 700여년 전 나옹선사는 운서산 하늘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차실에서 올려다본 운서산 겨울 하늘은 더 없이 푸르렀다.

지금 막 홍련암에 들어서 이 시를 읊조린대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렇긴 해도 세속의 인연을 끊고 산 속에 들어 이름을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다시 요사채에 들어와 불을 껐다. 잠에 취해 있는데 갑자기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도량석이 장육사에 새벽을 불러왔다. 목탁소리가 요사채를 흔들었다. 곧장 속인의 가슴에 박혔다. 아마 운서산에 깃든 생명붙이들도 잠에서 깨어 귀를 열 것이다.

이튿날 막 해가 뜰 무렵 대웅전 뒤편 홍련암에 올랐다. 홍련암에는 지공, 무학 스님과 함께 나옹 스님을 모셔놓았다. 인도승려 지공은 나옹의 스승이고, 무학은 제자이다. 세 스님은 불교계 3대화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홍련암은 가장 기도가 잘되는, 장육사가 꿈꾸는 미래의 선방이다.

홍련암에서 앞산을 바라봤다. 구름이 산다는 뜻의 운서(雲捿)산이 어둠을 털어내고 있었다. 계곡이 꿈틀대고 있었다. 산속에서 ‘구름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선우 스님의 말이 그대로 감겨들었다. 햇살을 타고 번질 새로운 기운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다시 햇살이 번들거리는 들길로 내려왔다. 돌아오는 길에 문득 선객들이 들길을 걸어 장육사로 오르는 광경을 그려봤다.

김택근 본지 고문 wtk222@hanmail.net

[1274호 / 2014년 12월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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