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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공병수 부산불교신도회장

“불연으로 맺은 인연공덕 서로 비추며 세상 밝혀야죠”

▲ 공병수 회장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서로 화합하며 상대를 부처님으로 대한다면 인생이 어찌 행복하지 않겠느냐”며 “모두가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바로 그곳이 불국토”라고 말했다.

여명(黎明)이 여전하다. 동트기 전 잠결인 듯 꿈결인 듯 종소리가 아득했다. 어머니 품처럼 늘 편안했던 하동 고향집에서 맞이한 새벽이었지만 이날은 달랐다. 20살 청년은 여명 속에 이어지는 종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새 마음도 기울였다. 순간 편안해졌다. 불안한 미래도, 앙금처럼 남아있던 고민도 사라졌다. 종소리는 더 없이 청명하고 고요했다. 그 소리를 좇아가니 가슴을 짓눌렀던 돌덩이가 사라졌다. 청년은 어머니께 잠시 절에 다녀오겠다며 길을 나섰다. 춘궁기, 가족의 생명을 근근이 이어갈 수 있는 끼닛거리조차 구하기 어려운 시절 어머니는 쌀 한 자루를 선뜻 내주었다. 청년은 곧장 쌍계사로 향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었다. 무엇을 해야할 지 몰라 절 마당을 서성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 스님이 합장 인사한 뒤 도량을 소개하고 방사로 안내했다. 방에는 스님 네 분이 쉬고 있었다. 스님들은 설악산에서 공부하다 지리산으로 만행을 왔댔다. 스님들 가는 길 동행해도 될지 물었다. 스님들은 상관없다 했다. 청년은 스님들을 따라 나섰다. 꼭 한 달 간 스님들과 지리산 산사를 순례했다. 결코 짧은 않은 기간의 순례와 절 생활, 청년의 마음엔 이제 온전히 부처님 한 분이 봉안되어 있었다. 이미 마음엔 불심이 싹을 틔웠고 움직이지 않게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차가운 새벽공기에 깨어나 예불을 모시고 스님들과 운력을 함께 하며 내려놓는 마음을 배웠다. 공양을 하며 인연으로 빚은 공덕을 이해했고, 나눔과 비움의 가치를 가슴에 담았다. 스님들의 단출한 살림살이에선 담백한 무소유를 맛봤다.

20살 종소리 좇다 부처님법과 인연
40여년 간 부산 재가불자들 이끌어
거사림 비롯 신도단체 회장 등 맡아

불교미래 위한 인재불사 발원 실천
불연 맺어준 인연들 곳곳에서 활동
이제는 후원자로 희망 나눔에 동참

공병수(78·래산) 부산불교신도회장은 초발심 당시 ‘청년 공병수’에 대한 그리움을 담담히 들려주었다. 어느새 머리엔 하얀 서리가 내리고 얼굴엔 깊은 주름이 생겨났지만 부처님 법 만났을 때의 환희와 감동은 청년시절과 다를 바 없이 뜨겁고 성성했다. 그래서일까. 공 회장의 부처님을 향한 지극한 마음과 정성은 ‘청년 공병수’를 보는 듯 생기롭다. 이젠 재가 원로로서 한 발 물러나 지켜보고 격려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건만 포교와 전법을 위한 일이라면 여전히 마음보다 발이 앞선다.

현재 그는 부산불교거사림 회장이고, 부산불교신도회 회장이다. 또 재가불자교육도량 로터스불교대학의 학장이며, 부산대·동아대 로스쿨 불자모임 지도법사도 맡고 있다. 부산불교를 말하면서 ‘공·병·수’ 이름 석 자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지치고 버거울 수도 있지만 포교와 인재불사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는다. 금강 같은 신심이 없다면 결코 이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없었을 터. 때론 내려놓고 싶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인재불사가 있어야 내일의 희망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공 회장에 대한 평가는 출재가를 가릴 것 없이 한결같다. “자상한 아버지 같은 존재”, 바로 그것이다.

지리산 칠불사 주지 도응 스님은 “승속을 떠나 존경받아 마땅하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공 회장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불자가 됐고 실천하는 불자의 삶을 살아왔기에 ‘제일’이란 의미다. 그러면서 “공 회장이 바로 우리시대 유마거사”라며 웃었다. 류진수 전 부산불교신도회장은 “선지식에게 배운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곧게 실천하면서 후배들에게 가르치고 있으니 보배가 아닐 수 없다”고 했다. 류 회장의 말처럼 공 회장의 인재불사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천수천안(千手千眼)에 비견된다. 정관계를 비롯해 재계에 이르기까지 현재 활동 중인 수많은 불자 지도자들이 공 회장의 지원을 받았다.

방황하던 청년기, 부처님과의 인연이 운명처럼 찾아왔듯이 공 회장과 부산불교와의 인연도 꼭 그랬다. 1972년 “부처님오신날을 공휴일로 지정해야 한다”는 불자들의 서명운동이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부산 불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찰별로 서명운동을 전개하기는 했으나 더 많은 동참을 이끌어내기 위해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다. 그렇게 기획된 것이 백봉 김기추 거사의 ‘금강경’ 강의였다. 당시 백봉 거사는 ‘금강경’의 오묘한 이치에 통달해 득오(得悟)의 경지에 이른 재가도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예상대로 백봉 거사의 강의는 대성황을 이뤘고 서명운동도 큰 성과를 이루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불교운동이 태동하는 계기가 됐다. ‘금강경’ 강의를 들은 불자들 사이에선 ‘거사불교운동’을 위한 신행단체 결성의 뜻이 결집됐다. 그리고 1972년 7월 300여명의 거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부산불교거사림’이 창립됐다. 공 회장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김석배 초대회장을 비롯해 이인희, 임채수, 강상호 회장 등 수많은 재가 인재를 배출한 부산불교거사림은 지난 40여년간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신행단체로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금강경’ 공부모임은 ‘금강경’ 독송회로 이어졌고 창립과 함께 매월 둘째·넷째 화요일 법회를 열었습니다. 거사림 활동을 알리는 동시에 정법수행의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부처님 법을 바르게 배우고 실천하는 자리가 필요하다는 게 전체 거사들의 의견이었어요. 화요법회는 지난 2월10일 제961회를 맞았고, 한때 1000명이 운집할 만큼 호응이 대단했지요. 전국의 내로라하는 스님들 가운데 화요법회 법석에 오르지 않은 분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거사림의 한 명이었던 그는 곧 미래 거사림을 이끌 동량으로 주목받았다. 그의 깊은 신심과 성실함을 눈여겨본 이인희 회장이 그를 후임자로 점찍었다. 공 회장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거사림 활동에 함께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게 좋았고 그 가르침을 더불어 나누는 게 즐거웠다. 더욱이 화요법회에 몰려드는 청소년과 대학생들은 그에게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불교의 미래를 위한 인재불사 원력을 세운 것도 바로 이 즈음이다.

“치마불교다 기복불교다 하면서 비판만 할 게 아니라 희망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남성 불자들 역시 포교와 수행에 적극 동참하자는 의미로 거사불교와 정법불교 운동을 펼치게 된 것이죠. 부산불교에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자는 취지에 공감해 시작한 것이 바로 거사림입니다. 그런데 문득 불교의 앞날은 인재불사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 많은 청년들에게 불심을 심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동아대 지독료(志篤寮) 학생들을 지원하는 불사였습니다. 지독료는 행정고시나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한 일종의 기숙사입니다. 향후 우리사회를 이끌어갈 미래의 인재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후원한다면 분명 불교계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지독료 후원, 거사림의 지지와 동참이 없었다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인재불사의 첫 단추는 그렇게 꿰어졌다. 두 번째 단추는 군장병들을 불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불교의 미래를 열어갈 청년인재가 상아탑 속에만 존재할리 없었을 것. 어느날 군사분계선에 위치한 법당을 우연히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곳에는 법회를 볼 법당도, 예경을 올릴 부처님도, 법문을 할 법사도 분명 존재하는데 정작 주인공인 장병들이 없었다. 교회와 성당에서는 먹을 것이 풍족한데 법당은 그렇질 못해 장병들이 찾지 않는다는 설명에 큰 충격 받았다. 그가 두 번째 인재불사로 군법당 지원을 선택한 이유다.

 
불교의 미래를 위한 불사는 세월이 갈수록 더욱 확대됐고 세심해졌다. 부산 재가불자들의 숙원인 부산불교신도회관이 2007년 개관하자 가장 먼저 불교대학 및 최고지도자아카데미 개설을 추진했다. 또 선지식 릴레이법회, 힐링콘서트, 시민강연회 등을 마련해 불자인재 양성과 정법수행을 위한 풍토를 단단히 했다. 뿐만 아니라 법학전문대학원 로스쿨이 시행되자 지역의 사학인 부산대와 동아대 로스쿨 불자회를 결성하고 지원했다. 포교의 핵심은 인재불사이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는 교육이 선행돼야 한다는 신념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저 역시 네 분 스님의 인연으로 불연을 맺었으니 그러한 공덕을 더 많은 이에게 회향하고 싶었습니다. 백봉 거사님으로 인해 불법의 참 맛을 알게 됐으며 이인희 회장님으로부터 인재불사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젊은 시절 인간문화재이자 초대 국립국악원장을 지내신 고 이주환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잠시 예인의 길을 걷기도 했지요.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중도에 포기하고 방황하는 저를 붙잡아 준 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앞뒤 분간 못하고 헤맬 때 불법을 만나 시련을 이겨내고 나름대로 꽃까지 피웠으니 불자라면 당연히 보답해야죠.”

그와의 인연으로 불연을 맺은 많은 이들이 출가자로, 각급 기관 및 단체의 지도자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공 회장이 하는 일을 든든하게 후원하고 있다. 희망과 긍정을 나누고 세상을 밝히는 ‘상생의 인드라망’은 그렇게 완성돼 가고 있다.

“세상만사가 한 잔의 차와 같습니다. 쓰기도, 달기도, 시기도, 짜기도, 떫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결국 하나의 맛입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서로 화합하며 상대를 부처님으로 대한다면 인생이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바로 그곳이 불국토일 것입니다.”

부처님은 전도선언에서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길을 가라”고 했다. 공병수 회장의 오늘 역시 이와 같다. 청년들 가슴에 자비의 씨앗을 심었으니 내일 역시 가을날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는 농부의 마음처럼 지극할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담긴 자비가 또 다른 이에게 전이되어 ‘우리의 자비’가 되기를 쉼 없이 발원하고 실천한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284호 / 2015년 3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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