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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달라이라마 왜 방한해야 하나

기자명 정웅기
  • 새해특집
  • 입력 2014.12.30 14:33
  • 수정 2014.12.30 14:37
  • 댓글 1

탐욕과 증오 악순환 넘어 공존으로 향하는 대전환의 신호탄

▲ 정부의 비자발급 거부로 달라이라마의 한국방문이 무산되면서 달라이라마 방한추진위원회 관계자들은 2001년 7월 다람살라를 찾아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달라이라마는 방문객들을 기쁘게 맞이하며 오히려 위로를 해주었다. 사진 오른쪽이 정웅기 운영위원장.

2000년 봄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 두고 NGO일을 시작하자마자 맡게 된 일이 달라이라마 방한 추진이었다. 당시 서울대 불교학생회가 외교부에 초청 비자신청을 냈다 불허되자 10여개 불교단체 안에서 자연스럽게 회의가 열리고 연대기구가 구성되었는데, 정말이지 순전히 맡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첫 회의에서 내가 실무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달라이라마라는 분이 어떤 분인지 이름 외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2000년 초 방한추진위 결성
다람살라 찾아가 방한 요청
달라이라마도 흔쾌히 승낙
정부, 중국 눈치 보며 거부

달라이라마는 유쾌하면서도
깊은 지혜와 자비 갖춘 고승
성장주의·적대감 등 벗어나
자비와 생명의 길 여는 계기

일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불교계를 중심으로 한 100여개 단체가 달라이라마 방한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위원회에서는 그 해 11월 그 분을 한국에 초청하겠다고 공표하였다. 여름에는 초청장을 전달하기 위해 인도 다람살라를 방문하였다. 우리 측 방문단은 스님들 몇 분과 통역, 단체 활동가들 10여명이었고, 언론사 기자들 20여명 정도가 동행하였다. 선풍기도 달리지 않은 낡은 버스를 대절해 델리에서 다람살라까지 24시간이 넘게 달려 도착하던 새벽 풍경을 잊을 수 없다. 홀로 잠이 깬 내 눈에 다람살라 풍경이 조금씩 들어왔는데, 나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사람도 풍경도 너무 익숙했고, 저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슬픔이 끝없이 흘러나왔다.

처음 만난 달라이라마는 유쾌하고 활달하면서도 깊이를 측정하기 어려운 분이었다. 초청해주어 고맙다고 껄껄 웃으시더니 즉석에서 스케줄을 변경하여 초청에 응해주었다. 몇 년 치 스케줄이 다 잡혀 있는 분이고, 우리가 11월에 초청하겠다고 공표한 것이 큰 결례였음을 나중에 알았다. 대표단을 만난 후에는 기자들과 40여분의 인터뷰 시간을 주었는데, 역시 큰 울림을 주었던 모양이다. 낡고 좁은 버스에서 투덜대며, “달라이라마가 별것 있나”라고 비아냥대던 기자들 모두가 그 분을 뵙고 나서는 태도가 크게 달라졌다. 나중에 기사로 확인하면서 사람의 인품이 갖는 힘에 대해 확인할 수 있었다.

기자들의 태도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달라이라마를 뵙고 난 후 내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1994년 당시 불교에 대한 막연한 호감으로 일을 시작했던 나는 생활인으로 접한 불교계의 현실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어려웠던 시절 그 분을 만난 후 불교와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은 번쩍 뜨였다. 저렇게 따뜻하면서도 맑고 강렬한 기운을 가진 수행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나를 설레게 했고, 저런 분을 한국에 모시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너무도 기쁘고 좋았다.

다람살라를 다녀온 후 우리는 정부와 본격적인 만남을 가졌다. 정부는 11월 방한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이례적으로 외교부 차관이 직접 우리를 찾아 그 말을 전해주었다. 그는 지금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다. 동석했던 관료들은 적극적 검토는 사실상 약속으로 봐도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기대에 부풀었고, 티베트 망명정부 동아시아대표부 대사와 자주 만나 방한 스케줄과 준비사항을 점검하였다. 한참 준비 중이던 10월초 정부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중국과의 무역 협상 때문에 곤란하니 방한 스케줄을 내년으로 연기해 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이정빈 외교부 장관과 만난 우리는 대신 확답을 분명히 해주어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 장관은 확실히 방한비자를 발급하겠다고 말했다. 방한 스케줄은 정부 요청에 따라 그 뒤 두 차례 연기되었고, 2001년 4월로 확정되었다. 그때마다 달라이라마는 기존 일정을 취소하고, 우리 측이 요청한 일정을 비워주었다. 그 분은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대했다.

▲ 2001년 정부의 비자발급 거부에 항의하며 청사 앞에서 굴욕외교 참회 108배를 올리는 정웅기 운영위원장.

우리는 이 때 정부의 적극적인 허용 방침이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과 관련이 있음을 알았다. 노벨평화상 후보자가 대통령인 나라에서 같은 노벨평화상 수상자의 비자발급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수상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작 노벨평화상 수상이 확정된 후 정부의 태도는 바뀌었고, 2001년 3월에는 방한 불허 방침을 우리에게 공식 통보했다.

나는 허탈했고 슬펐다. 말없이 우리를 돕던 달라이라마 동북아 대표부의 자툴 린포체 대사가 오히려 우리를 위로했다. 그는 정부의 잦은 태도변화를 보며 이미 눈치를 챘었노라고 했다. 냉혹한 국제관계의 질서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10여 개월의 달라이라마 방한 노력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우리는 2001년 7월 세 차례나 스케줄을 조정하여 응해준 그 분에게 저간의 상황을 알려드리고, 사과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다시 다람살라를 찾았다. 무슨 사과방문이냐며 껄껄껄 웃으며, 그 분은 그런 우리를 오히려 위로해주었다. 우리는 국빈급 환대를 받으며 다람살라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 때 티베트와 티베트불교의 모습이 온전히 내 가슴에 들어왔다.

노무현 정부 말에 한 차례 법정 스님, 김용옥 교수, 송기인 신부 등 각계 인사들과 함께 초청의사를 외교부에 전달한 바 있지만 “지금은 외교적으로 적절한 시기가 아니다”는 정부의 대답은 같았다. 한 때 불교계 일각에서는 비자가 필요 없는 제주로라도 초청하려고 정부와 접촉한 적이 있지만, 그마저도 정부는 불허했다. 달라이라마 방한운동을 하면서 나는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차지하는 낮은 지위를 볼 수 있었고, 그토록 낮은 지위는 남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비굴함이 자초한 것임을 볼 수 있었다.

2000년 처음 달라이라마 방한을 추진하던 때 한국사회는 IMF체제의 극복이 국가적 과제였다. 정부는 당시 대기업의 핸드폰 수출협상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비자발급을 거절했는데, 대기업을 더 성장시키면, 모두에게 과실이 돌아가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거짓된 신화는 지난 10년새 더 심각해졌다. 어떤 교수는 국민소득 10만불이 되면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참 뻔뻔하다. 1만불이면, 2만불이면 행복해질 것이라더니 이제 10만불이라니. 이 정도면 우리 세대와 내 자식세대까지는 10만불이 될 때까지 찍소리 말고 죽은 듯이 일만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행복이 물질로, 돈으로 얻어지지 않다는 것은 우리보다 앞서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에서 입증되었다. 행복은 오히려 물질에 집착하지 않으며 마음을 돌보고, 타인과 나누는 삶에 있다는 것을 가난하면서도 행복한 나라들이 보여주었다. 이렇게 인류가 행복에 대한 마음을 달리 먹기 시작한 데 달라이라마는 깊은 영감과 영향을 주었다. 그는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촘촘하고 깊이 연결되어 있고, 행복은 마음을 돌보는 지혜와 모든 생명을 향한 보리심에서 나온다는 보배로운 가르침으로 인류의 활로를 열어왔다. 한국이야말로 이러한 가르침이 누구보다 절실한 사회다. 이제 ‘경제성장이 곧 행복’이라는 20세기의 낡은 신념을 버리고, 함께 행복의 진정한 가치를 가꾸어야 한다. 달라이라마가 방한이 이러한 대전환의 신호탄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올해 정전 61주년을 맞았지만 남북한은 여전히 휴전상태다. 북한은 피폐해진 인민의 생활을 장기간 방치한 채 체제유지에 급급하고, 압도적 국력을 가진 남한에서는 북을 혐오하는 적대주의가 정권유지를 위해 심각히 조장되고 있다. 게다가 중국의 팽창과 일본의 군국주의화, 미국의 패권전략까지 오늘날 한반도에 드리워진 그늘은 더 짙어만 간다. 이제는 다른 길이 모색되어야 한다. 남북이 공존, 평화, 통일로 가는 질적인 변화는 남북이 함께 더불어 살 민족공동체라는 인식의 대전환에서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120만명의 티베트인을 학살한 채 조국을 강점하고 있는 중국을 적이 아니라 동반자로 여기면서 티베트 독립을 평화의 관점에서 이끌어 온 달라이라마를 만나고 싶다. 인류 진보의 길을 위해 함께 머리를 맞댈 자유가 있다. 이것이 달라이라마가 한국에 와야 하는 두 번째 이유다.

지난해 교황의 방문은 한국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약자를 섬기며 정의를 실천하는 그에게서 우리는 종교 본연의 빛나는 정신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정의’만으로는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약자를 위한 정의와 더불어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으로서의 평화, 즉 정의와 평화, 정의와 화쟁, 진실과 화해가 함께 행해져야 한다. 그래야 정의가 미움으로, 다툼으로 빠지지 않게 된다. 이 영원한 인류사의 숙제가 가장 필요한 곳이 지금 우리사회다. 한국사회는 진영으로 편갈리어 남의 편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대립의 악순환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쌍용차 판결,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은 편가름을 막아야 할 최후의 보루인 사법기관마저 여기서 자유롭지 않은 현실을 보여준다. 앞으로 대립은 더 극심해질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이 오랜 숙제를 풀어낼 실마리를 찾아내야 한다. 달라이라마가 한국에 오신다면 그 아름다운 길이 열리리라 확신한다.

1950년 중국 인민군이 티베트로 진격을 시작하자 티베트인들은 유엔과 국제사회에 간절히 도움을 호소했다. 그러나 한반도를 전략적으로 중시 여겼던 국제사회는 히말라야 산골짜기 나라 티베트를 돕는 대신 한반도 전쟁에 집중했다. 티베트는 포기되었고, 중국은 별 저항 없이 서서히 티베트를 점령했다. 아마 한국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오늘 티베트는 전혀 다른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티베트를 생각하면 늘 빚진 마음이다. 혈연적 관계도 깊고, 오랜 불교전통, 중국과의 관계, 그리고 현대사의 아픔까지 공유하는 것이 너무 많은 두 나라. 세계유일의 식민지 티베트와 세계유일의 분단국 남북한. 그 분이 한국에 오심으로서 지구촌의 불행을 상징하는 두 나라에서 인류의 미래를 밝힐 새로운 서광이 시작되길 간절히 바란다.

정웅기 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 운영위원장

[1276호 / 2015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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