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음 속에 고요한 경지 자득은 고요해지는 것 보다 더 어렵다

얼굴을 꾸며서 다른 이의 사랑을 받아야 하고 얼굴에 분을 바르면서 피부를 만지고 향내를 맡으니 흡사 정귀처럼 기괴할 뿐이다. 하는 일마다 다른 이를 위하는 것이고 내생의 부채덩어리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슬프다! 예나 지금이나 그 누가 이를 알아차리고 놀라는 사람이 있겠는가. 오직 칠원 땅에 살았던 장생만이 깊은 뜻을 조금 알아차렸다고 하겠구나.

자기 주장이 맞다 하는 것은
모두 그림자와 메아리일 뿐
그림자에 지배 당한 사람에
고요함 뜻 말해주기 어려워

부채 이야기
내가 기축년 여름날 우연히 광사를 만나서 묵의 동곽에 머물게 되었다. 글씨가 쓰여 있지 않은 부채가 하나 나왔다. 이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하고 몇 자 쓴다.

큰 불기운이 갑자기 창문 틈 사이로 흘러들어와 쇠와 돌을 녹일 지경이니 볶아지고 삶아지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아아! 어떤 사람이 만약에 나를 얻어서 지닌다면 밥 먹고 숨 쉬고 기거함에 명을 내리는 대로 따를 것이다. 청량한 즐거움이 겨드랑이에서 갑자기 생기고 찌는 듯한 더위가 피부에서 사라질 것이며 모기떼들을 휘저어서 물리칠 것이니 모기에 물리는 고통이 부채를 펼침에 없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어찌 산들바람을 몰고 다니면서 구름을 타고 육합에 노니는 경지 앞에서야 자랑할 수 있겠는가. 슬프다. 서늘한 바람이 한번 불어오면 갑자기 버림을 당하고 서리와 이슬이라도 내릴라 치면 아예 쓸모없는 물건처럼 사람들이 바라본다. 이것이 어찌 일을 하면서도 자기가 한다는 생각이 없고,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한 것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으랴.

고요함에 대하여
고요해진다고 말하기는 쉬워도 고요해지기는 어려우며 마음속에 고요한 경지를 자득하는 것은 고요해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시끌벅적한 세상일이야 시끄러운 소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옛날의 호걸스러운 선비들은 세상에 나아가고 세상에서 물러남에 행동으로 나타내고 마음은 감추었으니 진실로 절개를 지킨 자취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저 슈퍼맨의 안목을 갖추지 않고서야 어떻게 완전하게 꿰뚫어 비추어 보겠으며 또 어떻게 그 모습을 형용이나 해볼 수 있겠는가.
아아! 초나라의 광사가 길을 가다가 중니에게 노래를 부르고 허유가 요임금과 순임금에게 고개를 가로저은 것이 마땅하다 하겠구나.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어찌 이 두 사람이 옳고 저 세 사람의 성인은 그르다고 하겠는가. 옳다고 여기는 것은 각자 옳다고 여기는 것을 옳다고 여길 뿐이다. 따라서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맞다고 하는 것은 대도에서 보면 다 그림자와 메아리일 뿐이다. 그림자와 메아리에 지배를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고요함의 뜻을 말해주기가 어렵다. 도를 지향하는 군자는 한발 물러서서 푹 쉴지어다.

담지에게 성심을 말해줌
마음이 진실하지 않으면 밝아질 수 없고, 성품이 고요하지 않으면 안정될 수 없고, 정기가 모이지 않으면 완전해질 수 없고, 정신이 집중되지 않으면 한가로울 수 없고, 뜻이 한결같지 않으면 돈독해질 수 없고, 기운을 기르지 않으면 조화를 이룰 수 없고, 분을 다스리지 않으면 평정상태를 유지할 수 없고, 욕심을 막지 않으면 욕심을 줄일 수 없고, 배움에 논강을 하지 않으면 배움이 넓어질 수 없고, 문제의식이 투철하지 않으면 통달할 수 없고, 절개를 세우지 않으면 견고할 수 없고, 지조를 지키지 않으면 굳셀 수 없다.
그러므로 군자의 배움은 사람들이 가볍게 여기는 것을 중시하는데 있으며, 사람들이 덜어내는 것을 더 늘리는 데에 있으며, 사람들이 버리는 것을 취하는 데에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없는 것을 체득하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도덕이 크고 넓어지며 몸가짐이 여유롭고 명예가 귀해진다. 그리하여 초연하게 되니 대적할 자가 없어지는 것이다.

박상준 고전연구실 ‘뿌리와 꽃’ 원장 kibasan@hanmail.net


[1283호 / 2015년 2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