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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놓지 않는 한 세상에서의 삶은 고행 아닌 수행

  • 새해특집
  • 입력 2014.12.30 17:25
  • 수정 2014.12.30 17:34
  • 댓글 0

기도로 암 투병 이겨 낸 김태영 시인

 

▲ 죽음의 문턱에서 삶의 희망을 놓지 않았던 김태영 시인은 “살아 있다는 사실보다 더 큰 감동은 없다”고 말한다.

천양희 시인은 자신의 시집 ‘독신녀에게’ 서문에서 ‘시(詩)라는 글자도 말씀 언(言) 변에 절 사(寺) 자가 합쳐서 된 것이 아닌가. 말씀의 절, 말 속에 절이 있다니! 말이 마음의 다른 표현이라면, 마음 속에 절을 가지듯 구도하는 자세로 시를 써야 한다는 뜻일 것’이라 했다. 은산철벽을 마주한 선객이 백척의 낭떠러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오도송 첫 구를 낚아채 오듯, 시인 또한 시심(詩心)의 고독 끝자락에서 시어(詩語) 하나 건져 올릴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린다.

정성담긴 의술에 병원 ‘북적’
종합병원 포부에 촌음도 아껴

심근경색·위암3기·뇌경색
최악의 투병고통 기도로 극복

봉정암 오른 후 시 세계 개안
50대 늦깎이 등단 시인 반열

삶 관조 속 생명존엄 시로 승화
‘암울한 시대 사는 우리’ 위안

김태영(60, 일여)씨는 시심을 품은 외과의사다. 대학교 재학시절 문학 동아리 ‘알파인드 오메가’를 만들기도 했던 그는 대학 문학의 밤 행사에서 시 한 수를 발표했다. ‘하늘이 부셔져 물 위에 반짝인다’는 대목을 들은 오세영 시인은 ‘이 한 구절 때문에 너는 시인’이라 평가 했다. ‘언젠가 정말 좋은 시를 쓰겠다’고 다짐한 건 그때였다.

의사 길을 걸으면서 시는 멀어졌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쩐의 세계’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원고지를 마주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13년 10월 ‘모던 포엠’ 신인상에 ‘봉정암’이 당선되기 전까지 그는 유명한 외과의사였지 시인은 아니었다.

봉정암

십여 년 전
백담사 계곡의 아름다움에 홀려
봉정암 오르는 길목 마음 묻어 두었다.

십 년 만에 싹튼 설렘 앞세우고
들어선 산길
얼마를 더 가야 하느냐 물으면
가다 보면 있단다.
오다 보니 있더란다.

숨 머리끝까지 차오를 때
자연이 내려와 손목을 잡아준다.
새소리 물소리 숨죽임에
세상이 사리로 맺혀 탑을 쌓았다.

중생의 업을 씻어 적멸에 이른 곳
극락의 중심에 좌정한 쪽빛 하늘
작은 돌부리가
반야용선일 줄이야.

육신의 피로 풀리기 전 더 오르고픈
한 가지 소원 꼭 들어주신다는 전설의 끝
가족 넷의 기도 일시에 성취하는
현증가피를 체험시키고 싶다.


1990년 부천에 ‘김태영 외과’를 개원한 후 그는 여타의 개인병원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수술을 척척 해냈다. 그의 실력은 자연스레 입소문을 탔고, 사람들은 너도나도 김 원장 병원을 찾았다. ‘10년 내 종합병원 개원’이라는 포부도 가졌던 김 원장에게 촌음은 금보다 귀했다. 수없이 밀려드는 환자를 돌보느라 몸은 무거웠지만 힘을 냈다. 며칠만 지나면 일명 ‘007 가방’이라 불리는 가방에 현금이 가득 찼다. 어느 날, 쉼 없이 돌아 갔던 인생의 초침이 한 순간에 딱 멈췄다.

‘…2001년 6월3일 10시경,/ 그토록 모든 이들이 두려워하는/ 깊은 망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가/ 명훈가피로 덤 인생을 지고 나와/ 이렇게 살얼음을 딛고 있다…’(시 ‘연명’중)

강남의 한 헬스장에서 운동하던 중 가슴 통증에 쓰러졌다. 심장에서 뇌로 향하는 혈관 5개가 막힌 심근경색. 적혈구 수가 낮아 빈혈이 심해져 검진에 들어갔는데 위암 3기 판정까지 받았다. 지금도 위암 3기면 생존율 40% 전후다. 심근경색에 위암이라면 ‘사망선고’나 다름없다. 김 원장은 수술을 거부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느니 몰핀에 의지해 통증 줄여가다 그대로 죽고 싶었습니다.”

부인 오수자씨를 비롯한 가족들이 한 달 동안 눈물로 호소했다. ‘수술 한 번만 받아보자’고, ‘이렇게 떠나면 남은 사람들은 하루도 편치 않을 것’이라고! 2001년 7월 초 심장수술을 받고, 그로부터 4주 후 위 절제 수술을 받았다. 6개월의 항암치료 기간 동안 몸무게는 78Kg에서 63Kg으로 줄었다.

‘쩐의 세계에 빠졌다’는 건 성취감에 도취 되어 제 몸을 살피지 않은 자신을 나무라는 말이다. 살얼음판에서 빠져 나오려 애썼다. 병원 문을 닫고 ‘종합병원 개원’이라는 꿈도 접었다. 그의 인생 초침은 다시 움직였다. 허나, 2005년 1월, 자신의 집 화장실에서 뇌경색으로 또 다시 쓰러졌다. 운동 삼아 새롭게 취미 붙인 ‘골프’가 가장 큰 화근이었다. 프로와 한 번 겨뤄보겠다며 자신을 채찍질한 게 병을 키웠다.

“큰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으면 몸 관리에 더 신경 써야 했는데 제 몸을 과신했던 겁니다. 누구보다 가족에게 미안했습니다. 지난 수년 간의 간호에 지쳤을 아내에게 더 힘든 짐을 지게 했고, ‘아버지 완쾌시켜 달라’며 남 몰래 부처님 전에 기도했던 딸에게 또 다시 큰 슬픔을 안겼습니다.”

▲ 김태영 시인에게 차는 누구보다 가까운 도반이다.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왼손은 쓸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지인들 볼 낮이 없다’며 두문불출했다. 차 한 잔 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원고지를 꺼낸 건 ‘뭐 라도 쓰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낸 세월만도 얼추 4년이다.

그렇다고 재활의지마저 꺾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필사적이었다. 뇌경색 수술 직후 담당 의사의 권유가 있기도 전에 ‘운동 하겠다’며 부축을 받아 첫 걸음을 뗐다. 아산병원 1층에서부터 옥상까지 기어가다시피 하며 계단을 올라갔던 뇌경색 환자는 아마도 그가 유일무이 할 것이다. 단지 ‘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거동도 제대로 못해 누워만 있는 남편, 아버지를 돌봐야만 하는 가족의 고통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1년여가 지나며 동네 어귀를 돌 수 있게 되었고, 다시 2년여가 지나며 한강변도 산책하기 시작했다. 다시 1년여가 지나며 남한산성에도 오를 수 있게 됐다. 그 즈음, 지인의 소개로 화성 신흥사 성일 스님을 찾았다. 성일 스님이라 하면 다 쓰러져가는 농막법당을 오늘의 청소년 포교 성지 신흥사로 일으킨 그 성일 스님이다.

“천일 기도로 대규모 청소년교육관을 건립했다는 큰 스님을 직접 친견하니 저도 모르게 신심이 났습니다. 절에 머물고 싶다는 뜻을 전하니 큰 스님은 딱 한 가지 조건을 제안하셨습니다. ‘예불을 빠져서는 안 된다’는 거였습니다.”

성일 스님의 지도로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시작했다. 새벽예불은 물론 사시마지, 저녁예불에도 참석하고, 예불 후엔 어김없이 기도정진했다.

“미묘한 기도의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도 과정에서의 체험은 차치하고라도 몸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몸이 제 리듬을 알아서 찾아간다고 할까요?”

화성 신흥사에서의 30일 기도정진은 봉정암 기도로 이어졌다. ‘봉정암 오르는 길목’에 묻어 두었던 마음을 다시 꺼낸 건 2012년 여름. 지인들은 ‘저러다 또 쓰러지는 거 아닌가?’하는 우려를 표했지만 그는 이미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아니, 꼭 올라보고 싶었다. 아니, 올라야만 했다!

▲ 김태영 시인은 매일 아침 부처님 전에 차를 올린 후 정진한다.

“봉정암에 올라 기도하면 부처님께서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 하셨습니다. 제 소원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는 끝내 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뇌경색으로 쓰지 못하게 된 왼손이 어서 낫기를 바랐을 것이다. 백담사에서 봉정암에 이르는 11Km 구간을 천천히, 허나 그 누구보다 힘차게 올라갔다. 봉정암 사리탑 앞에 섰다. 순간, 가슴 한 구석에서 형언할 수 없는 엄청난 파문이 일었다.

“다 사라졌습니다. 10년 묵은 체증이 단박에 뻥 뚫리는 것처럼 속 시원했습니다. 저 혼자였다면 춤이라도 추었을 듯싶습니다.” 합장했다. 그 법열 감당키 어려워 연신 합장만 했다. 하늘 아래 펼쳐진 설악 능선을 응시했다. 한 쪽 손을 쓰지 못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민하고 슬퍼만 하기엔 이 생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밀려 들어왔습니다. 가끔은 저 구름처럼 유유히 길을 걷다가 지나가는 바람에 귀 한 번 기울여 보자! 내가 살아 있다는 방증 아닌가!”

시 ‘봉정암’은 그의 생애 중 가장 고단했던 삶의 길목에서 ‘보이지 않는 눈물’을 꾹꾹 찍어 써 내려간 독백이다.

“베란다에 핀 난초(蘭草) 잎 하나에도 엄청난 기적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습니다. 차 한 잔 할 수 있는 여유가 주는 행복감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봉정암 오르기 전의 차와 시가 그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도구였다면, 봉정암 하산 후의 차와 시는 도반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최근에 보여주는 시는 고독한 듯 정겹다. 가슴 속에 쌓인 고통의 찌꺼기를 ‘컥컥’ 토해냈던 한강도 이제는 새롭다고 한다.

‘… 잠시 지친 짐을 부어내려/ 물구나무라도 서볼 듯/ 거꾸로 매달린 한강의 서울은 정겹기만 하다./ 이 또한/ 어둠에 달빛이 주는 아름다움일 거야/ 오늘도 한강은 새롭다.’(시 ‘만월’ 중 일부)

절망의 순간 자신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었던 가족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이제 ‘가장’으로서의 면모도 다 할 것이라는 고백도 있다.

▲ 김태영 시인은 봉정암 사리탑 앞에서 깨달았다. ‘난초 잎 하나에도 엄청난 생명의 기적이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마음의 밭이다/ 우리 가족의 심전(心田)/ 뿌리를 뻗는 생명의 터전 … 나는 밭을 떠나지 못하는 나무/ 한평생을 잎을 떨구어/ 마음 밭 가꾸는 틈새로 녹아들어/ 눈부신 꽃 피워 결실을 맺는/ 당신에게 필요한 한 그루 나무…’(시 ‘심전’ 중 일부)

그의 시를 엄창섭 시인은 월간 모던포엠 (2014년 2월호)을 통해 이렇게 평했다.

‘힘겨운 삶의 현장에서 숙명처럼 생명의 존엄성을 절감하여 맑은 서정을 눈부신 존재의 꽃으로 형상화 하면서도 그 자신의 존재감에 새로운 의미를 명증하는 창조적 행위는 암울한 시간대에 몸담은 우리에겐 하나의 위안이다.’

그는 지금도 스마일재활요양병원의 진료부원장을 맡아 자신의 의술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이제 끝’이라며 삶을 포기하려는 환자들에게 “살아 있다는 사실보다 더 큰 감동은 없다”며 “이 생애 멋지게 살아보자”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왜 시를 쓰느냐?”물으니 “대단한 시인이 되려는 건 아니”라고 한다. “그 누군가 제 시를 통해 생명의 귀중함에 공감할 수 있다면 그만!”이란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시맥(詩脈)을 찾았다. 그가 캐어내는 시어들을 기다려 보자.

“삶이란 고행이 아닌 수행이요, 고통이 아닌 난(難)일 뿐”이라는 그는 의술(醫術)을 품은 시인이다.

채문기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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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시인은 충북 청주 출생. 2013년 ‘모던포엠’ 등단. 외과전문의. 충남대 의과대학 졸업. 1986년 아시아 올림픽 경기 선수촌 병원 수술실장. 김태영외과 원장. 대한민국 녹차 홍보대사. 현재 스마일재활요양병원 진료부원장.

 [1276호 / 2015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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