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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무의자 혜심이 최우에게

“나 좋다는 이는 도적이요, 나 밉다는 이는 스승이로다”

무신정권 최고 권력자 최우
수선사 2세 혜심 깊이 존경

혜심, 상경 요청 거절하며
수선사 등에서 결사 이끌어

시비득실 떠날 것 신신당부
최우 초심 잃고 전횡 일삼아

“세상의 즐거움은 즐거움이 아니요, 사람의 목숨은 덧없는 것입니다. 들이쉬는 숨이 있더라도 내쉬는 숨은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것이) 항상 꿈과 허깨비와 허공의 꽃과 같은데 애써 그것을 붙잡으려 괴로워하는가. 얻고 잃음을 모두 놓아버려라’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아 그때그때 생각하고 깨달아, 번뇌, 망상, 집착을 없애면 그것은 더울 때 마시는 청량산(淸涼散)이 될 것입니다. 다음에 오는 편지로써 공(公)이 얼마나 마음을 쓰는지 확인할 것이니 부디 노력하십시오. 어떤 책에 이르기를 ‘나를 좋다 하는 이는 내 도적이요, 나를 밉다하는 이는 내 스승이다’라고 했습니다. 같은 수선사에 있는 사람의 정 때문에 주제넘게 말했습니다. 허물하지는 마십시오.”

조계산 수선사(修禪社) 혜심(慧諶, 1178~1234)은 영락없는 산승(山僧)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권력자를 가까이 해도 권력 자체를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비록 권력자가 교화의 대상이라도 권력까지 포함될 수는 없었다.

혜심은 최우(崔瑀, ?~1249)를 멀리 하지 않았지만 애써 가까이도 하지 않았다. 수선사 사주(社主)인 자신이 정치와 밀착되면 세속에서 벗어나 부지런히 선을 닦아 부처를 이루자는 정혜결사 취지가 퇴색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간혹 그는 세간사에 대한 관심이 과도하다 싶으면 삭발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좌우명(座右銘)’을 나직이 읊조렸다.

‘보살님이여, 보살님이여/ 항상 머리 만지는 것 깊은 까닭이 있네/ 머리를 만지며 깊이 생각하나니/ 출가한 본뜻으로 무슨 일 도모할까// 모양은 승려인데 마음이 속(俗)이라면/ 하늘과 땅에 부끄럽지 않으랴/ 거친 행과 허튼 소리를 그대로 옮긴다면/ 확탕(鑊湯)·노탄(爐炭)지옥을 어떻게 피하리오’

당시는 무인들의 세상이었다. 1170년, 정중부에 의해 시작된 무신정권은 왕실이나 문인귀족과 직결돼 있던 대찰 승려들에게 마른하늘의 날벼락과 같았다. 60년 최씨 정권의 기틀을 세운 최충헌(崔忠獻, 1149~1219)도 불교계에 적대적이었다. 거친데다가 지략까지 뛰어난 그는 반발하는 승려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고승들은 먼 땅으로 유배 보내고, 칼을 빼들고 달려드는 승려들은 참살로 응징했다.

최충헌이 자신에게 적대적인 화엄종이나 법상종 등 교종을 대신해 선종에 눈을 돌린 것도 정치적인 판단에서 비롯됐다. 선종의 고승 지겸(志謙, 1145~1229)을 발탁해 각종 선회(禪會)는 물론 모든 종파를 통솔할 수 있도록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 최충헌은 그의 집요한 노력으로 마지막 저항세력인 불교계까지 평정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부친 최충헌의 권력 승계를 꿈꾸던 최우도 일찌감치 선종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정치적인 이유가 컸지만 한 번의 깨달음으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의 종지도 마음에 들었다. 선에서는 숭고한 부처가 일순간에 똥막대기가 되거나 혹은 하찮은 똥막대기도 부처가 될 수 있었다. 출신성분이 미비한 권력자로서 갖게 되는 은근한 열등감을 선은 말끔히 씻어주었다. 최우는 틈틈이 선종 사찰들을 찾아다녔으며, 뛰어난 선승들을 만나 대화도 나눴다. 그 가운데 최우의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단연 수선사였다. 지눌(知訥, 1158~1210)이라는 탁월한 고승을 중심으로 오직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결사 수행자들의 도량이었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지속된 혜심과 최우의 인연도 수선사에서 시작됐다. 1207년, 조계산 수선사에 새로운 결사도량이 완성됐을 때였다. 고위 관리이자 문장가였던 최선(崔詵)이 ‘수선사중창기(修禪社重創記)’를 썼고, 그의 소개로 당시 붓글씨로 명성이 자자하던 최우가 왕희지체를 집자해 중창기를 완성했다. 그 무렵 최우는 혜심의 존재에 대해 처음 들었다. 혜심은 산문에 든지 오래지 않았지만 주머니 안 송곳처럼 도드라졌다. 그의 치열한 수행은 다른 구참 수행자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고, 그의 안목은 불교를 넘어 제자백가에 이르기까지 걸림이 없었다. 혜심이 시를 빼어나게 잘 쓴다는 점도 최우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 보물 제1043호로 지정된 순천 송광사 16조사 진영(眞影) 중 진각국사 혜심.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찬술한 ‘진각국사비명(眞覺國師碑銘)’에 따르면 혜심은 전라도 화순현의 최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식(寔)이었다. 향공진사(鄕貢進士)였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식은 어머니에게 출가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에게 학업을 계속 닦아 관직에 나갈 것을 당부했다. 하나뿐인 아들이 기울어져가는 집안을 일으켜 세웠으면 하는 게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효심이 깊은 식은 어머니 뜻대로 과거공부에 전념했고 24살 때 사마시에 합격했다. 그해 식은 태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태학은 유교의 최고교육기관으로 관료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가장 선망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전생부터 이어왔을 불연(佛緣)은 그가 관료의 길을 걷지 않도록 했다. 의지할 곳 없는 홀어머니가 돌연 깊은 병에 든 것이다. 식은 병환 소식을 듣고 곧바로 고향에 돌아왔다. 극진히 간호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다음 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식의 가슴 속에는 그를 괴롭히던 삶과 죽음의 문제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예 사라진 줄 알았던 출가의 열망도 서서히 커져갔다. 식은 어려서 자신이 지었던 ‘고분가(孤憤歌)’가 떠올랐다.

‘사람들이 이 천지 사이에 나면/ 백개 뼈마디와 아홉 구멍이 모두 같은데/ 가난하고 부하며 귀하거나 천하며/ 혹은 곱고 추한 것 그 까닭 무엇인가/… 위로는 저 하늘에 물어도 보고/ 밑으로는 땅에 대해 힐난했으나/ 하늘도 땅도 아무 말이 없구나/ 뉘와 함께 이 이치를 의논해 보랴/ 가슴속에 쌓인 이 외로운 울분/ 세월이 갈수록 골수를 녹이나니/ 길고 긴 이 밤은 언제 새려나/ 자주 서창(書窓)을 향해 울기를 마지않네’

식이 지눌을 만난 것은 그가 25살 때인 신종 5년(1202)이었다. 어머니 재(齋)를 지내기 위해 인근 수선사를 찾은 그는 지눌과 마주했다. 지눌은 철저히 은둔했지만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를 알았다. 진흙탕으로 전락한 불교계에서 연꽃처럼 청초한 수행자들의 결사모임을 이끄는 선승이었기 때문이다. 식은 지눌을 보며 고고한 학을 떠올렸다. 부드러운 미소 속에는 태산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기개도 엿보였다. 순간 식은 자신이 평생 가도 좋을 길이 여기에 있음을 확신했다. 49재가 끝나갈 무렵 식은 지눌에게 출가의 뜻을 밝혔다. 지눌도 선뜻 식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지눌은 그를 만나기 전날 밤 송나라 선사 설두중현(雪竇重顯, 980~1052)이 수선사로 찾아오는 꿈을 꿨다. 설두는 부모를 여의고 출가해 큰 깨달음을 이룬 뒤 뛰어난 통찰력과 촌철살인의 시어로 선의 대중화를 이끌었던 선승이었다. 지눌은 짧은 만남으로도 식이 큰 재목임을 곧 알아차렸다. 이 젊은이는 막 싹트기 시작한 간화선을 굳건히 뿌리내릴 해동의 설두라고 여겼다.

체발(剃髮)하고 먹물 옷을 입은 혜심은 전국을 두루 만행하며 무섭도록 정진했다. 그가 오산(蜈山)의 한 반석에 앉아 밤낮으로 선정을 익힐 때였다. 매일 오경(새벽 3~5시) 혜심이 큰 소리로 게송을 읊으면 그 소리가 10리까지 퍼졌다. 사람들은 그 게송소리에 하루가 시작됐음을 알았다. 지리산 금대암 너럭바위 위에서 수행할 때는 눈이 쌓여 이마를 덮고 오뚝이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겨울 고목과 같았다. 사람들은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의아해하며 몸을 흔들어볼 정도였다.

출가시기에 앞뒤가 있어도 깨달음에는 선후가 있을 수 없다. 혜심은 늦깎이 출가자였지만 누구보다 앞서갔다. 혜심은 스승 지눌로부터 3차에 걸쳐 인가를 받았다. 1205년 가을 억보산(億寶山)에서 지눌이 시자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게송을 지어 올렸다. 이에 지눌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쥔 부채를 건넸다. 두 번째는 함께 길을 가는 도중에 일어났다. 지눌이 길 옆에 떨어진 낡은 짚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짚신만 길에 떨어져 있으니 사람은 어디 있는가?” 혜심이 곧바로 답했다. “왜 그때에 보지 않았습니까?” 이에 지눌이 크게 기뻐했다고 전한다.

세 번째는 대중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뤄졌다. 지눌이 조주의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와 대혜종고의 ‘열 가지 병(病)’을 들어 대중에게 물었다.
“세 가지 병을 앓는 사람은 어떤 곳으로 숨을 쉬는가?”
모두 침묵하는 가운데 혜심이 홀로 창문을 한 번 탁 치니 지눌이 껄껄거리며 말했다.
“내가 그대를 제자로 얻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구나.”

1208년 지눌은 혜심에게 사주 자리를 물려주려 했다. 그러나 혜심은 완곡히 사양하고 지리산 깊은 골로 은둔했다. 혜심은 그곳에서 깨달음을 점검하고 정밀하게 다듬는 보임(保任)에 들어갔다. 혜심은 지눌의 말을 잊지 않았다.

“단단한 얼음이 곧 물인 줄 아는 것이 견성이요, 그 견성을 토대로 그 얼음을 녹이는 것이 보임이다. 그 같은 보임이 있어야 자유롭게 물을 식수로도 이용하고, 빨래도 하고, 논밭에 물을 댈 수도 있게 된다.”

▲ 혜심의 행적을 알 수 있는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 보물 제313호로 지정돼 있다.

2년 뒤 조계산의 성자 지눌이 적멸로 돌아갔을 때 혜심은 수선사 2세 사주를 맡았다. 그것은 스승의 뜻인 동시에 결사 대중들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깨달음이라는 일대사본분을 마친 혜심에게 일상의 현장을 떠난 선은 더 이상 선일 수 없었다. 그가 사주가 됐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를 보려는 이들의 발길이 수선사로 속속 이어졌다. 간혹 선이나 교학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들도 혜심을 보면 저절로 고개를 숙였고,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이었던 최우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는 혜심에 대해 알면 알수록 놀라웠다. 그는 무엇에도 걸림 없었으며, 그가 말하는 선의 세계에는 어떤 관념이나 분별도 붙을 수 없을 정도로 명료했다.

최우는 혜심에게 극진한 예를 갖추며, 혜심을 개경으로 불러들이려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혜심은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산중에서 선정을 닦는다는 정혜결사의 이념에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최우는 만종(萬宗)과 만전(萬全) 두 아들을 수선사로 보내 혜심의 제자가 되도록 했다. 혜심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었지만 내심 호시탐탐 권력을 탐내는 아들들을 멀리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이들은 최우가 기생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로 만전(최항)은 훗날 최우의 뒤를 이어 무신정권을 이끈 인물이다.

만종과 만전은 아버지의 명령에 남도까지 내려왔지만 애초 출가의 뜻이 없었다. 수선사의 맑은 기운도 아만과 탐욕에 물든 그들을 변화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그들은 얼마 뒤 ‘선사(禪師)’에 제수됐고 거처를 단속사와 쌍봉사로 각각 옮겨갔다. 그들 형제는 사찰에서 고리대금 등 사업으로 재산을 축적해 백성들의 원성을 크게 샀다.

최우는 차, 향, 약은 물론 법복도 항상 챙겨 보냈다. 심지어 선종의 최고 승계(僧階)인 대선사(大禪師)까지 수여했다. 승과를 거치지 않고 대선사에 임명된 것은 혜심이 처음으로 최우의 특별한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정작 혜심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1215년 지눌의 유고인 ‘원돈성불론’ 1권과 ‘간화결의론’ 1권을 간행할 때도 혜심은 발문에 ‘대선사’라는 승계를 빼고 그저 스스로 칭하던 ‘무의자(無衣子)’만을 기록했을 뿐이다.

최우는 그런 혜심을 더욱 공경했다. 그는 직접 참선수행을 했고, 의문이 들 때면 서신으로 물었다. 이 같은 혜심과의 관계는 최우가 최충헌의 권력을 계승한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만일 스님의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확탕·노탄지옥에 빠져 벗어날 기약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 때를 당해 다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헛된 욕심이 크게 줄었으니 뼈를 가루로 만들고 몸을 부수어도 그 은혜를 갚지 못할 것입니다.”

혜심은 최우의 편지가 미사여구에 그치지 않음을 잘 알았다. 그는 부친 최충헌과는 사뭇 달랐다. 선대에 강제로 빼앗은 땅을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새로운 문인들을 대폭 기용함으로써 인심도 크게 얻었다. 선종 사찰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면서 적대관계에 있던 화엄종과 법상종에 대해서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혜심은 최우가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싶었다. 혜심은 간화선이 그를 탐욕과 집착, 분별심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혜심은 답장에서 최우에게 세간과 출세간, 더러움과 깨끗함, 선과 악에 대해 취하고 버리거나 사랑하고 미워함이 없으면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이를 멀리하고, 싫은 소리를 자주 하는 이를 가까이 할 것도 당부했다. 혜심이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를 향해 ‘앞으로 얼마나 노력하는지 점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도 화두가 그를 구제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혜심은 평생 스승에 의해 싹튼 간화선이 정착될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무자(無字) 화두 공부법과 관련해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을 지어 병통과 치유법을 제시했다. 역대 조사들의 문답과 기연을 간화선 관점에서 핵심을 집어내 시적으로 풀어낸 해동 최고의 선서(禪書) ‘선문염송(禪門捻頌)’ 30권도 편찬했다.

혜심은 이전 선사들과 달리 비구니들에게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화두를 주고 꼼꼼히 지도하는 것은 물론 안거에도 참여케 하는 등 깨달음으로 적극 이끌었다.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뒷면[陰記]에 명시된 종민(宗敏), 청원(淸遠), 희원(希遠), 정심(正心)이 그들로 이전까지 누구의 비문에도 비구니가 언급된 적은 없었으며, 100년 뒤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에 이르기까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는 진정 시대의 편견에 물들지 않고 깨달음에도 평등했던 명안종사였다.

1233년 겨울, 깊은 병에 든 혜심은 다음해 봄 인근 월등사(月燈寺)로 거처를 옮겼다. 1234년 6월26일 혜심은 마곡(麻谷) 등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죽음으로써 보여줄 수 있는 최후의 상당법문이 펼쳐졌다. 혜심은 그들을 향해 손바닥을 폈다 쥐며 말했다.

“(손을) 모으면 한 덩이가 된다. 펴고 쥐기를 자유자재로 하고, 하나와 여럿이 걸림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손의 본분 얘기밖에 안 되는 것이니, 어떤 것이 참 본분의 얘기인가?”
잠시 후 혜심이 손으로 창을 한 번 내리친 뒤 껄껄 크게 웃었다.

혜심은 “이 늙은이가 오늘은 너무 바쁘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빙그레 웃으며 가부좌한 채 열반에 들었다. 세수 57세, 법랍 33세, 수많은 조사들의 선사상을 주체적으로 섭렵해 조사로서의 본분을 남김없이 펼쳐 보였던 산승의 마지막 진면목이었다.

혜심의 부재는 최우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혜심이 세상을 뜨기 오래 전부터 이미 최우는 권력과 시대에 매몰돼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최고 권력을 움켜쥐기 위한 음모와 암투가 끊이질 않았다. 최우는 자리보전을 위해 정적은 물론 애꿎은 숱한 사람들의 목숨까지 빼앗고는 했다. 그 업장은 곧 크고 작은 과보들로 이어졌고, 최우의 번민과 괴로움도 갈수록 커져갔다. 그의 초발심은 엷어져갔고, 세상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만고를 진리를 등지게 했다.

1231년 세계 최강의 제국으로 성장한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면서 시작된 길고 지리한 40년 전쟁도 최우를 막다른 길로 내몰았다. 1232년 몽골과의 전쟁을 결심한 최우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다. 그는 권력자로서, 무인의 후예로서 길을 고집했다. 백성의 생명보다 자신의 권력과 안위를 우선했다. 전쟁으로 수십만 백성들이 목숨을 잃고 부인사 초조대장경, 황룡사 구층목탑 등 문화재도 소실되고 말았다.

그는 선원사를 창건하고 팔만대장경을 조성했지만 사치와 전횡을 그치지는 않았다. 촌부나 아이들까지 칭송했다는 초기의 최우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장장 30년 동안 최고 권력 자리를 지켰던 최우는 고종 36년(1249)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마지막 순간 그는 혜심이 좌우명으로 삼으라고 했던 ‘(모든 것이) 항상 꿈과 허깨비와 허공의 꽃과 같은데 애써 그것을 붙잡으려 괴로워하는가. 얻고 잃음을 모두 놓아버려라’는 말을 아프게 떠올렸을 지 모를 일이다.

혜심이 최우에게 보낸 편지는 ‘진각국사어록(眞覺國師語錄)’에 수록돼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 ‘진각국사어록’(김달진 역주, 세계사), ‘진각국사어록 역해1’(김영욱, 가산불교문화연구원), ‘고려사’, ‘월남사지 진각국사비의 음기에 대한 일고찰’(민현구, 진단학보 36호), ‘진각혜심, 수선사, 최씨무인정권’(최병헌, 보조사상 7집), ‘진각국사 혜심의 수선사활동’(진성규, 중앙사론 5집), ‘교육의 관점에서 본 진각국사 혜심의 일생’(최은희, 동아시아불교문화 제17집), ‘고려 진각국사 혜심의 여성성불론’(김영미, 이화사학연구 30집), ‘최우의 사원정책과 수선사 혜심’(조은순, 경희대 석사학위논문)

[1274호 / 2014년 12월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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