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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윤두서, ‘노승도’ [끝]

기자명 조정육

“불퇴전의 굳은 신심으로 마침내는 열반에 이르리라”

“수행자들이여, 꾸준히 정진하면 장애가 생기지 않는다.”  불유교경

인간은 고통 겪는 운명이지만
부처님 법으로 벗어날 수 있어

배움 쉬워도 행은 어렵기 마련
간절한 마음·정성이 영험 원천
꾸준히 정진하면 장애는 없어

부처님은 왜 이 세상에 오셨을까.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해 오셨다. 일대사인연이 무엇인가. 중생을 제도(濟度)하기 위해 인연을 맺어 세상에 나타나서 교화하는 일이다. 어떤 것이 제도하는 것인가. 생사고락을 뛰어 넘게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삶은 참으로 가련하다.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온갖 고통을 겪어야 한다. 대표적인 고통만 추려도 여덟 가지(八苦)를 들 수 있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에 네 가지를 더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애별리고(愛別離庫),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원증회고(怨憎會苦), 구하지만 얻을 수 없는 구부득고(求不得苦),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오온이 왕성하여 청정한 자성을 가리는 오음치성고(五陰熾盛苦)등이다. 이 여덟 가지 고통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다.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그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이 가련하여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걸음걸음마다 설법하셨다.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들은 한 가지 모습이 아니다. 다양하다. 나이도 성별도 제각각이다. 부처님은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의 근기에 맞춰 설법을 하다 보니 수많은 법문을 하게 되었다. 불교 경전이 방대해진 이유다. 평생을 무명에 쌓인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살다 가신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용수(龍樹,150?~250?)보살의 저서로 알려진 ‘대지도론’에는 부처님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고 내용도 좋고 표현도 좋은 법을 보이며 완전하고 흠이 없고 청정한 행을 밝히는 분”

지난 1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분의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완전하고 흠이 없는 분의 청정한 가르침을 들으면서 때론 환희로웠고 때론 절망에 사로잡혔다.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佛性)이 내 안에 들어 있다는 생각에 환희로웠다. 그 진리를 알면서도 중생놀음을 벗어나지 못한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 절망했다. 1년 동안 맛 본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해봤자 숟가락으로 뜬 바닷물처럼 적은 양이다. 한 숟가락을 먹고 어찌 바닷물 전부를 얘기할 수 있으랴. 앞으로도 계속 공부해야 되는 이유다. 그동안 연재한 글을 읽으며 조금이라도 신심이 우러났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만큼 위대하기 때문이다. 의구심이 들면서 전혀 마음의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공부가 무르익지 못한 나의 허물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기는 어렵지 않다. 가르침대로 행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닫기는 어렵지 않다. 깨달은 후에도 수행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수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바로잡고 수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재를 계속한 이유는 여기가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멈춰버리면 공부도 멈춰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연재를 시작한 첫 번째 목적은 공부였다. 연재를 핑계 삼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고자 한 욕심이 가장 컸다. 불교 전공자가 아닌 만큼 행여 엉뚱한 소리나 하지 않을까 매번 노심초사했다. 여기가 끝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이번 생에 끝나지 않으면 다음 생에서도 계속할 공부인 만큼 이번 연재에서 저지른 오류는 두고두고 바로잡을 예정이다. 중요한 것은 계속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연재는 여기서 끝나지만 경전을 수지 독송하는 삶은 세세생생 계속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전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씀도 정진이었다. 지금 부족하더라도 정진 속에서 채워질 것이다.

‘불유교경’에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수행자들이여, 꾸준히 정진하면 장애가 생기지 않는다. 작은 물방울이 쉬지 않고 떨어져 큰 바위를 뚫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 정진하지 않으면 해탈할 수 없다. 열심히 수행하다가 게으르면, 마치 나무를 비벼 불을 내고자 할 때 나무가 뜨겁기 전에 그만 멈추는 것과 같다. 불을 얻고자 해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끊임없이 정진하는 일이 중요하다.”

▲ 윤두서, ‘노승도’, 종이에 먹, 57.5×37cm, 국립중앙박물관.

‘노승도(老僧圖)’는 윤두서(尹斗緖,1668~1715)의 대표작 중의 하나다. 먹물 옷을 입은 노스님이 나무지팡이를 들고 걸어간다. 스님 뒤에 대나무잎사귀와 풀이 보이지만 그림의 중심은 스님이다. 장삼자락과 나무지팡이는 굵고 거친 필치로 그렸다.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은 가늘고 섬세하게 그렸다. 염주를 낀 손도 마찬가지다. 옷과 인물 표현이 무척 대조적이다. 그 때문일까. 가사로 휘감은 노스님의 몸은 더욱 더 왜소해 보인다. 오직 수행을 위해 최소한의 공양을 하며 사는 삶이 연상되는 체구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자는 세속적인 즐거움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모습이다. 윤두서는 스님을 그릴 때 직접 보고 그렸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기보다는 사실성에 중점을 둔 작화태도다. 윤두서가 스님을 그린 작품으로는 ‘노승도’ 외에 두 점이 더 있다. 두 점 모두 지팡이를 든 스님이 소나무 등걸에 기대어 깊은 선정에 든 작품이다. 사실성이 돋보인 부채그림(扇面畵)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행자다. 꼭 먹물 옷을 입어야만 수행자가 아니다. 그림 속 스님처럼 걸림 없이 살수만 있다면 시장에 있으나 산 속에 있으나 우리 모두가 수행자다. 한 해 동안 부처님의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돌아보니 어느 구절도 버릴 것 하나 없이 귀하고 소중한 법문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법문은 그저 방편일 뿐이다. ‘금강경’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나의 설법을 뗏목으로 비유함과 같음을 알라고 하노니 법도 오히려 버려야 하거늘 어찌 하물며 법 아님이겠는가?”

부처님의 설법은 강을 건너는 뗏목과 같으니 피안에 도달했으면 배를 짊어지고 가지 말라는 뜻이다. 8만4000법문이 모두 성불을 위한 뗏목일 뿐이다. 비슷한 내용이 ‘원각경’에도 적혀 있다.

“경전의 가르침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나니, 만약 다시 달을 보고 나면 가리키는 손가락은 마침내 달이 아님을 분명히 안다.”

어떤 사람이 손으로 달을 가리키면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아야 한다. 만약 손가락을 보고 달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달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손가락도 잃어버리게 된다. 목표를 가리키는 손가락을 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능엄경’에서는 ‘본원으로 돌아가면 자성에는 둘이 없지만, 방편에는 많은 법문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뗏목에 의지하여 피안의 세계로 가야 한다. 피안에 도달하기까지 타고 가는 배는 모두 다 뗏목이다. 그 뗏목은 경전일 수도 있고 염불일 수도 있고 사경일 수도 있고 참선일 수도 있다. 당나라 때의 고승 규봉종밀(圭峰宗密,780~841)은 ‘선은 부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의 말씀’이라 했다.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쁘고 하는 차이가 없다. 모든 뗏목이 전부 훌륭한 방편이다. 자신의 형편에 맞는 뗏목을 타면 된다. 뗏목을 타고 시퍼런 강 한가운데까지 왔는데 다른 사람이 탄 뗏목이 더 멋있어 보여 뛰어내릴 필요는 없다. 다만 부지런히 노를 저어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불자라면 누구든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금과옥조로 삼아 부지런히 수행 정진해야 한다.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 이렇게 귀한 부처님 법을 만났으니 기회가 됐을 때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여러 경전을 두루 읽되 특히 자기 마음에 와 닿는 경전이 있으면 그 경전을 소의경전 삼아 철저하게 공부하면 된다. 경전은 우리의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자 법신이다. 어떤 경전이든 부처님의 진심 아닌 경전이 없다. 그러니 모든 경전이 영험하다. 모든 경전의 독송 가피가 불가사의하다.

그런데 우리 사정은 어떠한가. ‘금강경’을 독송하던 사람이 ‘능엄경’을 읽으면 돈이 많이 들어온다는 소리를 듣고 하루아침에 ‘능엄경’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렇게 가볍게 흔들려서 돈이 들어왔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금강경’을 독송한 사람은 초지일관 ‘금강경’을 독송해야 한다.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이 될 때까지 바위처럼 굳은 신심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 ‘능엄경’을 읽는 사람은 한결같이 ‘능엄경’을 붙들고 늘어져야 한다. ‘지장경’을 읽으면 돌아가신 영가의 앞길을 밝혀준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하루아침에 ‘지장경’으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평생 기대어 타고 갈 수 있는 경전을 전공필수로 정한 다음 다른 경전은 전공선택으로 공부하면 된다. 한 경전에 문리가 트이면 다른 모든 경전도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공부하는 방법 외에 성불의 지름길은 없다. 그 외에 다른 어떤 염불도 사경도 없다. 오직 간절한 마음으로 한 우물만 파는 뚝심만이 영험할 뿐이다. 간절한 마음과 정성, 그것만이 영험함의 원천이다.

왜 이렇게 수행해야 하는가.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고 불생불사에 도달하고 열반에 이르기 위함이다. 이런 경지에 도달하기가 어찌 간단하겠는가.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것은 항하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겁 동안 부지런히 애 쓴 덕분이다. 우리도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는 진리를 체득할 때까지 한강의 모래알 수만큼은 많은 세월동안 공부하고 수행해야 된다. 그리하여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도 일대사인연으로 이 세상에 와야 한다. 나 혼자 극락세계에 가서 행복하게 사는 것은 불보살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불보살이 있는 곳이 바로 극락이고 정토의 세계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신 것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라는 말은 옳지 않다. 부처님은 생사와 열반을 두 가지로 보는 견해를 제도하기 위해서 오셨다. 지금 이대로가 극락이고 열반이라는 것을 깨우쳐주기 위해 오셨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우리들의 영원한 모델이다.

마지막으로 1년 동안 함께 해 주신 독자님들께 나옹화상(懶翁和尙)의 발원문 첫 구절로 감사의 마음을 대신하겠다.

“원하옵건대 세세생생 나는 곳 어디에서나 언제든지 불법에서 퇴전치 아니하겠습니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75호 / 2014년 12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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