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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무아-상

주어진 조건 따라 다르니 어떤 것이 ‘나’인가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카게(影)’란 일본어로, 그림자란 뜻이다. ‘카게무샤’란 말은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때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적들의 정탐에 대처하기 위해 비슷하게 생긴 사람으로 성주와 같은 중요한 이를 대신하게 하는 ‘무사’를 뜻한다. 구로자와의 영화 ‘카게무샤’는 전국시대 유명한 가문의 성주인 다카다 신겐의 카게무샤가 되어 살았던 한 도둑을 둘러싼 얘기를 다룬다. 자신의 죽음이 알려지면 적의 공격에 가문이 몰락할 것을 예감한 다케다 신겐은 3년간 자신의 죽음을 감추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러나 적의 정탐이 있을 것이기에, 그들을 속이려면 자기 일족들을 먼저 속여야 했다. 다케다 신겐의 동생은 극비리에 신겐을 빼닮은 도둑을 하나 데려다 설득해 죽은 형의 카게무샤 역을 하게 한다. 처음엔 싫다고 거부하던 그 도둑은 어쩔 수 없이 시작하게 되는데, 어느덧 신겐의 역할에 몰입하게 된다. 가족들마저 속일 수 있었지만, 다케다가 타던 말은 속일 수 없었기에 가짜임이 드러난다. 결국 적들마저 알게 되어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의 공략으로 결국 가문은 몰락한다. 그런데 카게무샤 역을 그렇게 끝내고 나온 이 도둑은, 자신이 신겐이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다케다 가문이 몰락하는 마지막 전투에 스스로 뛰어 들어가, 그 패배를 지켜보며 마치 자신이 패하고 몰락하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눈물을 흘린다.

집에선 착한 아빠이지만
피의자 앞에선 고문경찰
진정한 자아란 애초없고
외부환경에 따라 달라져

누가 보는 것도 아니고, 실제 다케다 가문과 아무 관련이 없었음에도 다케다 일족의 몰락에 고통스레 흘리는 이 눈물은 누구의 눈물일까? 우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 그가 애초의 ‘도둑’이라면, 그처럼 진심으로 눈물을 흘릴 이유가 없다. 애초에 그는 카게가 되길 거부하기조차 했으니 이 고통의 ‘주체’일 리 없기 때문이다. 그 눈물은 분명 다케다가 있었다면 흘렸을 눈물이다. 그러나 우는 이 사람은 처음부터 명시했듯이 다케다가 아니다. 그는 이미 죽었으니까.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저 사람이 ‘나’라고 스스로를 칭할 때, 그 ‘나’는 대체 누구일까? 이게 아마 그 영화를 통해 구로자와가 던지고 있는 질문일 것이다. 이 질문은 의도했든 아니든 근대철학의 아버지라는 데카르트를 겨누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들 아는 얘기겠지만,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자 했다. 그렇지 않고선 확고한 것에 도달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렇게 모든 것을 의심할 때조차, 의심할 수 없는 게 하나 있음을 깨달았다. 그건 바로 의심하는 ‘나’였다. 그것 없인 의심조차 불가능할 할 테니까. 그래서 그는 ‘내’가 의심하는 한, 의심하는 ‘내’가 존재하는 것은 확고하고 자명하다고 생각했다. 의심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바꾸어도 다르지 않다고 보아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무슨 생각을 하든,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건 분명하니까.

그런데 데카르트는 그 ‘나’가 누구인지는 묻지 않는다. ‘나’가 ‘나’임은 자명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물었어야 했던 건 바로 그게 아니었을까? 그 ‘나’가 대체 누구냐고. 사실 데카르트의 ‘나’는 단지 데카르트라는 특정 개인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의심하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너도 모든 걸 의심해 봐. 그럼 네가 존재함을 확신하게 될 거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니, 저 도둑도, 다케다인 양 전장으로 달려가 울고 있는 저 사람도, 구로자와도,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모두 해당된다. 그러니 카게를 하며 다케다의 자아에 사로잡힌 저 도둑의 ‘나’가 누구인지 답해야 한다. 처한 조건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기 마련인 모든 이들, 그래서 종종 같은 한 사람의 ‘인간’인지 의심하게 하는 모든 이들이 그렇다. 가족에겐 아주 착하고 좋은 아빠요 남편이지만, 피의자들을 잡아 고문할 땐 끔찍한 괴물이 되는 고문경관뿐만 아니라, 집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술집에서 상이한 역할을 하고 각이한 행동을 반복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니까.

하이데거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모든 조건에서 분리된 고립된 ‘나’란 있을 수 없다고 비판한다. 모든 ‘나’, 모든 ‘자아’란 그가 속한 ‘세계’ 안에 있는 것이고 그 세계의 규정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구조주의 이후 현대 철학자들이 데카르트의 ‘주체’ 개념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약간 다른 이유에서다. 주체는 어떤 생각이나 행동이 출발하는 불변의 출발점이 아니라, 그 자체로 텅 빈 자리일 뿐이며, 그걸 둘러싼 관계 속에서 채워지는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조건에 따라, 관계에 따라 우리는 다른 주체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심리학자나 뇌과학자들도 ‘확고한 나’나 ‘자아’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가령 ‘다중인격장애’ 환자들은 전혀 다른 듯이 보이는 상이한 인물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들의 뇌를 스캐닝해보면 다른 인물이 될 때마다 뇌의 다른 부분이 활성화된다고 한다. 이는 역으로 우리 또한 뇌의 다른 부분을 저런 식으로 사용하게 되면, 여러 인격의 인물로 살게 될 수 있음을 뜻한다. ‘다중인격’을 구성하는 상이한 인물들이 하나의 뇌 속에 있는 것이다. 이는 나쁜 소식만은 아니다. 우리가 여러 역할을 하며 살 수 있는 것은 여러 패턴의 행동을 할 수 있는 뇌의 이런 잠재성 때문이니까. 다만 그 여러 역할들에 일관성이 없다면, 남들도 자신도 곤혹스러워 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반면 내가 하나의 ‘진정한 자아’로 꽉 차 있다면, 우리는 다른 관계,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지 못한다. 이 경우 세상과의 불화를 겪을 때마다 얼른 어린 시절의 ‘나’로 퇴행해버리게 된다. 이런 퇴행이야말로 질병이다.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는 신체를 들어 ‘나’의 확고함을 증명하려는 시도 또한 성공하기 어렵다. 프로이트나 심리학자들은 태어난 지 얼마 안된 아기들의 신체가 유기적 전체가 아니라 ‘부분대상’들의 집합임을 지적한 바 있다. 아기의 입은 엄마의 젖가슴에 반응하는 부분대상이지, 특정 기능을 수행하도록 분화된 ‘기관’이 아니다. 그래서 가짜 젖꼭지를 빠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을 얻는다. 아기들이 자기 신체가 하나의 유기적 전체임을 알게 되고, ‘자아’가 형성되는 것은 생후 18~24개월경이라고 한다. 거울에 있는 자기 모습을 알아보고 좋아하는 때가 바로 그때다. 이 시기를 정신분석가 라캉은 ‘거울단계’라고 부른다.

이때쯤까지 뇌의 신경세포들은 천조 개 가까운 수의 시냅스로 연결된다. 우주 전체의 별보다 많은 숫자다. 그런데 자아가 형성된다 함은 행동이나 사고에 일정한 패턴이 만들어짐을 뜻한다. 그에 따라 연결되어 있던 시냅스 가운데 쓰지 않는 것을 다시 단절시킨다. 이때 2/3 정도의 시냅스가 단절된다. 모든 방향으로 열린 잠재력이 ‘자아’라는 말로 요약되는 반복적 선택지만 남겨두고 축소되고 소멸되는 것이다. ‘나’라고 부를 어떤 패턴의 인격이 형성되는 과정은 엄청난 수의 시냅스, 그것이 할 수도 있었을 거대한 잠재성의 축소 내지 소멸을 동반하는 것이다. 어떤 게 살아남을 것인지는, 특정한 뉴런들을 활동하게 자극하는 외부에 의해 결정된다.

자아란 이처럼 외부조건에 의해 활동을 지속한 뉴런과 시냅스로 이어진 그 연결망과 상관적인 것이다. 그래서 가령 아기들은 12개월경 이전에는 모든 소리를 구별할 수 있지만, 그때가 지나면 모국어에서 아무 역할을 하지 않는 소리(음소)를 구별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 자아 내지 인격의 형성이란 특정한 것만 알아듣고 특정한 방식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신체적 제한과 함께 온다. 이는 그나마 남은 1/3의 시냅스마저 끊어지게 한다. 보통 뇌세포의 10%도 사용하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 연후에도 뇌는 계속 생성될 수 있고, 뇌세포(뉴런)들은 새로운 연결에 대해 열린 채 있다. 새로운 관계,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낸다. 예전에 심리학자들은 3살 정도면 사람의 성격이 확립된다고 믿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사람의 성격은 평균 50살이 되어서야 안정적으로 된다”고 한다. 사실 우리의 뇌는 지극히 유연하고 가변적이어서 그 이후에도 계속 변화되고 재구성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성격도 변할 수 있다. 그렇기에 원래의 ‘자아’나 ‘진정한 나’ 같은 건 없으며, 실존주의자들 말처럼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려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이다. 자아는 환경이나 관계 등 외부와의 만남에 의해 그때마다 만들어지는 잠정적인 안정성을 뜻할 뿐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84호 / 2015년 3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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