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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안창례 개운산무료급식소 봉사단장

“한 끼 공양에도 불보살님 가피 가득합니다”

▲ 안창례 단장은 “나눔은 넘치는 것을 덜어내는 것이 아니다. 넘치든 부족하든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실천해야 참다운 보시”라고 강조했다.

“다리도 편치 않은데 하루 쉬지 그래요.”

“따뜻한 한 끼 식사를 위해 산을 오르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제 걱정 마시고 점심 잘 챙겨 드세요.”

무료급식소가 도량…봉사가 수행
22년째 소외 어르신들에 점심 대접

4년 전 사후 장기·시신기증 서약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보시행

“이 세상 주인인 내가 먼저 행할 뿐
다음생 어르신 모실 처소 운영 서원”

노부부의 아침은 늘 가벼운 실랑이로 시작된다. 87세 할아버지는 미아리고개 넘어 개운산 정상까지 오를 82세 할머니가 못내 걱정이다. 할아버지의 마음을 뒤로하고 문을 나서는 할머니도 편치는 않다. 벌써 10여년,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는 침대에서 생활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드실 점심식사와 간식을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그렇다고 미안한 마음이 줄진 않는다. 하지만 하루 한 끼 식사마저 어려운 이웃들을 생각하면 마음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 할아버지는 이런 할머니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60년 도반이다. 행여 할머니 발걸음 무거울까 먼저 손 잡아주고 “고생하라” 한 마디 거든다.

개운산 오르는 길은 그대로가 할머니의 법당이다. 마음에 자리한 부처님을 향해 오롯이 기도하고 발원한다. ‘인연지은 모든 분들 돌아가실 그날까지 아프지 않고 건강하길 기원합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에는 금세 ‘관세음보살’ 염송소리가 따라 붙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밥 한 수저에 행복해할 100여명의 얼굴을 떠올리면 어느새 주름진 입가엔 고운 미소 꽃이 피어난다.

그 옛날 한 젊은이가 부처님께 물었다. 가진 게 없는 이가 어떻게 보시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부처님은 누구나 보시할 수 있는 일곱 가지를 재주가 있다고 일러 주었다. 정다운 얼굴로 대하는 화안시(和顔施), 말로써 베푸는 언시(言施),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는 심시(心施), 호의를 담은 눈으로 사람을 보는 안시(眼施), 남을 돕는 신시(身施),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는 좌시(座施),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찰시(擦施)가 그것이다.

 
안창례 개운산무료급식소 봉사단장은 하루 일상이 일곱 가지 보시로 가득한 불자(佛子)다. 그가 밥을 공양올릴 땐 허연 쌀밥 위 김처럼 자연스럽게 일곱 가지 보시행이 피어오른다. 정다운 얼굴로 어르신들을 맞이하고 따뜻한 마음이 담긴 음식을 눈 맞추며 건넨다. 혹여 불편한 곳은 없는지 살피고 도움이 필요한 어르신들을 위해 기꺼이 손과 발이 되어준다. 보살핌을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나이지만 그는 22년째 이일을 이어오고 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했다. 나서서 알리지 않았지만 그의 보살행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서울시는 그에게 감사패를 전달했고, 무료급식소가 위치한 서울 성북구는 2013년 ‘성북 명예의 전당’에 헌액했다. 지난해 한국사회복지협의회는 안 단장을 ‘2014년 자원봉사왕’으로 선정했고, 참여불교재가연대는 ‘올해의 재가불자상’을 수여했다. 10여년째 함께 활동해온 정광식 아름다운사회만들기 회장은 절로 고개가 숙여질 만큼 고귀한 분이라고 했다. 정 회장은 “나누고 함께하는 삶이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이라고 여기고 온몸으로 실천하는 불자”라면서 “무료급식소 봉사자들과 이용 어르신들 모두를 관세음보살님 모시듯 대하는 언제나 한결같은 어르신”이라고 했다.

안 단장에게 무료급식소는 부처님의 은혜를 보은하는 공간이다. 어린시절 그는 고생을 몰랐다. 8남매 막내로 태어나 오빠와 언니, 부모님의 희생으로 일군 터전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다. 남편과 시부모님 또한 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시샘의 대상이 될 만큼 행복한 나날이었다. 부처님 법을 만난 것은 결혼한 이후다. 독실한 불자였던 시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못한 남편을 위해 자주 절을 찾았고 그 때마다 며느리인 그를 대동했다. 향을 싼 종이에 시나브로 향내가 배이듯 그의 마음에 법향이 스미기 시작했다.

“솔직히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어요. 매일 매일이 좋은 날인데 굳이 더 큰 행복을 찾을 필요가 없었던 거죠. 시작은 아픈 남편의 건강을 빌기 위해서였어요. 절을 찾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스님들 법문도 듣게 되고, 법회에도 참석하게 됐습니다. 스님들이 전하는 부처님 말씀이 저를 향한 격려와 위로로 다가왔어요. 회룡사, 화계사, 도선사 등으로 큰스님 법문 들으러 참 많이 다녔습니다.”

어르신 세대가 대부분 그러하듯 불교에 대한 체계적 배움은 부족했지만 신심만은 단단했다. 그러나 굳은 신심과 간절한 기도에도 남편의 병환은 점점 깊어갔다. 30여년 전 대형병원이 인접한 서울 돈암동으로 보금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 개운산무료급식소를 만났다.

“잠시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자 오르던 개운산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산 정상 운동장에 트럭 한 대가 올라오더니 싣고 온 밥과 국, 반찬을 어르신들에게 나눠주는 겁니다. 늘 그곳에 있었지만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거지요. 지역 노점상들이 한 끼 식사도 해결하지 못하는 더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점심식사를 나눠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길게 늘어선 줄, 대부분 어르신들이었다. 작은 체구에 굽은 허리, 세월의 흔적 가득한 주름…. 그리운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8남매 늦둥이로 태어나 가족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랐지만 언니, 오빠들에 비해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은 적을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식사 한 끼 차려 드리지 못한 어머니였다. 마음이 따스해졌다. 거들고 싶었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듯 어르신들을 모시고 싶었다.

“용기를 내 나도 도울 수 있냐고 물었어요. 얼굴 한 번, 손 한 번 쓱 훑더니 ‘안 된다’고 합디다. 그 고운 손으로 무슨 일을 하겠느냐면서 며칠 하다가 힘들다고 그만둘 것이니 마음만 받겠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중간에 포기하지 않을 테니 허드렛일이라도 달라 했어요.”

첫 시작은 설거지였다.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100여명이 사용한 식판과 음식을 담았던 솥을 닦는다는 게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당시는 지금과 같은 급식시설도 없어 수도꼭지 하나에 모든 일을 처리해야 했다. 이마저도 겨울이면 얼음 밭으로 변해버렸고, 식사를 위해 쳐놓은 임시천막은 바람이 조금만 휘몰아쳐도 날아가 버리기 일쑤였다. 스님들이 절에서 수행하는 것처럼 이곳을 도량으로 삼고 봉사를 수행으로 삼자 마음먹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부르기 시작한 ‘관세음보살’이 이제는 잠시도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를 부르듯 그렇게 입에 배었다.

벌써 22년이다. 세월의 흔적만큼 안 단장의 역할도 설거지에서 배식봉사로, 다시 음식만들기, 무료배식소 관리 등으로 여러 번 바뀌었다. 그리운 아버지, 어머니를 뵙는 것 같아 시작한 일인데 어느새 언니, 누님이라는 호칭이 더 자연스러워졌다. 2년 전부터 급식소 살림과 함께 어르신들을 웃음으로 맞이하는 중책을 맡았다.

그 사이 남편의 병환은 더욱 깊어졌고, 10여년 전부터는 침대에서만 생활한다. 벌이가 없다보니 주변에서는 정부의 도움으로 생활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거절했다. 더 어렵고 힘든 이가 많다는 게 이유다. 알뜰살뜰 아껴 장만한 10평 아파트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다. 아무것도 없이 세상에 나왔으니 돌아갈 때도 왔을 때 모습 그대로 떠나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4년 전에는 사후 장기기증과 시신기증 서약을 했다. 결국 죽고나면 지수화풍 4대로 사라질 육신, 꼭 필요한 사람에게 보시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은 불사겠냐며 결정한 일이다. 하나 뿐인 자식에게도 꼭 그렇게 하라 통보했다.

“남편요? 가장 고맙고 감사한 분입니다. 저를 부처님 품으로 안내해 주었고, 항상 제 편이 되어주는 든든한 도반이잖아요. 불심이 깊어서인지 그저 ‘허허’ 웃을 뿐 제 결정에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어요. 어렵게 장만한 아파트를 팔 때도 그랬고, 사후 장기기증과 시신기증을 서약할 때도 그랬습니다. 꼭 그렇게 해야겠냐고 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보시라고 했더니 또 ‘허허’ 웃더라고요. 그리고 꼭 한 달 뒤, 아픈 몸이라도 필요한 곳이 있다면 자신도 그렇게 하겠노라며 사후 장기기증과 시신기증을 신청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봉사가 아닙니다. 이렇게 훌륭한 남편을 만났고, 해로할 수 있도록 가피를 내려준 부처님 은혜를 갚아가는 과정입니다.”

안 단장은 앞만 향해 내달릴 게 아니라 늘 주변을 살피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나눔은 넘치는 것을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넘치든 부족하든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실천해야 참다운 보시라는 것이다. 이 세상, 내가 주인인데 내가 행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대신하겠느냐고 반문한다. 모두가 그렇게 실천한다면 세상은 더 따뜻해지고 부처님 세상에 더 가까워질 것이고 그는 확신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려워서 잘 모릅니다. 다만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며,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배웠습니다. 다음 생에는 작은 거처를 마련해 외롭고 힘겨운 어르신들 모시고 살뜰히 모시고 싶습니다. 이번 생 이루지 못한 제 서원입니다.”

‘달은 수줍음을 타는 듯 자주 구름 속에 숨는다. 수행하는 사람도 달처럼 수줍어하며 마음을 낮추고 겸손하라. 남이 이익을 얻거나 공덕을 지을 때 자신의 일처럼 칭찬하고 기뻐하라.’ ‘잡아함경’ 속 부처님 가르침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이들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정진하는 그는 구름을 벗어난 달을 닮아 있었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281호 / 2015년 2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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