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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삼국시대 불상의 국적문제

‘고구려 역동·백제 우아·신라 소박’ 단순 구분은 통념에 불과

▲ 국보83호 반가사유상. 높이 93.5㎝. 보관의 형식에 따라 삼산관 사유상으로도 불린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삼국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들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국적문제이다. 즉, 고구려 불상인가 백제불상인가, 혹은 신라불상인가에 대한 연구이다. 과거 백제의 땅이었던 충청남도 서산이나 태안의 마애삼존불처럼 바위에 새겨진 경우는 위치를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백제불상으로 보는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일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신라의 강역이었던 경남 의령에서 발견된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은 명문에 의해 고구려 불상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동이 쉬운 금동불상은 출토지만으로 그 국적을 단언할 수 없다는 좋은 선례가 되었다.

출토 지역에 따른 판단이 기본
이동·유입 가능성도 살펴야
출처 불분명한 경우 논쟁 여지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 대표적
지속적인 국적 논의 이면에는 
양식에 따른 미묘한 논쟁 있어

예술성에 주목한 기존의 백제설
금동·석조반가상 발굴되면서  
신라 작품으로 보는 견해 정착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사지(寺址), 예를 들어 부여 정림사지에서 조그만 불상이 출토되었다면, 비록 이동의 여지가 많다고 하더라도 일단 백제 불상으로 보는데 큰 이견이 없다. 가능성으로 치자면 고구려나 신라의 사절이 백제 수도에 들렸다가 자신이 가져온 작은 불상을 정림사에 봉헌하고 돌아왔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고구려의 후예가 먼 선조의 유품인 불상을 고려시대 즈음에 경주의 사찰에 봉헌하는 스토리도 충분히 상상해봄직하다. 그럼에도 이런 소소한 가능성을 배제하고 사지 출토품일 경우 그 지역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는 이유는 그곳이 사찰이니만큼 당연히 불상이 많이 봉안되어 있었을 것이고, 설령 외부로부터 유입이 있었을지라도 당연히 그 지역에서 제작된 불상이 대다수를 차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토착의 불상 대신 유입된 불상이 발견될 가능성은 확률적으로 매우 낮다.

또 다른 이유는 현실적으로 아무리 우연적인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이론적 논의에 있어서는 우연적인 효과는 배제할 수 밖에 없는 방법적 제한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우연히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가정을 학문적 논의에 끌어들인다면 아마 밑도 끝도 없는 논쟁이 되거나 아니면 논의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미술사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는 ‘오컴(Ockham)의 면도날’을 들이댈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문제는 언제 어디서 유래되었는지를 알 수 없는 상들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다. 만약 이 작품이 오늘날 갑자기 세상에 나타난다면 그 출처를 알 수 없다는 이유로 국보는커녕 평범한 전세품으로서 떠돌아다닐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걸작 중의 걸작이지만, 사실은 1912년 이왕가 박물관(당시 관장은 스에마츠 마히코末松熊彦)이 일본인 골동상 혹은 도굴꾼으로 알려진 가지야마 요시히데(梶山義英)로부터 당시 돈 2600원(지금으로 환산하면 대략 26억원 정도라고 한다)을 주고 구입한 유물이다. 물론 당시 기술로는 이러한 수준의 금동불 위작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매우 어렵고, 제작기법이나 조형성이 삼국시대 불상의 범주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그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지만, 지금이라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간 국보 83호의 명성에 비해 그 출처는 너무나 초라한 형국이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가지야마는 이 상을 충청도 어느 산록의 석탑을 들어올리는(쉽게 말해 도굴하는) 과정에서 발견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여기에 덧붙여 지난 글에서 다룬 바 있는 일본 코류지(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은 이 83호 반가상과 쌍둥이처럼 닮았는데, 1499년 찬술된 ‘야마시로슈가도노군카도노오오이고오코류지라이유키(山城州葛野郡楓野大堰鄕廣隆寺來由記)’라는 문헌에서는 이 반가상이 백제에서 건너온 것이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이런 저런 내용들이 모여 국보 83호 반가상을 백제작으로 해석하게끔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판매자나 구입자나 모두 일본인인 상황에서 뭔가 백제작이라고 해야 더 높은 평가가 형성되는 분위기도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후 이와는 다른 증언이 확인되었는데, 국보 83호 반가상이 경주 부근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시 지난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코류지 상의 해석에 있어서 초기 문헌은 비교적 신빙성이 있지만, 후대의 백제 전래설이나 미륵상이라는 내용을 기록한 문헌에 대한 해석은 신중한 검토가 필요한데다, 이보다 신빙성 있는 오랜 기록은 신라 전래설을 기록하고 있어서 국보83호 반가상 역시 신라작이라는 설에 점차 무게를 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 같은 분위기는 1959년 충남에서 서산 마애불과 같은 백제의 걸작 불상들이 발견되면서 또 한번 변화를 맞았다. 이 불상들을 깊이 있게 연구하는 과정에서 백제 미술의 우수함이 다시금 미술사학자들을 놀라게 했기 때문이다. 반대급부로 삼국 중에서 불교를 가장 늦게 공인한 신라는 상대적으로 후진적인 문화를 가진 나라라는 이미지도 형성되었다. 황룡사탑을 만들 때 백제장인이 도와주었다거나, 불국사 석가탑을 만들 때에도 백제출신 아사달이 와서 작업했다는 설화 등은 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대변하는 증거로 흔히 제시되었다. 이에 따라 국보 83호상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6~7세기에 이 정도 예술성이 뛰어난 반가상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백제뿐이라는 이미지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 황룡사지 출토 금동반가상 보살두. 높이 8.3㎝.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하지만 다시금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1965년 경북 봉화 북지리의 마애불을 조사하던 경북대학교 조사단이 인근 사지에서 국보 83호 반가상과 매우 유사한, 하지만 돌로 조각되었고, 상반신이 결실된 하반신만의 크기만도 160㎝에 달하는 매머드급 반가상을 발굴해낸 것이다. 아울러 황룡사지 발굴 과정에서 국보 83호 반가상의 보살두와 매우 흡사한 삼산관(三山冠) 형식의 보관을 쓴 금동반가상 보살두가 발견되었으며,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의 마애반가상 역시 국보 83호 반가상과 유사하여, 이들 신라지역에 분포한 일련의 반가상들이 하나의 계보를 이루고 있음이 주목되었다.

▲ 보물997호. 봉화 북지리 출토 석조반가상. 높이 160㎝. 경북대 박물관 소장.

일본에서도 코류지 반가상을 제작한 나무가 경북 봉화 지역에 주로 서식하는 적송(赤松)임이 밝혀졌다. 이에 신라와의 연관성이 더욱 강하게 추정되면서 기존 일본에 널리 알려진 백제설 대신 신라작으로 보는 견해가 정착되었다. 이에 따라 국보 83호 반가상 역시 신라작 설에 더욱 무게를 싣게 되었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자체의 국적 논의는 그리 치열한 양상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배후에는 미묘한 양식 논쟁이 도사리고 있었다. 고구려의 역동성과 강인함, 백제의 절제미와 우아미, 신라의 추상성과 소박미라는 양식적 정의는 눈에 보이지 않게 연구자들마다 마음 한구석 강하게 품고 있는 신념 같은 것이었고, 불똥은 다른 삼국시대 금동불상 연구로 옮겨 붙기 일쑤였다. 이에 대한 신랄한 비평도 신진연구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중국 같은 넓은 대륙에서 지역마다의 특징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있겠지만, 우리나라처럼 고구려·백제·신라가 한반도 안에 인접한 가운데 각각의 양식적 특징을 구별하고 국적을 논의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반성과 비판이었다.

▲ 국보83호 반가상의 모델이 된 중국 남북조시대(북제)의 반가사유상. 6세기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러한 비판도 일리가 있었고, 사실 지금은 고구려·백제·신라 불상에 대한 양식구분 논의가 거의 사라졌지만, 국적 문제는 단지 작은 국토 안에서의 차이점 밝히기에 그치는 사안이 아니었다. 삼국의 국적문제는 빙산의 일각이었고, 그 아래 심연에는 삼국 각각의 양식이 중국 어느 지역 불상과의 교류로 인한 계통성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다시 말해 중국의 한족(漢族) 왕조인 남조(南朝)와의 교류로 인한 결과인가, 아니면 북방민족 왕조인 북조(北朝)와의 영향관계인가라는 본격적인 양식문제로 옮겨가기 직전의 전야 같은 성격을 띤 논의였던 것이다. 남북조 불상양식론으로 정의할 수 있는 이 주제는 중국불교미술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쟁점이며, 오히려 중국에서는 근래 들어 이 주제가 더욱 활발히 다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삼국시대의 불상 국적논쟁은 중국의 남조·북조 계통성을 한반도에까지 이어서 고찰하는 것이니, 실상 선학들은 상당히 일찍이 이 문제를 고민해왔던 것이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indijoo@hanmail.net


[1283호 / 2015년 2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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