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달라이라마는 누구인가

  • 새해특집
  • 입력 2014.12.30 12:53
  • 수정 2014.12.30 12:55
  • 댓글 3

나라 잃은 분노 자비로 승화…따사로운 미소 사바를 물들이다

▲ 가연숙 제공

달라이라마는 나라 잃은 분노를 가없는 자비로 승화시킨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다. 조국 티베트를 떠나 인도 다람살라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지만 오히려 달라이라마로 인해 전 세계 사람들은 위안을 받고 있다. 극한의 슬픔과 절망적인 상황을 붓다의 가르침으로 이겨낸 달라이라마의 성스러운 삶은 풍요 속에서 타락해 가는 한국불교에게 내리는 죽비이자 축복이다. 법보신문은 올해 달라이라마 80세를 기념해 ‘한국불교 달라이라마에게 배우다’라는 주제로 특집을 마련했다. 달라이라마의 아름다운 삶, 세상에 전한 메시지, 달라이라마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사람들이 전하는 일화, 세상 사람들이 달라이라마를 추앙하는 이유 등을 빠짐없이 담았다. 달라이라마의 삶이 한국불교 미래를 향한 벼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티베트 작은 마을서 태어나
이웃 향한 자비 키우며 성장
달라이라마 환생자로 선정돼
1940년 라싸서 즉위식 거행

중국 인민해방군이 침공하고
티베트 민중 학살 자행하자
1959년 인도로 탈출 감행해
다람살라에 망명정부 구성

달라이라마의 미소는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누구를 만나든 스스로를 낮추고 인자한 얼굴로 맞는 그의 모습에서 ‘겔룩파 수장, 티베트불교 서열 1위’의 권위는 찾기 힘들다. 대신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됐다. 스스로를 ‘웃음전문가’라 부르는 달라이라마는 80세를 앞둔 고령에도 불구하고 법회와 강연, 해외순방 등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며 전 세계인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다.

하지만 티베트를 둘러싼 상황을 상기하면 달라이라마의 미소는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중국의 침공에 1959년 티베트를 떠나 인도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으며 자신을 따르는 민중들은 현재까지 모진 핍박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러한 시련에도 달라이라마는 분노가 아닌 “적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자비의 꽃을 피워냈다. 중국의 압력이 거세질수록 그가 강조하는 관용과 자비로운 미소가 더욱 빛나는 이유다.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후에는 전 세계인들을 이끄는 정신적 지도자가 된 달라이라마. 그가 만들어내고 있는 ‘자비의 신화’는 티베트의 작은 마을 탁체르에서 시작됐다.

그는 1935년 7월6일, 티베트 암도 지방의 수도인 실링 외곽에서 태어났다. 탁체르는 실링에서 노새를 타고 세 시간을 가야 하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는 여느 아이와는 달리 눈을 뜬 채 태어났고 하늘에는 무지개가 걸렸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려 하루 종일 누워있었던 아버지 역시 그가 세상의 빛을 보던 날, 몸이 완쾌된 것을 느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를 상서롭게 여긴 부모는 ‘소원을 이뤄주는 신’이라는 뜻을 지닌 ‘라모 톤둡’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이 아이가 자라면 출가시켜 스님이 되게 하자”고 말했다.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난 라모 톤둡은 이웃들의 고단한 삶을 목격하며 마음에 자비의 씨앗을 심었다. 그는 큰형인 툽텐 직메 노르부가 근처 대사원에 주석하던 라마의 환생자로 인정받으며 상대적으로 풍족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해마다 가뭄과 우박이 덮치는 등 농작물을 키우기 적합하지 않은 기후 탓에 농사를 망치기 일쑤였다. 달라이라마는 자서전에서 “탁체르 마을에서 보낸 시간들은 내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그들이 보다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노력하게 됐다. 만약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면 이들의 고통을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고 고백했다.

만으로 두 살이 채 되기도 전에 그는 “나는 티베트 중부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마차를 타고 떠나는 놀이를 했다. 당시 티베트 정부는 새로운 달라이라마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933년, 13대 달라이라마가 입적했는데 여러 가지 징후가 암도 지방을 지목하고 있었다. 13대 달라이라마의 시신이 갑자기 북동쪽으로 돌려져있는가 하면 섭정은 ‘아’와 ‘까’라는 글자가 성스러운 호수 위에서 반짝이는 꿈을 꾸기도 했다. 섭정은 ‘아’가 암도 지방을 뜻하며 ‘까’는 탁체르 마을 근방의 ‘꿈붐’ 사원이라고 여겼다.

새로운 달라이라마를 찾기 위한 사절단은 탁체르 마을에 당도해 라모 톤둡과 마주했다. 사절단의 대표는 라싸의 세라 사원 주지인 케상 린포체였다. 라모 톤둡은 하인으로 변장한 케상 린포체의 무릎에 뛰어들더니 대뜸 그가 가지고 있던 염주를 달라고 했다. 염주는 13대 달라이라마의 유품이었다. 그러면서 케상 린포체를 “세라 사원의 라마”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사절단 사람들의 이름도 모두 알아맞혔다. 이후 여러 차례의 시험을 모두 통과하자 티베트 정부는 라모 톤둡을 달라이라마의 환생자로 인정했으며 1939년 라싸로 불렀다. 1940년 2월22일 즉위식을 통해 라모 톤둡은 공식적으로 14대 달라이라마가 됐다. 그는 티베트 전통에 따라 ‘잠펠 나왕 롭상 예쉬 톈진 갸초’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깨어있는 지혜, 언어의 왕자, 완벽한 지성, 고양된 지혜, 배움을 지닌 분, 지혜의 바다’라는 의미이다. 티베트 사람들은 그를 ‘살아있는 부처’라는 의미로 ‘쿤둔’이라 불렀다.

달라이라마는 ‘겨울궁전’ 포탈라궁과 ‘여름궁전’ 노블링카를 오가며 티베트 최고의 엘리트교육을 받았다. 아비달마, 중관, 율장, 반야경, 인식론 등 불교교리를 비롯해 논리학, 예술·문화, 산스크리트어, 의학, 철학 등 광범위한 분야를 습득해나갔다. 스승들은 엄격한 방식으로 그를 교육했다. 체벌에 앞서 절을 하며 미리 사죄를 한 뒤 황금빛 채찍으로 때려 잘못을 바로잡았다.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1949~1951년 티베트에 머물며 달라이라마와 깊은 친분을 나눈 하인리히 하러는 “그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어떤 책이든 한 번만 봐도 다 외워버린다. 그가 본래 신성함을 갖추고 태어난 것은 아닌지 나 자신에게 묻게 된다”고 회고했다. 하인리히 하러는 세계역사, 지리, 천문학, 생물학 등을 가르치며 소년 달라이라마의 왕성한 호기심을 충족시켰다.

1950년 10월7일, 중국 인민해방군 4만 명이 티베트를 침공하자 소년 달라이라마는 냉엄한 현실과 직면하게 된다. 그때까지 티베트는 섭정이 통치하고 있었지만 급박한 정세변화에 대응하지 못해 지탄을 받았다. 티베트 사람들은 달라이라마가 권좌에 올라 직접 통치할 것을 요구했다. 18세가 되는 해부터 섭정 없이 통치하는 것이 티베트 전통이었지만 14대 달라이라마는 1950년 11월17일 권력을 상징하는 황금바퀴를 받고 정부 수반에 올랐다. 고작 15세의 나이였다. 그러나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1951년 5월23일 티베트 대표단은 달라이라마의 승낙도 없이 중국 측과 ‘티베트 평화 해방의 방법에 관한 협의’에 서명한다. ‘17조 협약’이라고 불리는 이 조약으로 티베트는 중국에 합병되고 만다.

1959년 3월, 티베트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중국은 무자비한 탄압에 나섰다. 달라이라마가 거처하고 있던 노블링카에 대포를 쐈고, 티베트인들은 달라이라마를 보호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총과 대포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인의 장벽을 형성했다. 수만 명이 학살됐으며 체포된 사람들은 즉결 처형됐다. 달라이라마는 자신이 떠나야 학살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다. 3월18일 밤 9시, 군복을 입고 병사로 위장한 채 소수 인원의 호위를 받으며 탈출을 시도했다. 2600km를 걸어 3월31일, 인도 다람살라에 도착했다. 중국은 “봉기를 일으킨 티베트 사람들이 달라이라마를 납치했다”고 보도했다. 티베트 지도층을 숙청했으며 라마들을 체포하고 사원은 파괴했다.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꾸린 달라이라마는 임시헌법을 제정하는 등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했다. 티베트 정부 압제에 민중들이 신음해왔다는 중국 측 주장에 대한 대답이었다. 이후 무장투쟁을 역설하는 일부 티베트인들에게 비폭력노선을 강조하며 평화의 길을 걸어왔다. 2008년 12월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의회에 초대된 달라이라마는 세 가지 서원을 말했다. 한 인간으로서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심성을 계발하고 싶다는 것이었고, 불교 승려로서는 여러 종교가 공존하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달라이라마로서의 서원은 티베트인들의 안녕이었다. 2011년 그는 정치적 실권을 롭상 상가이 총리에게 넘겨주고 정교분리를 단행했다. 최근에는 “달라이라마 환생 전통이 끝날 수 있다”는 뜻을 수차례 밝혔다. 환생제도가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중국 정부는 달라이라마가 티베트불교 2인자인 판첸라마의 환생으로 지정한 어린 소년을 납치한 뒤 감금했으며 공산당원인 티베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진 기알첸 노르부를 판첸라마로 내세웠다.

세속적인 권한을 내려놓고 종교적 상징으로 남은 달라이라마는 여전히 티베트 민중과 전 세계 사람들, 모든 생명을 위한 기도를 이어가고 있다. 1989년 12월10일 달라이라마는 노벨 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우리의 친구이건 우리를 핍박하는 이들이건, 지상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이해와 사랑의 정신을 널리 퍼뜨려 더 나은 세상을 일궈낼 수 있도록, 생명의 숨결이 있는 모든 중생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덜어줄 수 있도록 기도해나갈 것이다”고 말했다. 달라이라마는 오늘도 따사로운 미소를 지으며 세상 곳곳에 자비의 씨앗을 퍼뜨리고 있다.

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1276호 / 2015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