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좋은 경치는 실컷 원대로 봐둘 일이 제일 크고, 제일 마땅한 일이다."
뱃바람 차가운 한 겨울에도 바다 위 섬이 아늑해 보이는 건 바다가 섬을 품어서일까? 석모도 바람길을 따라 걷다보면 꼭 그래서만은 아닌 듯싶다.
겨울바람살에 흙속 깊이 몸을 사리고 있지만 저 갯벌에는 큰 집게발을 가진 농게, 한 밤의 사냥꾼 낙지를 비롯해 소라, 모시조개, 갯지렁이, 칠게 등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극히 작은 생물마저 마다않고 품은 섬이 있기에 가능했다. 서해안 중 단위 면적당 미생물 개체수가 가장 많은 갯벌이 석모도 갯벌이고, 여기 민머루 해변의 갯벌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하니 더 이상의 사족은 필요 없겠다.
저 뭍에서 이는 바람타고 왔을 풀씨도 보석처럼 빛나는 이 섬이 좋아 제 스스로 내려앉아 꽃을 피웠을 게다. 반 그늘지고 공기 중의 수분 많으면 잘 피어나는 앵초가 먼저 자리 잡았을 것이고, 서울 남산서 처음 발견돼 이름 붙여졌다는 남산제비꽃도 4월이면 여기 어디쯤서 하얗게 피어나겠지. 어느덧 소사나무들도 옹기종기 모여 서로의 가지를 기대며 댕댕하게 자라고, 그 지척엔 5월이면 암꽃과 수꽃이 한 나무에 따로따로 피는 굴참나무도 자리했을 터. 허나, 처음 이 섬을 찾은 솔씨의 생은 그리 길지 않았을 것이다.
참나무는 그늘에서도 잘 자라는 음수(陰樹)지만 소나무는 햇볕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양수(陽樹) 아닌가. 솔씨가 10년을 살아 소나무가 되었다 해도 참나무 가지가 햇볕을 가리면 생을 거둬야만 했다. 숲의 천이(遷移)를 소나무인들 피할 수 있으랴! 하여, 다른 나무들은 잘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땅에서라도 소나무는 살아야 했다.
보문사 일주문을 지나 만나는 10m 높이의 푸른 소나무 앞에 걸음을 멈추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줌의 햇볕을 얻기 위해 제 몸을 비튼, 나름의 고행 끝에 얻은 생명 아닌가. 그래도 아침, 저녁으로 찾아와주는 박새 소곤거림에 고독하지만은 않았을 게다. 목과 뺨이 장밋빛인 멋쟁이새며 곤줄박이도 하늘길 가다 저 가지에 앉아 쉬어갔겠지.
섬은 이렇게 온새미로 갯벌과 숲을 키워갔다.
낙가산 정상 바로 아래 툭 튀어 나온 바위, 그 누군가 ‘눈썹바위’라 이름 했단다. 1928년 주지 선주 스님 원력으로 화응 스님이 저 암벽에 관음상을 새겼다. 근대 마애불이라 해서 섣불리 볼 편견은 접어라. 거기서 기도한 불자들의 ‘효험’ 입소문이 퍼져 남쪽 금산 보리암, 동쪽 낙산사 홍련암과 함께 한국 3대 해수관음 성지로 그 명성이 자자하다. 극락보전에서 마애관음상까지는 418개 계단을 밟고 올라야 친견할 수 있다. 번뇌 하나 누르듯 계단을 꼭꼭 밟아가며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며 산을 오르는 불자들이 평일임에도 줄을 잇는다. 첫 계단을 밟는다.
이 절을 창건하고 저 산 봉우리를 낙가산이라 칭했다는 회정 스님은 이 섬을 어찌 알고 여기에 보문(普門. 635년)을 세웠을까? 금강산 보덕굴(북쪽의 관음 상주처)에서 정진하던 회정 스님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는 남쪽으로 걸음했다. 강원도, 아니 지금의 경기 북부에도 도량 세울만한 좋은 터는 많이 보았을 게 분명한데 이곳 강화도까지 건너와 이 섬에 이르렀다. 어떤 인연이 스님의 발걸음을 이 섬으로 이끌었을까? 선정에서 이미 보았던 것일까?
한 가지 상기할 건 이 섬은 본래 세 개의 섬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1970년대 간척사업으로 하나의 섬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7개 마을로 이뤄진 이 섬은 강화군 삼산면에 속한다. ‘삼산(三山)’이라 한 건 해명산과 상봉산 그리고 낙가산 3개의 봉우리가 산(山)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정 스님이 지금의 낙가산 아래 도량을 찾았을 땐 세 섬 중 하나, 작은 섬이었다.
절이 제법 모양새를 갖춰갈 즈음(649년) 어부의 그물에 예쁘게 생긴 작은 돌덩이들이 올라왔다. 고기가 아니라 돌이었으니 처음엔 실망했을 터. 돌을 다시 바다에 버리고 그물을 던졌지만 같은 돌 무더기가 다시 올라와 도로 바다에 던졌다. 그날 밤 어부는 꿈에서 한 노승(노인)으로부터 ‘귀한 불상이니 명산의 절에 모시라’는 당부를 듣는다. 어부는 다시 바다로 나가 그물을 던져 돌을 건져 올렸고 이 돌을 낙가산 보문사에 전했다.
지금의 석굴 법당에 안치한 ‘귀한 돌’이 그 때의 돌이다. 석가모니부처님과 미륵불, 제화갈라보살 그리고 18나한상이다. 회정 스님이 보문사를 창건하지 않았다면, 해명산과 상봉산 사이의 산봉우리를 낙가산이라 이름 하지 않았다면, 저 불상은 적어도 이 도량에 없다. 어쩌면 회정 스님이 길을 따라 이곳에 올 때까지 바다가 불상을 품고 있었을 지 모른다. 남쪽의 관음 상주처가 완성될 때를 말이다.
다소 가빠진 호흡을 크게 한 번 돌려야 할 즈음 딱 맞게 쉼터가 있다. 얼핏 봐도 수백여개의 작은 병들이 쉼터 난간에 매달려 있다. 소원·소망을 적은 쪽지가 담긴 병이다. 먼저 와 있던 보살님도 손주 이름 적어넣고 있다. 쓸 데 없는 일이라 핀잔 말라. 그들은 자신의 바람을 스스로 새겨보는 것뿐이다. 뭍에서 배타고 바다 건너 와서는 다시 400개 가까운 계단을 밟고 올라와 마애불 뵙기 직전 ‘손주 건강하길 바라는’ 소망 하나 적어넣는 일이다.
시나브로 해는 황해의 수평선으로 떨어져 갈 즈음 마애관음상이 나퉜다. 한 마디로 위풍당당하면서도 소담한 멋진 마애불이다. 한참을 넋 잃듯 바라만보다 108배를 올렸다. 회정 스님의 원력, 선주·화응 스님의 신심에 드리는 감사의 절이다. 절이 끝날 무렵 마애관음상은 황금빛 미소를 자아냈다. 그 환희심 형언키 어려우니 직접 가보시라!
돌아섰다. 히야! 썰물 갯벌에 드러난 바다 속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그 너머에 붉은 노을이 깔리고 있다. 보문(普門)이 활짝 열리고 있음이다! 신라의 회정 스님도 저 노을을 보고 불사 결단을 내렸을 게 분명하다.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아니다. 그만한 선업을 쌓았을 것이라 믿고 누릴 일이다. 박재삼 시인 말처럼 ‘제일 크고 마땅한 일’이다
… 이런 좋은 경치는/ 실상 이 세상에서만 있는 것을 느끼면/ 죽어서는 못보는 원통함에/ 실컷 원대로 봐둘 일이/ 제일 크고, 제일 마땅한 일이다. (박재삼 시 ‘제일 크고 마땅한 일’ 일부)
섬이 바다를 품은 게 분명하다. 뭍에서 날아온 생명의 씨앗을 섬이 키워내지 않았다면 이런 장관은 빚어지지 않는다. 뱃전에서, 바람길에서 본 섬들이 아늑해 보인 건 이 때문이다. 보현사 북소리 둥둥하더니 이내 웅건한 종소리가 황해로 퍼져간다.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강화 외포리 선착장. 석모도 석포리 선착장까지는 배로 10분. 보문사까지는 약 8.6Km. 일주문서 마애불까지는 쉬엄쉬엄 걸어가도 30분이면 충분. 진덕이 고개서 산길을 따라 해명산을 지나 낙가산을 오르며(약 3시간) 내려다 보는 해안 경치는 일품. 낙가산에서 하산한 후 보문사 일주문으로 들어서서 마애불을 친견한다면 환희심은 두 배. 상봉산까지 오른 후 보문사로 걸음 한다면 기쁨 세 배. (보문사 032-933-8271. 외포리 선착장 032-932-6007. 석모도 가는 첫 배는 오전 7시. 30분마다 배가 있다. 마지막 배는 계절마다 다르다.)
이것만은 꼭!
◀ 은행나무=일주문을 지나 만나는 수령 400년의 은행나무는 강화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나무 높이만도 20m.
▶ 천인대 오백나한=길이 40m, 폭 5m의 큰 바위에는 1000명이 앉아 설법을 들을 수 있다 하여 천인대라 이름했다. 오백나한은 2009년께 조성. 나한의 표정이 재밌다. 와불전도 천인대에 자리하고 있다.
◀ 법왕궁 불상=신라 선덕여왕 때 어부의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는 불상은 보문사 석실에 안치돼 있다.
이외에도 전체 신장 10m의 와불과 용트림을 하는 듯한 밑동 지름 2.1m의 향나무, 지름 69Cm, 두께 20Cm의 맷돌도 볼만하다.
[1279호 / 2015년 1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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