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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무상-하

동일함 좇는 집착서 벗어나 차이를 긍정하는 사유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변하는 것을 멈추게 하고, 사라져 가는 것을 붙잡으려는 이런 시도를 두고, 자유주의자라면 개인적 고통이니 개인이 감당하라고 할지도 모른다. 치유적 관점을 가진 ‘종교인’이라면, 애착과 집착이 낳는 그런 고통을 특별한 개인들의 병적 증상이니 그 애착과 집착을 내려놓으면 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반복이 동일함 규정하지만
동일함 속에는 차이가 존재
차이의 힘을 인정하는 것이
무상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

그러나 동일성의 사유, 동일성의 욕구가 산출하는 고통은 개인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필연적 무지의 또 하나의 특징을 지적해야 분명해진다. 유용성과 필연성을 갖는 이 무지는 개인적인 무지나 ‘주관적인’ 오류가 아니라, 비슷한 환경에서 살고 비슷한 말을 사용하는 이라면 대개는 공유하고 있는 집단적이고 ‘객관적인’ 무지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내가 전에 본 사람과 동일하다고 믿는 것만큼이나, 자신이 보고 있는 이 나무가 옆에 있는 이가 보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고 믿고 말하고 행동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 하고자 하는 것을 옆에 있는 이 또한 동일하게 생각하고 하고자 하기를 바란다.

이는 필연적 무지가 각자의 삶에 국한되지 않고 작용함을 뜻한다. 가령 한일전 축구시합을 하는데, 자신은 일본팀의 축구스타일이 좋다며 일본팀을 응원하고 앉아 있다면 어떻게 될까? ‘내부의 적’으로 취급될 것이고, 자칫하면 남들에게 두들겨 맞을지도 모른다. 한국인이라면 한국인의 동일성에 부합하도록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동일성의 의지가 현실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건 심지어 학교에서 반복하여 가르쳐지는 것이다. 남자들이라면 어떤 일로 울다가 “남자가 이런 일로 울면 안되지”라는 말을 듣지 않은 이 없을 것이다. 남자는 엔간해선 울면 안된다는 동일성(정체성)이 강요되는 것이다. 덕분에 남자들은 성인이 될 때 쯤이면 엔간한 일론 울지 않도록 감정이 말라버린다. 남성들의 감정적 동일성이 그렇게 만들어진다. 누군가 치마나 스타킹에 매료되어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남자가 있다면? 웃음거리가 되거나 ‘또라이’가 될 것이다.

이른바 ‘정체성’을 만들고 유지하는 힘이 종종 폭력마저 동반하며 작동하는 것이다(‘정체성’이란 ‘동일성’을 뜻하는 identity란 동일한 단어의 번역어이다). 동일성의 권력, 그것이 질서와 조화의 이름으로 강요된다. 동일화의 무지, 이는 경책되기보다는 권고되고, 억제되기보다는 조장되는 무지, 나아가 가르쳐지기고 하고 강요되기도 하는 무지다.

이는 단지 내 생각만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환(幻)이다. 함께 사는 이들의 무지가 모여 만드는 세계다. 그렇기에 내가 아니라 ‘일체유위법’이 “꿈이고 환영”이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저 근본적인 무지에 의해 만들어진 집단적 환영이요 전도된 세계다.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실상을 보지 못해 만들어진 허구적 환영이지만, 피할 수 없는 환영이고 비슷하게 사는 이들이라면 대부분 공유하고 있는 집단적 환영이다. 그래서 쉽게 깰 수 없는 꿈이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 현실적 환영이며, 개인이 벗어나는 경우에조차 그것을 압도하는 현실적인 힘을, 많은 경우 권력이나 폭력이라고 명명되는 그런 힘을 가동시키는 유력한 환영이다.

석가모니 당시에 사람들을 분류하고 주어진 동일성/정체성에 따른 직업이나 삶을 강요했던 신분적 카스트 또한 이런 동일화의 권력을 보여주는 명확한 사례다. 전생의 ‘업’으로 현생의 신분적 동일성을 정당화하고, 현생의 업을 다음생에 잇는 업과 윤회의 동일성은, 이런 동일성의 권력이 여러 생마저 관통하며 작동함을 보여준다. 반면 어떤 업도 연기적 조건에 따라 그 본성이나, 미래, 심지어 과거마저 달라질 수 있음을 설파하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현생의 찰나적 순간에조차 그런 동일성이 없음을 통해 그 권력의 작용을 정지시키는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동일화의 의지, 동일성의 포착을 겨냥하는 ‘동일성의 사유’가 현실적 힘을 갖는 집단적 허구를 만들어내고 유지한다. 차이의 사유, 차이의 철학은 이런 동일성의 사유가 가동시키는 권력과 폭력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을 중단시키고자 한다. 동일화하려는 의지에 반하여, 차이를 긍정할 것을 요구한다. 삶의 필요로 인해 동일화하는 사고를 피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 실상이 무상한 변화의 흐름만 있는 것이라면, 그 동일성 안에 차이를 새겨 넣고 그 차이가 작용하도록 해야 한다.

‘차이의 철학’을 철학사의 전면에 부각시켜낸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이를 위해 동일성이 ‘반복’에서 온 것임을 주목한다. 세상에 동일한 두 장의 나뭇잎이 없음에도 ‘은행잎’이란 말로 수많은 나뭇잎을 동일시하는 것은 어떤 특징이나 형태, 양상의 반복 때문이다. 작년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니지만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 또한 반복 때문이고, 한번도 같은 장마가 없지만, ‘장마’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어떤 현상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어떤 것에도 동일하게 반복되지 않는다. 해는 매일 반복해서 뜨지만, 오늘 뜨는 해는 어제 뜬 해, 지난달에 떴던 해와 다르다. 이런 점에서 모든 반복은 ‘차이의 반복’이다. 따라서 반복이란 차이의 다른 이름이다. 반복 안에서 차이를 의도적으로 지울 때, 동일성이 발생한다. 동일성이란 차이 없는 반복이다. 아니, 차이가 지워진 반복이다.

모든 반복 안에 사실은 차이가 숨 쉬고 있고, 모든 동일성 속엔 차이가 숨어 있다. 그 차이로 인해 동일성은 어느새 변이의 선을 타게 되고, 다른 것이 된다. 가령 ‘남성’이라고 동일하게 말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차이들이 숨어 있다. 거칠고 힘 좋은 전형적인 남성도 있지만, 섬세하고 눈물 많은 남성도 있고, 여성보단 남성을 좋아하는 남성도 있고, 여성의 옷을 더 좋아하는 남성도 있고...... ‘원래’는 ‘버젓한’ 남성이었지만, 어떤 일을 계기로 여성적인 감수성을 갖게 되고, 여성의 옷을 입기 시작하는 남성도 있다. 별의별 남성들이 있다. 남성 안에 여성성이 숨어 있고, 여성 안에도 남성성이 숨어 있다. 무상함이란 남성이란 이 동일성의 무상함이고 무력함이다. 무상함을 본다 함은 그 안에 있는 차이에 의해 분할되고 와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 동일성임을 보는 것이다.

남성적 정체성/동일성을 가르치고 강요하는 동일성의 사유는 이 모든 차이가 최소화되고 사라지도록 억누르고 억압한다. 반면 무상과 차이를 본다면, ‘남성’이란 동일성 안에 수많은 차이들이 숨어 있음을 보고, 그것들에 따라 동일한 것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는 것이다. 차이의 철학은 그런 차이화에 대해 억지로 막지 않고 열어둘 것을 요구한다. 그런 차이화에 의해 발생하는 다양성을 긍정하는 것이고, 동일성에 가두려는 권력에 대해 항의하고, 차이를 긍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필연적 무지에 의해 구성되는 피할 수 없는 허구의 세계, 업종자와 명언종자에 의해 구성되는 이 동일성의 세계에 대해, 그것이 꿈과 같은 환영이고 물거품 같은 것임을 강조하는 것은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한탄으로, 하염없는 ‘허무’의 색으로 현실을 채색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반대로 무상한 차이화를 놓치고, 모든 것의 ‘근저’에 있는 끊임없는 차이의 힘을, 변화와 생성이 만드는 열린 세계를 가리는 동일성의 환영이 무지에 의해 구성된 것임을 지적하는 것이고, 그로부터 벗어나 차이가 긍정되는 그런 세계로 들어갈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상의 실상을 놓치고 있음을 지적하는 ‘인식론적’ 관심보다는, 그 동일화하려는 의지의 다른 이름인 애착과 집착으로부터 각자의 삶을 벗어나게 하려는 ‘윤리학적’ 관심에 따른 것이다. 문제는 ‘저 사람 몸에 꽂힌 화살이 어디서 어떻게 날아온 것인가를 아는 게 아니라, 그 화살을 얼른 뽑아 치유하는 것’이란 <아함경>의 얘기가 뜻하는 게 바로 그것일 터이다. 그런데 동일화하려는 힘이 ‘진리’의 이름을 얻어 가르쳐지고 집단적으로 강요되는 지금 세계에서, 그 윤리학적 관심은 타인들, 아니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는 동일성의 권력을 정지시키고 약화시키는 ‘정치학적’ 관심을 뜻한다고 해야 한다. 이를 ‘차이의 정치학’이라고 명명하자.

석가모니가 당시 적지 않은 반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분이나 성에 개의치 않고 모든 이들을 승려로 받아들였던 것을, 심지어 앙굴리말라 같은 ‘악마적 범죄자’로 지탄 받는 이들마저 승려도 받아들였던 것을 나는 이런 의미로 이해한다. 굳이 불교라는 말에다 큰 수레를 뜻하는 ‘대승’이란 말을 다시 덧대었던 것은, 불교의 가르침이 윤리학이란 말이 빠지기 쉬운 ‘개인’이란 영역이 아니라 중생이라고 부르는 뭇사람들, 집단적인 동일성의 권력으로 인해 고통 받는 수많은 이들의 삶을 안고 가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사람이 변하고 사랑이 떠날 때는 어떠합니까?”
“마음에 부는 바람에 완전히 드러났느니라!”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83호 / 2015년 2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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