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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1칙 무제와 달마의 문답 (2)

“이런 멍청한! 당나귀 잡아매는 말뚝이로구나”

▲ 달마는 무제를 떠나 양자강을 건너 하남성 등대현 숭산에 올라 면벽 9년에 들어갔다. 소림사(少林寺)다. 일주문에 해당하는 패방에 새겨진 ‘숭산소림’이라는 글자가 소림사에 들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성스런 진리 묻는 양무제에
원오극근 “멍청한 놈” 평가
멍청한 부류에는 달마도 포함
질문과 답변 성립마저 단절

언어 매이면 본성 보기 어려워
수행자 지독한 망상분별 습관
단칼에 베어버린 원오의 자비

스스로 옭아맨 말뚝 풀어낼때
참다운 대자유인으로 태어나

<본칙과 착어>
본칙 공안의 각 구절에 대한 원오 선사의 짤막한 코멘트인 착어는 ( ) 속에 넣었다.

양나라 무제가 달마대사에게 물었다.(← 이런 멍청한 놈!)
“성스러운 궁극적 진리(聖諦第一義)란 어떤 것입니까?”(← 하 참! 당나귀 잡아매는 말뚝이군.)
                                              
달마대사는 말했다.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습니다(廓然無聖).”(← 얼마나 현묘한 대답을 하는가 했더니, 화살은 신라로 날아가 버렸네. 참으로 명백하군.)

무제가 물었다.                
“짐과 마주한 그대는 누구요?”(←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애써 현명한 체하는구나. 예상한 대로 여전히 찾지 못하는군.)

달마대사가 말했다.
“모릅니다(不識).”(← 쯧쯧! 거듭해 봐도 반 푼의 값어치도 없군.)

무제는 알아채지 못했다.(← 애석하구나. 바로 코앞까지 왔는데.)
달마대사는 마침내 양자강을 건너 위나라로 갔다.(← 이 사이비 중아, 한바탕 개망신을 당한 것이 고작이구나. 서에서 동으로, 동에서 서로 갈팡질팡하는군.)

무제는 나중에 이 일에 대해 지공 화상에게 물었다.(← 빈털터리가 해묵은 빚을 걱정하는구나. 제삼자가 보면 빤히 보이지.)

지공 화상이 말했다.
“폐하,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지공 화상까지도 함께 나라 밖으로 내쫓아야 한다. 30방망이는 쳐야겠다. 달마가 왔구나.)

무제가 말했다.
“모르오(不識).”(← 이런, 도리어 무제가 달마의 공안을 잘 받아들였구나.)

지공 화상이 말했다.
“이분은 관음 대사이시며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하십니다.”(← 멋대로 해석하는구나. 팔은 바깥쪽으로 굽지 않는 법.)

무제는 후회하고 이에 사신을 보내어 맞이하려 했다.(← 역시 파악하지 못하고 있군. 앞에서 ‘멍청한 놈’이라 했건만.)

지공 화상이 말했다.
“폐하, 사신을 보내어 모셔 오려 해도 당연히 그는 돌아오지 않을 뿐더러,(← 동쪽 집 사람이 죽으니 서쪽 집 사람이 슬피 우는 꼴이군. 한꺼번에 나라 밖으로 쫓아내어야 좋을걸.)

온 나라 사람이 모시러 간다고 해도 그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지공 화상에게도 30방망이를 쳐야겠다. 과연 발아래에서 대광명을 놓을까?)”

[참구]
<본칙> 양나라 무제가 달마대사에게 물었다. (착어 ← 이런 멍청한 놈!)

양무제는 달마대사의 “공덕이 없다”는 말에 구겨진 자존심을 만회하려고 다시 물었다. 이것이 본칙 첫머리에 나오는 “성스러운 궁극적인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라는 질문이다.

원오 선사는 양무제가 다시 물은 것에 대해 “이런 멍청한 놈!”이라는 착어를 붙이고 있다. 원오 선사의 선기가 번뜩이는 코멘트다. ‘멍청한 놈’은 당연히 무제를 가리킨다고 생각할 것이다. ‘벽암록’ 주석서 중에는 달마대사가 ‘멍청한 놈’이라고 한 책도 있다. 원오 선사가 ‘멍청한 놈’을 무제나 달마대사를 지칭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원오 선사의 선적 경지를 얕잡아 본 것이다. ‘멍청한 놈’은 과연 누구를 가리킬까? 원오 선사는 평창(해설)에서 이렇게 제창(提唱, 선적인 설법)했다.

“이와 같이 깨닫는다면 자유자재한 경지를 얻어 어떤 말에도 좌우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가 온통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 그러면 뒤에 나오는 무제와 달마대사가 나눈 대화와, 2조 혜가 스님의 안심의 경지를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이리저리 사려분별하지 않고 단칼에 베어버려야만 말끔하다. 이에 다시 무슨 시비와 득실을 분별할 필요가 있겠는가?”

말이나 문자에 매이지 않고 곧바로 본성을 꿰뚫어야 자유자재한 경지를 얻어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온통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不立文字, 見性成佛).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분별망상도 단칼에 잘라 버려 흔적조차 남기지 말아야 한다고 원오 선사는 말한다. 애초에 사건의 발단이 될 꼬투리가 없으면 시비가 붙을 일도 없고 득실을 따질 일도 없다. 묻고 대답할 빌미조차 없는데 무엇을 묻고 무엇을 대답한다는 말인가? 당초에 이런 문답의 본칙을 제시한 것 자체가 어불성설 아닌가?

그렇다면 원오 선사는 누구를 향해 “이런 멍청한 놈!”이라 했을까? 그는 질문하는 무제나 대답하는 달마대사는 물론, 이런 본칙을 제시한 설두 선사까지도 멍청한 놈이라고 몰아붙여 질문과 답변을 성립시킬 최초의 한 생각마저 끊게 했다. 이것은 끊어도 끊어도 되살아나는 선 수행자의 지독한 망상분별의 습관을 일시에 끊게 하려는 원오 선사의 자비심의 발로였다.

“이런 멍청한 놈!” 이 얼마나 통쾌한 일갈인가! 뭐가 그렇게 괴롭고, 분하고, 미심쩍고, 미진한가? 미워하고 원망한들 돌아오는 것은 마음의 상처와 스트레스뿐인 것을. 더 이상 그 일에 걸려들지도 관여하지도 말고 아예 거론조차 하지 말라. 매달리고 곱씹을수록 마음은 상처받고 초라해진다. 일체의 쓸데없는 생각을 단칼에 끊어 흔적조차 없게 하라.

‘살불살조(殺佛殺祖)’한 자, 곧 부처와 조사에 대한 집착마저도 끊은 자가 진정한 자유인이다. 그 길에 들어서게 하기 위해 원오 선사가 내리치는 죽비가 “이런 멍청한 놈!”이다. 이 죽비 앞에서는 자존심을 구겨 속상해 하는 양나라 황제 무제도, 불심천자 양무제를 한마디로 제압한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도, 공안을 제시하여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려는 ‘설두송고’의 저자 설두도 단지 멍청한 짓을 한 놈에 지나지 않는다.

<본칙> “성스러운 궁극적 진리(聖諦第一義)란 어떤 것입니까?”(착어 ← 하 참! 당나귀 잡아매는 말뚝이군.)

이 물음은 앞의 질문, 즉 “짐은 절을 짓고 승려를 양성했습니다. 무슨 공덕이 있습니까?”와는 격이 다르다. 무제는 누약(婁約) 법사와 부(傅) 대사(大士), 그리고 큰아들 소명태자와 함께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주장하며 논의했다고 할 정도로 이에 통달해 있었다.

달마대사의 초탈한 기세에 눌려서 반론 한번 제기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당해야만 했던 양무제는 황제의 권위는 물론 불심천자로서 구긴 체면을 만회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불교 교리에 자긍심을 가지고 “성스러운 궁극적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 하고 불교 최고의 이론을 들고 나왔다. 달마대사의 대답이 선적 경지에서 나온 것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그는 여전히 교리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원오 선사는 평창에서 이렇게 제창했다.

“불교 교리에서 설하는 바에 따르면, 진제는 있지 않음(非有)을 밝힌 것이고 속제는 없지 않음(非無)을 밝힌 것이다. 진제와 속제는 둘이 아니니, 이것이 바로 ‘성스러운 궁극적 진리(聖諦第一義)’이다. 이것은 경론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최고로 깊고 현묘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이에 무제는 이 궁극적인 부분을 들어서 달마대사에게 물었다.”

원오 선사는 양무제가 말하는 ‘성스러운 궁극적인 진리’에 대해 “이것은 경론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최고로 깊고 현묘하게 여기는 부분이다”라고 평한다. 양무제가 여전히 불교 이론에 묶여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스러운 궁극적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라는 양무제의 질문에 대해, 원오 선사는 “하 참! 당나귀 잡아매는 말뚝이군” 하고 착어를 붙였다. ‘성스러운 진리’니 ‘궁극적인 진리’니 하며 거론하는 것은 당나귀가 말뚝에 묶여 꼼짝 못하고 있는 꼴이라는 것이다. 언어 이전의 소식을 접하는데 말뚝에 묶인 질문을 해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말뚝에 묶여 있는 애처로운 당나귀 한 마리. 강제로 묶는 자 아무도 없는데 좌충우돌 날뛰지만 벗어나지 못하네. ‘결자해지(結者解之)’, 스스로 풀고 나와서 끝없는 광야를 질풍처럼 달려 보라! 막아서는 자 누가 있을까?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버려야 한다. 깨달음의 문턱에서는 불교의 궁극적 진리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무제는 알지 못했다. 궁극적 진리는 오히려 그것을 초월할 때 저절로 나타나는 것임을 몰랐던 것이다. 부처가 막아서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가 막아서면 조사를 죽이라고 했다. 일체의 집착이나 속박에서 벗어날 때 참다운 대자유인으로 되살아난다.

‘성스러운 궁극적인 진리’라는 말뚝에 묶인 양무제. 그를 향해 원오 선사는 “하 참! 당나귀 잡아매는 말뚝이군”이라는 호된 착어를 던졌다. 이 착어로 원오 선사는 양무제는 물론 선 수행자들이 걸려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성스러운 진리’니 ‘궁극적인 진리’니 하는 생각과 그에 대한 집착을 깡그리 빼앗아 버렸다. 수행자들을 참다운 자유인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려는 원오 선사의 지극한 자비심이 묻어나는 한마디이다.

오곡도명상수련원 원장 www.ogokdo.net

[1280호 / 2015년 1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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