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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사섭 - 중

‘나’라는 괴로움 실체 모르면 벗어날 방법도 못 찾는다

▲ 지금 죽는다고 해도 아쉬움이 남지 않을까. 죽음명상은 ‘내’가 현실에서 집착하고 있는 대상을 또렷하게 드러나게 했다.

승승장구했다. 굵직굵직한 대형건설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과도한 업무도 참았다. 성공은 가족의 행복과 직결된다고 믿었다. 성공이라는 빛은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가족 품으로 돌아가는 길, 과로와 스트레스가 발끝에 들러붙었다. 어두운 골목을 밝힌 가로등 불빛이 마중 나오면, 늘어진 그림자는 매번 느렸고 흐느적거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갈수록 멀어졌다.

집착↔고통 반복하는 중생심
‘나’에서 시작한 괴로움 발견
“마음과 대상 비빔밥 만들면
시도 때도 없이 번뇌 일어나”

통곡·분노 등 악감정 표출
집단개싸움 ‘나’ 제거 연습

상대에게 절하는 ‘부처 게임’
‘하심’ 배우고 자존감도 높여
‘구나·겠지·감사’로 마음치유

그림자는 마음에 안개를 덧씌웠다. 흐릿했다. 지금 흐르는 마음을 알아채는 일은 곤란하고 어려웠다. 잡히지 않는 안개만 헤집는 꼴이었다. 문득, 아내가 떠오르자 감정이 일었다. 아내는 곁을 떠났다. 암으로 사별했다. 핏덩어리 아들을 안고 산후조리원으로 가는 길, 아내가 했던 말에 불쑥 솟았던 화가 되살아났다. 아내는 “장모한테 인사도 못 해”라고 쏘아붙였다. ‘쏘아붙였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에서 분노[瞋]가 고개를 들었다.

동사섭에서는 촛대와 불꽃을 강조했다. 촛대는 상황이고, 불꽃은 느낌이자 감정이며 정서였다. 산후조리원 상황에서 생긴 감정을 쓴 문장에서 ‘나’를 제거하랬다. 말로 사고한다는 언어학자의 촌철을 설명하며 말부터 바꾸는 연습을 시켰다. 나만의 판단이나 감정[相]이 들어간 단어에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도사리고 있어서다.

‘쏘아붙였다’를 뺐다. ‘말했다’로 바꿨다. ‘나’를 빼자 객관적 상황만 남았다. 화가 조금 가라앉았다. 동사섭은 상황 끝에 ‘~구나’를 붙이라고 권했다. “‘장모한테 인사도 못 해’라고 말하는구나.” 상대 입장에서 최대한 상황을 이해하라 일렀다. 이번엔 ‘~겠지’라는 어미가 붙었다. 아내 마음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멀리서 아이와 딸을 돌보러 왔는데 사위가 인사도 제대로 못 하는 모습이 못마땅했겠지.’ 외려 감사했다. 동사섭은 ‘그만하니~감사’한 일을 사유(명상)하라고 했다. 아내는 더 심한 말을 할 수도 있었다. 남편 마음 상할까 봐 그 정도 수위에서 감정을 표현하고 그만둔 게 감사할 일이었다. 안개가 엷어지고 마음에선 몰록 고마움이 일었다.

‘나지사 명상’이라고 불렀다. ‘구나’, ‘겠지’, ‘감사’에서 끝 글자를 따서 이름 붙인 명상법이었다. 나지사 명상에 이르기까지 과정은 철저하게 ‘나’를 떼내는 작업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고통의 원인은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용타 스님이 비빔밥 철학을 설명했다. 삐뚤어진 고무신은 바로 놔야하고 어른인 주지스님이 눈 쓴다며 수좌스님들에게 잔소리했던 노보살 일화에서 비빔밥 철학이 나왔다. 어떤 대상과 ‘나’를 비비면 번뇌라는 비빔밥을 만든다고 했다. ‘나’와 대상이 뒤섞이는 순간, ‘~구나’로 대상과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는 시간을 짧게 만드는 게 수행이랬다. 고정관념이나 편견일 수 있는 자신의 가치관이나 판단[我相]으로 대상을 보기 시작하면 마땅찮은 일들이 많고 마음은 불만으로 들끓어 지옥으로 변한다고 했다. 동사섭은 화합의 장에서 지족(知足)·비아(非我)·죽음·나지사 명상 등 수심(修心)의 장까지 ‘나’를 비우는 노력을 계속했다.

수심장은 행동명상이라는 문턱을 넘어야 했다. ‘나’라는 ‘똥’을 치우는 방편으로 교장, 사장, 요조숙녀 등 격[相]을 떼는 연습이다. 15초간 크게 웃고, 불을 꺼놓고 마음에 안 들었던 일들과 사람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화도 내고 대성통곡하기도 했다. 죽어가는 개도 흉내내고 시장판에서 장사치도 됐다. 엎드려 어깨를 밀치면서 집단 개싸움을 했다. ‘나’를 버리지 않고 소극적이면 싸움을 멈추는 종은 울리지 않았다. 방 전체가 으르렁댔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상대를 밀쳤다. 종소리가 들리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감정 토하니 마음은 따뜻해졌다.

용타 스님이 탐진치(貪瞋癡) 삼독심의 번뇌 구조론을 꺼냈다. ‘내 눈’으로 대상을 본 뒤 ‘있다’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가 번뇌에서 고통에 이르는 첫걸음이었다. ‘있다’라는 어리석은 실체사고[癡心]를 거쳐 ‘좋다, 싫다’는 가치사고[癡心]에 이르면 ‘싶다’는 탐심(貪心)이 일어났다. 탐이 충족되지 않을 때 불만이 드러나며 ‘썅’이라는 분노[瞋心]가 치밀었다. 불만은 자꾸 ‘있다’와 ‘좋다’를 부추기면서 번뇌를 눈덩이처럼 불리는 기폭제였다. 이 악순환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면 중생놀음이라고 했다. 악순환 고리 한 군데를 끊어내야만 마음에 행복이 깃든다고 용타 스님은 강조했다.

▲ 주전자 하나에도 200여개가 넘게 감사할 일들이 있었다.

지족명상은 불만을 제거했다. 일반과정 핵심이었다. 사물에서 사람 그리고 자신까지 감사한 점을 찾았다. 둥글게 앉아 가운데 주전자 하나 놓고 고마운 점 40가지를 사유해 문장으로 표현해야 했다. 물을 담아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것부터 200여개가 넘는 고마움을 표현했다. 흔한 대상에서 고마움을 찾을 수 있게 되자 가족, 친구, 직장동료 등 주변 사람 그리고 자신에게 확장하는 일은 수월했다. 결국 곁을 지키는 사람들과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마저 생겼다. 특히 특정 수련생에게 다른 수련생 모두가 칭찬 한 가지씩 쏟아내는 칭찬샤워는 자존감을 높였다.

▲ ‘나’를 내려놓는 최고 행동은 절이었다.

상대를 존중하고 자존감을 높이는 지족명상은 ‘부처 게임’이 압권이었다. 절이었다. 하심하며 ‘나’를 바닥으로 떨치고 상대를 존중 받아 마땅한 부처님으로 대했다. 한 명이 좌복에 앉자 제일 연장자가 삼배를 올렸다. “제 절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적이 흘렀다. 연장자가 손아래 사람에게 절하자 수련생들 얼굴이 굳어졌다. 행동명상으로 씻었다고 생각했던 ‘똥’은 여전히 냄새를 풍겼다. 거부감 느끼던 수련생 몇몇이 돌아가며 절을 하자 ‘똥냄새’가 걷혔다. 절 받은 부처님은 환희심에 떨며 울었다. 운 부처님은 그에게 다시 절을 올렸고 두 손 마주 잡고 얼싸안자 두 부처님이 탄생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었다.

죽음명상이 탐심을 마주 보게 했다. 앞에 둔 볼펜을 치우면 당장 죽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불펜을 치우는 수련생은 없었다. 삶에 대한 집착은 그만큼 강했다. ‘~ 때문에 못 죽는다’는 문장을 썼고, 최소한 삶의 의미를 찾았다.

▲ “당신은 무엇입니까?” 마주 앉아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은 ‘나’라고 여겼던 고정관념을 깨는 명상이었다.

비아명상은 ‘있다’를 제거했다. ‘나’부터 없앴다. 존재하는 모든 대상이 인연 따라 잠깐 모습(허상)을 드러내고 인연 다하면 사라질 뿐이었다. ‘몸’조차 정자와 난자가 시절인연을 만나 형성된 자연물에 불과했다. ‘몸’에서 떼어 놓은 팔과 다리를 ‘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시각각 현상이라는 조건을 만나 변하는 마음(생각, 느낌) 역시 ‘나’는 아니었다. 수련생들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질문이 곧 화두였다.

“그렇다면 진정, 당신은 무엇입니까?”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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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순간 부처님 놀음하며 살아가시길”

동사섭 지도 35년 용타 스님

 
“지금 부처님 하시라. 생활 속에서 부처님으로 사유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부처님 놀음하세요.”

동사섭을 35년 지도해온 행복마을 이사장 용타 스님에게 활불교란 생활 속에 깨어있음이었다. 처음부터 스님의 메시지는 “지금, 바로 부처님 하라”였다.

“동사섭은 수심과 화합 그리고 작선(作善)으로 부처님 인품을 만드는 인품론이자 행복론이다. 나로부터 확장된 행복으로 공동체를 행복하게 하는 공동체론이기도 하다. 5박6일 일반과정에서 지족과 나지사명상만 가져가도 족하다. 그러나 배운 이론들이 생활에서 활발발하게 살아 움직일 때 인격자이자 참불자라 할 수 있다. 평상심이 도다.”

스님이 동사섭에 녹여낸 ‘나’를 벗겨내는 지혜는 ‘공의 이치[空理]’ 27개에 담기기도 했다. 스님이 반백년 익히고 다듬어온 지혜다.

“존재하는 대상은 굴절된 그림자다. 눈, 귀, 코, 혀, 몸, 의지 등 근(根)이라는 주관적 프리즘인 ‘나’로 인해 왜곡된다. 열이라는 인연(조건)을 만난 물방울이 어느 순간 기체가 됐을 때 우리는 그 기체를 물방울이라고 할 수 없다.”

별빛은 태양빛을 반사해 몇 억 광년 뒤에야 우리 눈에 들어온다. 그 별빛을 ‘있다’라고 설명할 수 없다. 이미 없어진 별도 수두룩하다. 눈은 ‘별빛이 보인다’는 현상을 받아들여 사라진 별마저 ‘있다’고 착각하도록 부추긴다. 프리즘을 제거하는 파근현공(破根顯空)이다.

현실서 활용 가능한 ‘공’으로 ‘구나’, ‘겠지’, ‘감사’의 나지사 명상을 들었다. 어떤 상황과 마주했을 때 ‘구나’를 대입해 ‘좋다, 싫다’라는 가치판단을  빼는 생활수행이다.

용타 스님은 “말 속에는 마음이 들어 있고, 말은 그 마음을 담아 나르는 그릇이자 수레”라며 “매사에 깨어 ‘구나’하고 ‘겠지’로 상대와 공감하며 ‘감사’로 화안애어(和顔愛語)를 보시하면 바로 부처님”이라고 강조했다.


[1278호 / 2015년 1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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