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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푸티상사의 지상법문] 6. 불법을 배우는 목적-1

기자명 법보신문
  • 법공양
  • 입력 2015.03.17 17:06
  • 수정 2016.01.05 16:10
  • 댓글 0

부처님 가르침 배우는 참 이유는 우리 모두의 ‘이고득락’

 
오늘 이 순간 깨우치면 이 순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삶이 힘들때 부처·신 찾아
힘든 삶 개선 바라는 마음은
매일 밥 먹는 것과 같은 이치

불법 배우고 실천한다면
누구나 더 좋은 삶 얻어야
지혜·능력 키우는 이유도
고통 벗어나 행복해지기 위함

불법은 가장 실용적인 공부
힘들어하는 다른이와 나눠야

부처님은 어떤 모습일까요? 모두 미녀, 미남일까요? 부처님은 어떤 모습이든 가능합니다. 이 겉모습은 단지 우리의 육체가 지금 세상을 거쳐 가는 과정 중 하나입니다. 깨닫는 것은 우리의 정신이며 정신이야말로 우리 생명의 본질입니다. 반복하여 윤회하는 과정에 전생에 황제가 되고 귀비, 신하, 장군, 노예, 부자가 되는 것은 인간일 때의 이야기고 축생도에 떨어지면 소, 말, 양, 심지어는 곤충, 쥐, 고양이, 귀여운 강아지가 될 수도 있죠. 우리는 반복하여 윤회하는 과정에 각 계층의 사람이 되었고 모든 짐승이 되었을 겁니다.

불법은 무엇보다 생존의 도를 우선으로 합니다. 보통은 이 분명한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보통 불법공부라는 말만 나오면 생사를 끝내는 거라고 하는데 생사를 끊는 건 쉽습니다. 밧줄 하나면 됩니다. 사실 생사를 끊는 방법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진심과 자비심으로 일상의 크고 작은 일을 처리하는 겁니다.

왜 불법이 필요한지 아세요? 왜 불법을 공부하나요? 이고득락을 위해서입니다.
불법이 왜 이 세상에 있을까요? 중생의 이고득락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불법을 배우는 진정한 목적입니다. 불법은 생존의 길입니다.
우리는 언제 신과 부처님께 도와달라고 하나요? 어려움이 있을 때죠.

“저는 너무 가난합니다. 부모님과 식구 7~8명의 생활을 혼자 책임져야 하는데 회사에서 해고되어 도저히 헤쳐나갈 방법이 없어요. 아버지로서, 부모를 공경하는 효자로서, 더는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만약 죽어버리면 가족들은 막막해질 거예요. 어떻게 할까요? 부처님을 찾죠.

“부처님, 보살님 좀 보세요. 너무 힘듭니다. 취직도 안 되고 좋은 사람인데 회사에서 해고당했어요.”

이렇듯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힘이 들 때 신 또는 부처님을 찾게 됩니다. 서양인들은 불교를 잘 모르기 때문에 신이나 예수, 성모 마리아에게 빌지요. 이것이 바로 자연법칙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찾는 이유는 해결할 수 없는 고통 때문입니다. 어떤 고통은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고 항상 자신을 감싸고돌면서 숨 막히게 합니다. 숨 막히는 고통 속에서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 신이나 부처님을 찾는 겁니다. 매일 먹는 밥과 같은 일반적인 이치입니다. 우리는 삶의 필요로 부처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나는 불법을 배우면 더 좋은 생활을 하고 더 좋은 생활양식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혜와 능력을 쌓는 것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께 일자리를 부탁한 후 1주일 이내에 출근해 달라는 회사가 생기면 부처님이 주신 것이든 자신이 스스로 찾은 것이든 정말 신통하겠죠. 보다시피 일자리는 삶의 필수입니다. 아이가 아파 수많은 병원도 다녀도 낫지 않고 날마다 복통을 호소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의사를 찾고 약을 써도 사랑하는 자식이 낫지를 않으니 부처님께 부탁합니다.

“자비로운 부처님, 우리 아이 좀 봐주세요. 너무 아파하고 있어요. 불쌍히 여겨 부디 부처님의 혜안으로 도움을 주십시오.”

엄마로서 이런 상황이면 부처님을 찾게 되지 않겠어요? 이것은 생존의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법을 배우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라는 겁니다.

어떤 이는 돈도 권세도 있고 건강하지만 깨우침을 얻기 위해 불법을 배웁니다. 말하자면 이미 물질과 건강이 대부분 충족되었기 때문인 겁니다. 돈을 원하면 돈이 생기고 무엇이든 살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 역시 좋아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몸도 좋고 얼굴도 잘생겼어요. 이것이 인생의 가장 높은 경지일까요? 아직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날마다 즐거운가요?

여러분에게 새로운 고민을 안겨드리죠. 모든 것을 가지게 되면 오히려 더 쉽게 흐리멍덩해집니다. 나에게 불법을 배우는 제자 중에는 엄청난 부자가 많습니다. 한 제자의 자녀가 나에게 “우리 집 아주 부자예요!” 하더군요. 그런데 너희 부모님은 왜 불법을 배우냐고 했더니 “그게 아니라, 엄마가 사는 게 재미없다며 자살하려고 해서 그래요.”  아닌 게 아니라 그 엄마를 불렀더니 얼굴이 납덩이같이 자줏빛을 띠었습니다. 이렇게 부귀한 사람이 왜 이 모양이 됐을까?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불렀더니 들어오자마자 쿵쿵 소리 나게 절을 해서 두 사람이 잡고 멈추게 했습니다. 할 말 있으면 하라고 했더니

“저 좀 살려주세요! 더는 못 살겠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세요?”
“살 수가 없어요.”
“뭐가 필요하세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그럼 여기는 왜 왔어요?”
“그냥 살고 싶지 않아서요.”

살고 싶지 않다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습니다. 안정이 된 후 시간을 내어 2시간 동안 이야기해 보니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었더군요.

“집을 사고 싶으냐고요? 가지고 있는 집만 100채가 넘어서 관리하는 전문 관리인이 있을 정도예요.”

처음에는 좋은 시계를 갖고 싶었는데 지금 그녀는 세상의 좋은 시계는 다 가졌습니다.

“옷은 어때요?”
“한 달에 한 번 정리해야 할 정도예요.”

입지도 않을 옷을 사들이는 병적인 중독이 있었던 거예요. 마구 사들이고 싫어지면 버릴 정도로 부자였지만 매일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답니다. 이런 병도 있나요? 삶에 부족함이 없는데 사는 재미가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남편을 불렀더니 남편도 그녀와 비슷한 상태였어요. 돈을 버는 일은 남편이 하고 그녀는 돈을 셌습니다. 나는 남편에게 사내대장부이고 포용력이 있으니 별일 없을 거라 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사업을 하고 돈도 많이 버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더니 그는 자신이 지고무상한 사람이라 하더군요. 그럼 당신은 자살할 일은 없겠다고 했더니 처음에 자살을 시도한 사람은 자신이었대요. 머리가 비상해서 무슨 일을 하든지 돈을 벌었대요. 이런 경지가 되자 결국 남편이 먼저 막다른 길에 들어섰고 해탈이 필요했답니다.

금전이나 경제문제가 인생에 필수적 기반이지만 생명 전부는 아닙니다. 아주 중요하지만 생명 전부는 아닙니다. 모두 돈을 벌고 싶어 하지만, 정작 돈을 벌게 되었을 때 신앙이 없으면 더 갈 길이 없어지죠. 인생은 모순되게 거짓도 진짜가 되는 일이 생기죠. 이 정도 부자면 인생이 지루해요. 학식도 일정 수준에 이르면 의욕을 잃을 수 있어요. 그래서 생명의 고통을 본질적인 것도 많지만 환상에 인한 고통도 많아 다 진짜는 아닙니다. 업장은 제쳐놓고라도 지혜가 부족해 옳고 그름, 참과 거짓,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할 줄 몰라 때론 행복을 고통이라 생각하죠.

부부 사이를 예로 들면 한쪽의 사랑이 너무 깊어 다른 쪽을 얽매면 처음에는 너무 사랑해서 주변에 자랑하고 모두가 부러워하지만 2~3년 지나면 싫증을 내요. 매일 나만 따라다니니 갑갑하고 숨을 쉴 수 없다고 합니다. 마음에서 멀어지기 시작하고 거리감이 생기며 다투고 헤어질 수도 있습니다. 정작 헤어지고 나면 집안이 너무 조용하고 썰렁하고 밤이 되면 외롭죠. 되돌리자니 무안하고 혼자 있자니 외로워 또 고민합니다.

무엇이 행복일까요? 대부분 사물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나 거짓된 고통을 진정한 고통으로 받아들이면 정말 고통스러워집니다. 그래서 많은 고통은 우리의 정신세계에서 정의하기 나름인 거죠.

왜 인생의 고통을 부처님이나 법사들은 업장의 표현이라거나 업장의 탓이라고 할까요? 분명히 행복인데 왜 고통이라 생각할까요? 설명할 방법이 없네요. 다만 과거에 죄를 많이 지어 행복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고 고통으로 생각한다고 봐야겠죠. 사실 인생은 고통이 아닙니다. 천당과 지옥은 모두 인간 세상에 있습니다.

이럴 때면 한 선사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 선사는 깨달음을 얻은 교양 있는 사람이었어요. 어느 날 한 장군이 이 선사를 찾아와 마음속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인생이 괴롭습니다. 인생살이가 너무 힘듭니다.”

선사는 대답을 안 했습니다. 대답이 없자 다시 그 장군은

“여쭐 말이 있으니 들어주시오. 천당은 무엇이고 지옥은 무엇입니까? 천당과 지옥이 있습니까? 만약에 있다면 어디에 있습니까?”

이 말에 선사는 소맷자락을 휘저으며
“이런 바보, 멍청이 같으니라고. 이렇게 저속한 질문을 하다니! 썩 물러가지 않으면 개를 불러 물어 죽일 거네!”

장군은 이 말을 듣고 검을 뽑아들며
“베어버리겠소! 관직에 오른 이래 이런 모욕은 처음이오!”
“어떻소? 지옥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소?”

단지 생각의 차이일 뿐입니다. 많은 불자는 깨달음을 얻어 하늘나라로 가기를 바랍니다. 결국 자기 자신이 하루빨리 극락세계에 있기를 원하죠. 우리가 불법을 배우는 것은 고통을 해결하기 위함이죠. 그러다 끝내 진짜로 단칼에 고통을 해결해 버립니다. 목을 매면 삶의 고통이 바로 사라진다고 해서 삶을 끝내 버립니다. 동방 세계든 서방 세계든 지옥이든 지금 당장은 고통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석가모니부처가 설법한 목적과 맞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불법은 중생의 이고득락을 위한 법입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받은 후 고통이 떠나긴 했습니다, 그것도 영원히.

많은 사람이 입버릇처럼 생사를 끝낸다고 하는데 어떻게 끝내죠? 본래는 고통은 질병에 의한 결혼, 직장생활에 의한 것일 뿐인데 살기 싫다며, 정말 삶을 끝내면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이해한 부처님의 참뜻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더욱 잘 사는 것이고 생사를 끝낸다는 것은 더욱 큰 의미가 있는 말로 공덕원만 자각각타입니다. 악행을 행하지 않고 선행에 앞장서며 인과를 믿어야 생사를 끝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이지, 좋은 말을 듣고 살아있는 사람이 생사를 끝낸다면 이는 잘못된 어휘사용입니다.

내 생각에 부처님은 이렇습니다. 석가모니불에서 오늘날 내가 가장 숭배하는 약사여래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람을 근본으로 합니다. 사람은 부귀와 건강이 필요하고 신체가 온전하고 예뻐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외적인 미를 중요시하지 않고 내적인 미만 중요시한다면 누가 알아줄까요? 속마음은 들여다볼 수 없어서 어떤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외형적으로 눈에 보이는 부분은 평가할 수 있지만 내적인 것은 평가가 어렵죠. 겉모습이 나무랄 데가 없고 건강한 신체, 즉 보기 좋은 외모는 공덕과 복덕의 결과입니다.

저는 말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불법이 실용적이라 생각합니다. 미래는 우선 놔둡시다. 미래는 현재를 추월한 것입니다. 추월한 것이니 이생을 마감하고 환생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합시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살아있는 동안 어디로 가야 하는가, 깨우침을 얻었는가, 부처님의 지혜를 얻었는가, 고통에서 벗어났는가, 한 단계 더 승화하거나 깨달음의 난관을 하나 넘었을 때 나만 즐거워하고 나만 인간 세상의 천당을 차지했는가, 천당을 사람들과 공유했는가, 이러한 것이야말로 불법을 배우고 불법에 귀의한 사람이 걸어야 할 길이며 깨달아야 할 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고득락입니다. 그래서 혼자 깨우치고 이고득락한 후에는 온갖 방법을 다하여 이러한 즐거움과 지혜를 과거 나처럼 고통받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2010년 11월 한국 부산 (번역 : 정금주)
제공 : 한국 보리선수 약사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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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푸티상사는

- 보리선수 약사선원 근본스승.
- 1991년 불법 전파.
- 2004년 캐나다 밴쿠버
- ‘보리선수’ 설립.
- 현재) 캐나다, 싱가포르, 대만,  뉴질랜드, 한국 등 30여 지역의 선 수행센터 지도.

[1286호 / 2015년 3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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