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오대산 진여원의 숲
4. 오대산 진여원의 숲
  • 전영우 교수
  • 승인 2015.03.02 15: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패지로부터 시작된 사찰림 기원 밝히는 증거

▲ 진여원 터(오늘날의 상원사)에서 바라본 오대산의 겨울 전나무 숲.

건봉사(乾鳳寺) 재금강산남(在金剛山南), 해인사 재가야산(在伽倻山), 전등사 재길상산(在吉祥山), 조선 초(15세기 후반)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의 지역별 불우(佛宇: 사찰)항목에는 하나 같이 사찰의 소재지를 ‘在OO山’과 같이 산을 중심으로 밝히고 있다. 신라 최초의 가람 흥륜사는 도읍의 숲(천경림)에서 시작되었는데, 어떻게 가람이 산중으로 갔을까?

산지가람이 본격 도입된
나말여초에 사찰림 시작

선종 도입·풍수지리설도
사찰림 형성에 큰 영향

삼국유사에 진여원 기록
국가 내린 사패지서 비롯


학계에서는 시대에 따라 사찰의 창건 장소가 도읍(삼국시대)에서 구릉(통일신라신대)으로, 다시 산지(나말여초)로 변천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불교 전래 초기의 삼국시대 사찰은 호국불교 또는 왕족 중심의 불교적 특성 때문에 왕실과 가까운 평지(平地)에 자리 잡았다. 신라의 경우 경주에 자리 잡은 황룡사, 분황사, 황복사 등이 평지사찰이다. 도심 또는 왕궁과 가까운 곳에 설립된 평지가람의 사찰림은 아쉽게도 그 크기가 공간적 제약으로 협소할 수밖에 없다. 경주의 영묘사나 황룡사, 부여의 정림사가 습지나 못을 메워 지은 사찰임을 상기할 때, 몇백ha(헥타르)나 몇천ha의 넓은 사찰림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사찰림의 기원이나 형태는 평지가람보다 오히려 산지가람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통일신라 후기부터 살펴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가람은 통일신라 말기에 도입된 선종(禪宗)이나 고려시대 도선(道詵)의 풍수지리설에 영향을 받아 경치가 아름다운 산중에 자리를 잡았다. 그 흔적은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에도 남아 있다. ‘훈요십조’의 두 번째 조항은 “사찰은 도선국사가 산수의 순역을 보아 추점해서 정한 것이니 함부로 다른 곳에 창건치 마라”이다.

오늘날 명산대찰의 전통사찰들이 빼어나게 경치가 아름다운 산중[勝地]에 자리 잡은 배경에는 이처럼 풍수지리설에 따라 산수의 순역에 자리 잡게 한 도선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수행자는 아름다운 경치만으로는 수도생활을 꾸려갈 수 없다. 수행자도 사람인 이상 먹어야 하고 또 추위를 이겨내야 했기에 승지(勝地)의 조건에 숲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숲은 땔감의 조달처였고, 숲이 울창한 계곡이나 개울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가람의 이런 장소를 고려의 문신 이규보나 이인로는 ‘계산유승(溪山幽勝)’, ‘산수청유지지(山水淸幽之地)’, ‘산기수이(山奇水異)’, ‘기산침수(倚山枕水)’로 서술하였다. 결국 수도자의 거주지는 청정무진(淸淨無塵)한 산과 계곡의 울창한 숲이었고, 그래서 경치가 아름다운 곳[勝地]일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 정족산성과 숲으로 둘러싸인 전등사.

우리가 오늘날 즐겨 찾는 아름다운 산중의 사찰 숲은 이처럼 선종과 풍수지리설의 영향 덕분에 형성되었다. 현재 한국 산림의 약 1%에 달하는 6만3천ha의 사찰림 형성과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숲과 산의 관계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숲은 순수한 우리말로, 그 원형 수ㅎ은 조선 초기(15세기 중반)에 간행된 ‘월인석보’나 ‘석보상절’에 나타난다. 그 후 숩ㅎ, 수플, 숩플로 쓰이다가 오늘날의 숲이 되었다. 숲을 나타내는 한자어로는 지난 회에 살펴본 임(林), 수(藪)도 있다. 수풀 ‘임’은 임지(林地), 임야(林野)와 함께 사용되었다. 숲 ‘수’는 지역에 따라 ‘쑤’ 또는 ‘쏘’라고도 불렸는데, 생활환경을 보호하던 숲(방호림, 방풍림, 방수림)을 일컫는 데 주로 사용되었고, 수풀 ‘임’과 더불어 신라시대의 기록에도 나타나고 있다.

숲과 산의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는 ‘산림’이다.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 우리는 숲을 산림(山林)으로 대치하여 사용하지만, 중국이나 일본은 삼림(森林)이라 한다. 왜 우리는 산림이라고 할까? 우리 조상들은 숲이 산이 있다고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인식 덕분에 숲을 다루는 국가의 부서명이 우리는 ‘산림청’인데 일본은 ‘임야청’, 중국은 ‘임업부’다.

비록 오늘날 ‘삼림’이란 용어가 학술적·기술적 용어로 ‘산림’과 함께 혼용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삼림’이란 용어가 없었다. 삼림이란 용어는 일제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1908년부터 40여년 동안 행정적 용어로 이 땅에서 사용되었다. 더 정확하게 1904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대한제국과 제정러시아 간에 1896년에 맺었던 ‘한·러산림협동조약’을 폐기하고, ‘한·일 압록강 두만강 삼림협동조약’을 체결했을 때부터 이 땅에 등장했다. 반면 ‘산림’이라는 용어는 ‘삼국유사’를 통해서 신라시대 이래로 사용되었다. ‘산림’이 숲을 나타내는 보다 주체적인 용어임을 알려주는 또 다른 사례는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실록에는 숲을 나타내는 다양한 용례의 ‘산림’이 기록되어있지만 ‘삼림’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숲은 평지에도 있고, 강가에도 있고, 마을 주변에도 있는데, 우리 조상들은 왜 숲을 산에 있는 것으로 인식했을까? 만년설이 덮인 고산준령이나 수목한계선이 없는 우리 실정에서, 숲이 없는 산을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산의 숲[山林]은 지극히 당연했다. 반면 평지의 숲은 귀했다. 농경사회의 특성상 사람들이 밀집해 사는 주거지 주변의 평지는 대부분 경작지로 활용될 수밖에 없었다. 먹여야 할 입(식구)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경작지는 더 필요했고, 그 결과 인가 주변 평탄지의 숲은 경작지로 바뀌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평지에 숲이 많지 않은 이유로 이처럼 높은 인구밀도와 한정된 경작지에서 찾기도 한다. 숲은 그래서 산에 있는 것이 당연했고, 그런 인식이 숲을 산림으로 표기하게끔 이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전등사는 15세기 후반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 강화도호부 ‘불우’ 항에 정족산(220m)보다 더 높은 남쪽의 ‘길상산’(336m)에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산과 숲의 관계를 살펴보았으니 다음은 오늘날과 같은 사찰 숲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순서다. 현재와 같은 산중 사찰림의 기원과 형성과정을 확인하고자 여러 문헌을 훑었지만, 노력의 부족으로 직접적인 관련 자료를 찾지 못했다. 대신에 산중 사찰림의 기원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을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있었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 조에 따르면, “오대산에서 수행하던 효명이 왕으로 즉위한 지 몇 해가 지난 신룡 원년(705년, 성덕왕 4년) 진여원(眞如院)을 개창하고, 왕이 친히 백료를 거느리고 오대산에 와서 전당을 만들어 열고 문수보살상을 흙으로 빚어 건물 안에 안치하였다. 공양할 비용은 매해 봄가을에 산에서 가까운 주, 현의 창에서 조 100석과 정유(凈油) 1섬씩 공급하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진여원에서 서쪽으로 6000보 떨어진 곳으로부터 모니점과 고이현(古伊峴) 바깥에 이르기까지의 시지(柴地)15결(結), 밤나무 숲 6결, 전답 2결에 처음으로 장사(壯舍)를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산림학자의 입장에선 진여원(오늘날의 상원사)의 기록 중, 땔감용 산판[柴地]과 밤나무 숲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국왕이 진여원에서 6000보(약 10km) 떨어진 모니점과 고이현 일대에 땔나무 산판 15결(약 23ha)과 밤나무 숲 6결(9ha)을 하사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산중 사찰림의 기원과 형성과정을 밝히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모니점과 고이현의 현 위치를 파악할 수 없는 점이 아쉽지만, 진여원의 기록을 통해서 1300여년 전 국왕(국가)은 사찰을 창건할 경우, 사찰 운영에 필요한 식량은 물론이고 땔감 조달용 산림도 함께 하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의 ‘진여원’ 기록은 ‘조계산송광사사고’ 산림부의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산림부에는 “절을 창건할 때 땅을 나누어받는 것은 신라 때부터 존숭되어 온 것(策剏寺封疆羅代之尊崇也)”이라고 밝히고 있다. 비록 한정된 내용이지만 이들 기록을 통해 사찰 숲[柴地]도 사찰 전답[寺院田]과 마찬가지로 사찰의 창건과 함께 삼국시대부터 국가에서 하사받은 사패지(賜牌地)에서 유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상원사를 말사로 거느리고 있는 월정사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사찰림 5782ha를 보유하고 있다. 이 숲을 평(坪)수로 환산하면 1734만평이다. 언론에서 흔히 사용하는 ‘여의도 면적(2.9㎢)’이나 ‘축구장 면적(0.75ha)’을 대입하면 ‘여의도의 약 20배’나 ‘축구장 7700개’가 되는 엄청난 넓이다. 1300여년 전 오대산 진여원의 땔감과 밤나무 숲 32ha는 오늘날 나라 제일의 사찰림으로 변했다. 월정사는 어떻게 나라 제일의 사찰 숲을 보유하게 되었을까?

전영우 국민대 산림환경시스템학과 교수  


[1284호 / 2015년 3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