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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제1칙 무제와 달마의 문답(8)

“빈털터리가 해묵은 빚을 걱정하는구나, 빤히 보이네”

▲ 지공 화상은 떠난 달마대사를 대신해 양무제에게 깨달음의 길을 보여주려고 했다. 지공 화상이 양무제에게 청해 505년에 창건한 사찰 건원선사 전경. 이곳에서 3조 승찬 스님이 법을 편 뒤 삼조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참구]
<본칙> 무제는 나중에 이 일에 대해 지공 화상에게 물었다. (착어 ← 빈털터리가 해묵은 빚을 걱정하는구나. 제삼자가 보면 빤히 보이지.)

선지식 달마 놓쳐 아쉬운 무제
신뢰했던 고승 지공화상에 질문
스승은 ‘천지에 달마 있다’ 암시
무제는 ‘모른다’로 달마 흉내만

달마에 대한 애착이 해묵은 빚
번뇌인 무명·갈애 청산 못하면
윤회를 대가로 치러도 못 갚아

‘빚 걱정 뿐’인 무제 비꼬는 원오
깨달음의 길 제시한 지공을 칭찬

달마대사가 위나라로 떠났다는 말을 들은 양무제는 법 높은 대사를 경솔하게 대한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양무제는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지공 화상에게 달마대사와 문답한 내용을 이야기하면서 도움을 청했다.

지공(志公 또는 誌公) 화상은 보지(寶誌 또는 保誌, 418 또는 425~514) 화상을 말한다. 그는 양무제가 가장 신뢰했던 두 명의 고승 중 한 사람으로, 신이력(神異力)과 예언 능력이 뛰어났다. 어려서 출가하여 수도인 건강(建康)의 도림사(道林寺)에서 선정(禪定)을 닦았다.

40대 중반부터 신이력을 나타내어 며칠 동안 먹지 않아도 굶은 기색이 없었고, 시를 읊으면 그것이 예언처럼 맞았으므로 도읍의 사대부와 서민들이 존경하였다. 건강의 고승들도 지공 화상의 신이력에는 아무도 맞서지 못했다. 사문 보량(寶亮)이 지공 화상에게 옷을 보내려 하자, 보량이 말하기도 전에 그가 와서 옷을 꺼내 갔다고 한다.

양무제는 즉위하자 지공 화상을 궁중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칙을 내렸다. 조칙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그의 몸은 세속에 있지만 정신은 깊고 고요한 경지에 노닌다. 불에 타지도 물에 젖지도 않으며, 뱀과 호랑이도 감히 덤벼들지 못한다. 불교의 이치를 말하는 것은 성문(聲聞)보다 뛰어나고, 은일(隱逸)을 담론하는 것은 신선 중의 신선이다.” 이를 통해 양무제가 지공 화상을 얼마나 믿고 의지했는가를 헤아릴 수 있다.

이처럼 신이력이 대단하고 불교의 이치에 밝은 지공 화상이니 양무제가 어떻게 달마대사에 대해 물어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불심천자 양무제는 달마대사와 문답할 때는 동문서답하는 것 같아서 화가 났다. 그러나 달마대사가 떠나 버렸다는 소문을 듣고는 인도에서 온 대선지식에게서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 무척 아쉬웠을 것이다. 더구나 국경을 접하고 있는, 불교 수준이 양나라보다 한 수 위에 있는 위나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자신의 경솔했던 행동을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까?

이런 양무제의 심경을 원오 선사는 착어에서 “빈털터리가 해묵은 빚을 걱정하는” 꼴이라고 비꼬고 있다. 달마대사는 떠나갔다. 귀한 선지식을 놓쳐 빈털터리가 된 양무제. 파산자가 해묵은 빚을 걱정해도 갚을 수 없듯이, 떠나가 버린 사람에 대해 미련을 품어 보아도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미 막차는 떠났는데 미련을 품고 있으면 어쩌겠다는 말인가? 양무제가 진정 걱정해야 할 해묵은 빚은 따로 있다.

아무리 갚아도 다 갚지 못하는 빚. 갚는 순간 또 생기고 마는 빚.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모든 번뇌의 뿌리인 자신의 어리석음과 애착, 곧 나의 무명(無明)과 갈애(渴愛)이다. 이 빚을 청산하지 않는 한, 고(苦)와 윤회를 대가로 치르며 아무리 갚아도 빚은 그대로 있다. 양무제가 진정 걱정해야 할 해묵은 빚은 ‘떠나가 버린 달마에 대한 자신의 애착’이다. 이 빚은 남에게 갚는 빚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에게 청산해야 할 빚이다. 나에게는 양무제와 같은 해묵은 빚이 없을까?

양무제가 지공 화상을 불러서 물어본 것에 대해, 원오 선사는 “제삼자가 보면 빤히 보이지”라는 착어를 붙이고 있다. 여기서 제삼자는 지공 화상을 가리킨다. 지공 화상은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이다. 양무제는 물어보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것을 물어보았다. 왜 그럴까? 아는 자는 말해 보라.

<본칙> 지공 화상이 말했다.
“폐하,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착어 ← 지공 화상까지도 함께 나라 밖으로 내쫓아야 한다. 30방망이는 쳐야겠다. 달마가 왔구나.)

달마대사가 위나라로 가 버린 것을 못내 아쉬워하면서 앞으로의 대책을 묻는 양무제에게 지공 화상은 도리어 “폐하,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하고 되물었다. 대개는 일의 전말을 듣고 조언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지공 화상은 핵심을 건드리는 물음을 불쑥 던져, 양무제가 “아!” 하고 깨달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자 했다. 양무제가 달마대사와의 문답에서 눈을 뜨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긴 지공 화상. 어떻게 해서든 양무제의 눈을 뜨게 하려는 그의 정성이 읽히지 않는가?

“폐하, 이 사람(달마대사)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이 말에서 달마대사의 진짜 모습은 다른 사람에게 묻는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공 화상은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지공 화상은 달마대사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양무제에게 달마대사가 누구냐고 되물은 것이다. 아득한 옛적부터 당신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튕겨 주고 있다. 온 천지에 달마대사가 가득하지 않습니까? 안과 밖에서 늘 달마대사와 함께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양무제는 지공 화상의 이 말에도 눈앞의 보물을 보지 못한다.

원오 선사는 지공 화상이 양무제에게 이렇게 되물은 것에 대해 “지공 화상까지도 함께 나라 밖으로 내쫓아야 한다. 30방망이는 쳐야겠다”라는 착어를 붙이고 있다. 물어보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것을 괜히 물어보고 답함으로써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두 사람. 묻기 전에도 꽃은 피고 새는 울었다. 묻고 답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꽃은 피고 새는 울지 않는가? 물어보는 양무제는 물론, 응대하는 지공 화상마저도 애초에 국외로 추방했더라면 천하가 태평할 것을.

아니, 추방해 본들 문제를 일으키는 근성은 어디 간들 마찬가지다. 아예 몽둥이로 죽도록 두들겨 패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야 다시는 묻고 답하는 일이 없을 것 아닌가? 원오 선사는 30방망이를 휘둘러 그렇게 해야 한다고 독설을 퍼붓고 있다. 그러나 실은 ‘억하의 탁상’, 양무제의 눈을 뜨게 해 주려는 지공 화상에 대한 극찬의 말이다.

이어서 원오 선사는 “달마가 왔구나”라는 착어를 붙였다. 달마대사가 떠나 버렸기 때문에 이것으로 끝났는가 생각했더니, 달마는 또다시 나타나서 양무제를 깨우쳐 주고 있다. 지공 화상이 바로 달마다. “달마가 왔구나.” 이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착어인가!

<본칙> 무제가 말했다.
“모르오(不識).” (착어 ← 이런, 도리어 무제가 달마의 공안을 잘 받아들였구나.)

이 대답에 대해 원오 선사는 평창(해설)에서 이렇게 제창했다.

“양무제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말해 보라. 달마대사가 ‘모른다’고 말한 것과 같은가, 다른가? 비슷하다고 하면 비슷하지만, 그런가 하면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대개 잘못 알고서 이렇게 말한다. ‘앞은 달마대사가 선(禪)으로 대답한 것이고, 뒤는 양무제가 지공 화상에게 대답한 것으로, 양무제의 ‘모른다’는 ‘면식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멋지게 빗나갔네.”

대개는 양무제가 “모르오”라고 한 대답을 액면 그대로 달마대사가 어떤 분인지 모른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본다면 명석하고 재기 넘치는 양무제를 너무 폄하하는 것이 된다. 달마대사에게서 두 번의 선 화살을 맞고도 아직 선심(禪心)을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양무제는 지공 화상의 물음에 뭔가 알아차린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원오 선사는 평창에서 양무제의 “모르오”는 ‘사람을 안다·모른다’는 의미의 ‘모른다’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 무제의 “모른다”와 달마대사의 “모른다”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앞에서 말했듯이 달마 대사의 “모른다”는 그의 선적 경지에서 나온 대답이다. 그러나 양무제의 “모른다”는 선적 경지와는 상관이 없다.
지공 화상이 “폐하,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라고 묻자, 양무제는 불현듯 자신이 “짐과 마주한 그대는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달마대사가 “모릅니다”라고 대답한 것에 뭔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지공 화상의 의도가 어느 정도는 먹힌 것이다. 이에 양무제는 달마대사와 똑같이 “모르오”라고 대답했다. 숭어가 뛰니까 망둥이도 뛰는 꼴이다.

원오 선사는 이런 양무제의 행동에 대해 “이런, 도리어 무제가 달마의 공안을 잘 받아들였구나”라는 착어를 붙이고 있다. 양무제가 “모른다”고 한 것을 겉으로는 “대단하다, 대단하다. 도리어 양무제가 달마대사의 공안을 단단히 참구했구나” 하고 치켜세우는 듯하지만, 실은 달마대사의 말을 모방한 것에 대한 야유이다. ‘억하의 탁상’의 반대인 ‘탁상의 억하’를 구사한 수사법이다.

또한 원오 선사는 평창에서 “당시에 지공이 이렇게 물었을 때, 어떻게 말했어야 하는가? 어째서 한 방망이 후려갈겨 어물어물 넘기지 못하도록 하지 않았는가?”라고 제창했다. 지공 화상이 “폐하,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하고 되물었을 때, “모르오”라고 흉내 내는 양무제에게 곧바로 몽둥이를 휘둘러서 확실히 눈을 뜨게 해야 했다. 참으로 애석하구나.

원오 선사는 양무제가 눈을 뜨지 못한 것은 지공 화상의 가르침이 엄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억하의 탁상이다. 실은 떠나간 달마대사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양무제를 깨달음의 길로 이끌려는 지공 화상의 지극한 마음을 칭찬한 것이다.

오곡도명상수련원 원장 www.ogokdo.net

[1286호 / 2015년 3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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