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8. 서울 원각사 십층석탑

기자명 신대현

화려함·절제미 환상적인 조화…한국 탑 건축 사상 으뜸 걸작

▲ 원각사지십층석탑.

화려와 절제는 미술 표현의 두 축이다. 화려함은 미술의 원초적 목적인 장식과 꾸밈을 위한 필수적인 외연(外延)이고, 절제는 고양된 미의식의 고상한 침묵이다. 화려하기만 해서는 산만해지기 쉽다. 반대로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 절제만 한다면 그건 철학이지 미술은 아니다. 이 둘이 조화를 이루어야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한다. 불교미술에도 기본적으로 화려와 절제의 조화가 필수다. 우리 불교미술은 선종의 영향으로 적어도 고려시대 이후로는 절제라는 측면이 조금이라도 더 강조된 편이다. 그중에도 탑은 늘 절제의 미가 최고덕목으로 간주되었던 분야다.

3단으로 조성된 기단 이례적
대리석 특성으로 ‘백탑’지칭
각 층·면마다 다채로운 장식
화려함 극대화한 고난도 기법

경천사 십층석탑과 닮은 꼴
모방을 뛰어넘는 예술성 인정
18세기 실학파 명사들 모임도

하지만 예외가 있으니 이를테면 원각사 십층석탑으로, 화려와 장엄 그 자체라 할 만큼 보기 드문 드라마틱한 모습을 보여준다.

종로 2가 탑골공원은 서울 중심지 한복판이다. 여기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탑 중 하나가 서있다. 10층에다 높이도 12m니 석탑으로서 꽤 큰 편이다. 지금은 주변에 워낙 높은 빌딩들이 많아서 실감나지 않지만 처음 세워졌을 때는 나지막한 담장들 너머로 백의(白衣)를 입은 듯 허연 모습이 홀로 우뚝했을 테니 대단한 장관이자 장안의 명물이었을 것이다. 이곳은 본래 수만 명이 함께 모여 법회를 열만큼 널찍했던 원각사(圓覺寺)가 들어서있었고, 드넓은 가람의 중심에 이 탑이 자리했었다.

원각사는 1464년 세조의 발원으로 창건되었는데 당시 왕의 큰아버지 효령대군을 비롯해 여러 종친들이 참여했고 또 공사 책임도 영의정 신숙주, 좌의정 구치관 같은 고관이 맡을 정도로 사격이 컸다. 도성 내의 3대사찰로 불리며 번성했으나 1504년 폐사된 이후 줄곧 빈터로 남았다. 절터는 1895년에 최초의 근대식 공원인 파고다공원이 되었는데 공원 이름은 말할 것도 없이 이 석탑으로 인해 붙여졌다. 얼마 안 있어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무대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고, 1991년 동네 이름을 따서 탑골공원으로 바뀌었다. 원각사 십층석탑은 창건 2년 만에 완성되었다. 법당 안의 불상에서 나온 분신(分身)사리와 당시 창제된 지 얼마 안 된 한글로 번역한 ‘원각경’을 탑 안에 봉안하고 성대한 연등회를 베풀며 낙성식을 가졌다.

▲ 원각사탑 세부 모습.

탑은 보통 밑에서부터 기단·탑신·상륜 등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해서 보면 이해하기 좋다. 원각사 탑도 마찬가지로 다만 기단이 3층으로 이루어진 게 특색이다. 석탑의 기단은 삼국시대에 1단이었다가 통일신라 이후 2단으로 굳어졌는데 이렇게 3단으로 된 기단은 아주 드물다. 기단과 탑신은 본래 모양에서 큰 차이가 없는데 크기마저 엇비슷하면 둘을 혼동하기 쉽다. 그래서 층수를 따질 때 기단과 탑신을 합해서 잘못 세는 경우도 많다. 이 탑을 간혹 13층이라고 적은 것도 기단과 탑신을 구분하지 않고 보았기 때문이다.

상륜부는 원 모습이 남아 있지 않고 오랜 세월을 지내오는 동안 부분적으로 분리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대리석 재질은 윤택한 느낌은 좋지만 화강암보다 약해서 풍화에 특히 취약하다. 이 탑도 훼손이 심해 근래 보수를 마친 뒤 사방을 거대한 유리로 덮어 보호하고 있어 가까이 볼 수 없는 게 아쉽다.

이 탑의 기단을 설명할 때 흔히 ‘아자형’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기단 모양이 ‘亞’자처럼 생겼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위에서 볼 때 그렇다는 얘기로, 공중에서 내려다보지 않는 한 이런 모습을 직접 확인하기는 어렵다. 사람들이 편하게 볼 수 있는 방향과 각도로 보면 한 면석(面石)에 덧대어 두 단이 옆으로 꺾여서 물러앉은 모습이다. 이렇게 해서 나오는 각 층의 면수(面數)는 모두 20면이나 되고, 각 면마다 다종다양한 장식과 조각이 담겨있다. 이런 형태를 만드는 것 자체가 어렵고 또 나중에 조립할 때도 고난이도의 기법이 요구되지만 그만큼 화려함을 극대화 해주는 효과가 있다.

화려함으로 말하자면 원각사 탑과 쌍벽을 이루는 불국사의 다보탑 기단도 이런 구성이다. 무늬장식으로 가장 보편적인 연화·초화가 베풀어진 것은 당연하고, 용이나 사자 같은 상서로운 동물도 곳곳에 보인다. 여기에다 영산회상 같은 각종 경전에 나오는 여러 불보살들의 회상도와 변상도(變相圖)를 방불케 하는 장면들도 나온다. 예를 들어 1층 기단은 용·사자·연화무늬 등으로 장식했는데 이는 곧 사자좌(獅子座)나 용상(龍床) 등과 같이 대좌(臺座)의 개념을 갖고 있어서다. 그래서 이 1층을 본 사람은 위에 있는 2층에는 무엇이 있을까 기대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올린다.

▲ 3층 기단에 새겨진 ‘서유기’문양.

2층 기단에는 스님을 중심으로 원숭이와 돼지 그리고 험상궂은 짐승 얼굴을 한 세 명이 등장한다. 다름 아닌 소설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현장법사·손오공·저팔계·사오정이다. 현장법사가 세 제자와 함께 경전을 구하러 인도에 갔다 돌아오면서 겪은 모험과 감동의 장면들을 모두 20회의 화면에 나뉘어 묘사한 것이다. 찬찬히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극적이고 재미가 있다.

3층 기단의 각 면에는 본생경변(本生經變) 또는 불전변(佛傳變)을 묘사한 조각이 주를 이룬다. 본생경변이란 부처님이 전생에 행한 6도(六度)의 행업을 설화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불전은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가지 모습으로 나누어 나타낸 것으로 8상(八相)이라고도 한다.

탑신은 전제 10층 중 1~3층은 기단부와 마찬가지로 20면의 면석으로 구성되었지만 나머지 4~10층은 갑자기 4각 4면으로 바뀐다. 음악으로 표현하자면 마치 변주곡을 듣는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을 준다. 이런 변화는 시각적 효과도 고려한 것이고 또 무엇보다 전자와 후자가 서로 다른 세계임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우선 1~3층을 살펴보면, 각 층의 면석에 장식된 조각들은 우리나라에 전해진 불교의 여러 사상체계를 상징한다.

1층의 사방에는 삼세불회·영산회·용화회·미타회의 4회를, 2층 탑신에는 화엄회·원각회·법화회·다보회의 4회를, 3층에는 소재회(消災會)·전단서상회(旃檀瑞像會)·능엄회·약사회의 4회를 각각 표현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말하면 1~3층은 현세불(現世佛)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4~10층은 의장이 확 달라지는데 이 중에서도 4층은 3층 이하와  5층 이상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여기에 새겨진 ‘원통회(圓通會)’는 관음정토, ‘지장회(地藏會)’는 지장신앙을 상징하는 글자로 이곳이 바로 보살의 세계임을 말해준다.

5층 이상에는 각종 여래상이 조각되었는데 모두 과거불로서 권속을 거느리지 않은 독존의 모습을 하고 있다. 현세불(1~3층)과 과거불(5~10층)들은 각각 서로 다른 시간 속에 있기에 각과 면에 변화를 준 것이고, 그 사이(4층)를 보살의 세계로 장엄한 것도 과거불에서 현재불로의 이행은 보살의 세계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섬세한 고려이고 정교한 배치인가.

원각사 탑은 종종 경천사 십층석탑과 비교된다. 경천사 탑은 황해도 개풍 경천사지에 있었으나 1909년 일본으로 불법 반출되었다가 반환되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데, 곧잘 이 둘을 착각할 정도로 모습이 비슷하다. 층수는 물론이고 각층마다 불보살상을 새겨 회상(會上)을 표현한 것도 똑같은 디자인이라고 할 만하다. 경천사 탑은 고려 말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둘 사이에 시간차도 많이 나지 않는다.

10층이라는 층수나 화강암이 아니라 대리석을 썼다는 점도 우리나라 석탑에서 흔하지 않은 일로 역시 서로 닮은꼴이다. 물론 맨 꼭대기 부분의 형식이 조금 다르고 탑신에 새겨진 인물과 초화의 표현 등에서 약간 변화가 있지만, 처음부터 똑같이 만들려고 한 것도 아닐 텐데 이 정도 차이는 다름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경천사 탑을 모델로 해서 원각사 탑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렇다면 두 가지 아주 비슷한 탑이 있을 때 먼저 만든 탑이 문화재적으로 더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우리나라 불교미술사 이론을 처음 정립한 우현 고유섭(高裕燮)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비록 모방하였으나 전체적으로 형태가 잘 정제되어 있고 의장(意匠)이 교묘하며 수법이 세련된 점에서 같은 시대 다른 나라의 작품이 능히 견주지 못할 만한 기술을 남겼다. 이는 실로 한국 탑파 건축미술 사상 으뜸가는 걸작이라 할 것이다.”
모방하였으되 원작보다 뛰어난 예술적 성취를 이뤄냈다면 이는 결국 창조인 셈이다. 더군다나 동시대 다른 나라 작품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니 미술사에 우뚝한 걸작인 바에야. 이제 조금은 진부하게 들리는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이 이만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거기에다 신륵사 다층전탑 같은 또 다른 명작에도 영향을 주었으니 분명 그 자체로 중요한 아이템이었을 것이다.

원각사 십층석탑은 대리석이라 유난히 하얘보인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이 탑을 ‘백탑(白塔)’으로도 불렀다. 조선 후기 탑골 부근의 풍경을 그린 ‘탑동연첩(塔洞連帖)’이 최근 공개되었는데 화면 한쪽에 마치 수척한 백면서생처럼 가늘고 하얀 모습을 한 탑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사실 이 원각사 탑은 미술사 외로도 큰 의미가 있다. 특히 18세기 실학파의 맏형 격인 박지원을 비롯해서 이덕무·유득공·서상수·홍대용·박제가·백동수 등 당대의 쟁쟁한 명사 문인들이 이 탑 앞에서 잦은 모임을 가졌다. 사람들은 이들을 ‘백탑 주변에서 모이는 사람들’이라는 뜻인 ‘백탑지사(白塔之士)’ 혹은 ‘백탑파’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이 탑은 관습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갈구하던 이들의 문화 공간 역할을 한 것이고 그들의 혁신의 움직임이 바로 이 탑 앞에서 이뤄졌던 것이다. 혹시 이들은 이 탑을 바라보면서 실학으로 사람들을 제도하려는 희망을 다짐한 게 아닐까.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1284호 / 2015년 3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