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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제1칙 무제와 달마의 문답(9)

“동쪽 집 사람이 죽으니 서쪽 집 사람이 슬피 우는 꼴이군”

▲ 지공 화상은 양무제에게 달마대사를 관세음보살이라 했다. 달마와 양무제 모두 관세음보살이라는 가르침이었다. 둔황 막고굴 57굴 관세음보살.

[참구]
<본칙> 지공 화상이 말했다.
“이분은 관음대사(觀音大士)이시며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하십니다.” (착어 ← 멋대로 해석하는구나. 팔은 바깥쪽으로 굽지 않는 법.)

달마를 관음보살로 알린 지공
불심천자의 눈 밝히려는 방편

사신 보내 달마 찾으려는 무제
가짜 달마에 집착한 과오 범해
스스로가 관음이란 사실 몰라
우리도 양무제와 다르지 않아

깨달음 가능성 희박해졌다며
“쓸데없는 참견” 질타한 원오

지공 화상은 양무제가 달마대사를 모방해서 “모르오”라고 대답하는 것을 듣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양무제가 불심천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지공 화상. 그는 달마대사의 품위를 한껏 높여 이분은 살아 있는 관세음보살이고, 부처님의 깨달음, 즉 ‘불심인(佛心印)’을 그대로 전하려고 일부러 온 분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지공 화상은 양무제의 눈을 뜨게 하려고 이런 방편을 사용했지만, 도리어 양무제로 하여금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 들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이에 원오 선사는 지공 화상의 이런 처사를 평하여 “멋대로 해석하는구나”라는 냉소적인 착어를 붙이고 있다.

그리고는 이어서 “팔은 바깥쪽으로 굽지 않는 법”이라는 착어를 붙였다. 팔은 결코 바깥쪽으로는 굽혀지지 않는다. 이것에 시비 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눈은 옆으로 코는 아래로, 이것 이대로가 진리이다. 이렇듯 일체 중생이 있는 그대로 원래 부처 아니던가? 그런데 다시 무슨 부처의 심인을 전해 받을 필요가 있단 말인가? “지공 화상님, 지나친 배려는 오히려 쓸데없는 참견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라는 뜻이다.

나의 외모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나의 외모에 대한 잡다한 생각이 문제다. ‘못났다’느니 ‘예쁘다’느니 이런저런 생각 없이 그냥 단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어떤 합리화도 비난도 하지 말고 그냥 함께 있어 보라. 뭔가를 의도하는 순간 의도한 만큼 ‘원래의 부처’에서 멀어진다.

평창에서 원오 선사는 다시 이렇게 제창한다. “지공 화상이 ‘이분은 관음대사이시며 부처님의 심인을 전하십니다’라고 말할 때, 그도 나라 밖으로 내쫓아 버렸더라면 좋았다. 그랬으면 그래도 가능성이 있었을 텐데.”

‘관음대사’니, ‘부처님의 심인을 전하는 분’이니 하고 허풍을 치는 지공 화상을 나라 밖으로 내쫓아 버렸더라면 좋았다는 것이다. 그랬으면 양무제가 눈을 뜰 가능성이 조금은 남아 있었을 텐데. 이젠 그 가능성마저도 희박해졌다고 지공 화상을 질타하고 있다. “달마대사는 살아 있는 관세음보살이고 부처님의 심인을 전하는 분”이라고 말한 것이 어째서 쫓겨날 정도로 잘못된 일일까? 원오 선사는 평창에서 이렇게 묻고 있다.

“말해 보라. 달마가 관음인가, 지공이 관음인가? 어느 쪽이 진짜 관음인가? 관음인데 어째서 둘이나 있는가? 아니 둘 정도가 아니다. 무리를 이루어 늘어섰다.”

관세음보살은 누구이고, 어째서 엄청나게 많은가? 원오 선사가 지공 화상을 두고 왜 쫓겨날 정도로 잘못 말했다고 하는지 알겠는가? 자신의 관세음보살을 붙잡은 이에게는 이것은 문제도 아니다.

여기서 눈 밝은 사람은 좀 더 깊은 곳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공 화상이 관세음보살은 진정 누구이고 어째서 엄청나게 많은가를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떠나 간 달마대사가 관세음보살이라고 말한 것은 일부러 함정을 파 놓은 것이다. 양무제가 이 말을 듣고 함정을 간파하여 스스로 진정한 관세음보살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남에게서 들은 진리는 남의 보물이지 자신의 보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원오 선사 또한 지공 화상의 이와 같은 경지를 꿰뚫고 있다. 그런데도 질타하는 것은 지공 화상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그 너머의 진실을 보지 못하는 양무제의 어리석음, 나아가 우리의 어리석음을 일깨우기 위해서이다. 양무제와 우리를 치는 대신 지공 화상을 치는 것이다.

진정한 스승은 “어떻게 하면 제자가 알아차릴까?” 오직 이 생각뿐이다. 일부러 함정을 파 놓기도 하고 애꿎게 다른 사람을 질타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알아차릴까, 저렇게 하면 알아차릴까? 어리석은 나를 향한 스승의 혈적적(血滴滴)한 마음이 읽혀 눈시울이 붉어질 때 비로소 수행은 무르익기 시작한다.

<본칙> 무제는 후회하고 이에 사신을 보내어 맞이하려 했다. (착어 ← 역시 파악하지 못하고 있군. 그래서 ‘멍청한 놈’이라 했던 거야!)

동문서답 같은 대답만 하고 떠난 버린 사람이 살아 있는 관세음보살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느 중생이 놀라지 않겠는가? 양무제 역시 살아 있는 관세음보살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그는 마음이 다급해진 나머지 한시라도 빨리 모셔 오라고 재촉했다. 양무제가 달마대사를 모셔 오고자 하는 것에 대해, 원오 선사는 평창에서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라고 제창하였다.

달마가 누구인가? 자신의 달마를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 이렇게 치고 저렇게 쳤건만, 양무제는 아직도 캄캄해서 달마대사를 모셔 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에 대해 원오 선사는 “역시 파악하지 못하고 있군. 그래서 ‘멍청한 놈’이라 했던 거야!”라는 착어를 붙이고 있다. 처음에 멍청한 놈이라 했던 것이 역시 틀리지 않았다고 책망하고 있다. 천년의 암실도 등불 하나면 환한데 등불을 손에 쥐어 주어도 켜지를 못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의 사상을 설명한 ‘보리달마사행론’.

<본칙> 지공 화상이 말했다.
“폐하, 사신을 보내어 모셔 오려 해도 당연히 그는 돌아오지 않을 뿐더러, (착어 ← 동쪽 집 사람이 죽으니 서쪽 집 사람이 슬피 우는 꼴이군. 한꺼번에 나라 밖으로 쫓아내어야 좋을걸.)

양무제가 조급한 마음으로 사신을 보내어 달마대사를 모셔 오려 하자, 지공 화상은 그것이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줌으로써 무제의 애타는 마음을 더욱 고조시켰다. 지공 화상은 “도대체 누가 달마대사입니까?” 하고 되묻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겠지만 말하지 않았다. 미련을 가지고 집착하면 윤회의 세계이고, 집착이 없으면 시방 삼세는 원래 모습 그대로 공(空)하여 하나이다. 누가 누구를 모시러 간다는 말인가? 일체가 ‘나’인데, 모시러 갈 상대가 어디 있는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밥을 대신 먹어서 배부르게 해 줄 수는 없다. 소림사에서 달마대사가 제자인 혜가에게 “제불의 정법은 남에게 얻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듯이, 깨달음은 누가 가르쳐 준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깨닫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지공 화상은 다만 “당연히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해 줄 뿐이었다. 이 한마디의 절묘함을 간파했는가?

달마는 늘 그 자리에 있을 뿐 떠나간 적이 없기 때문에 돌아올 수도 없다. 외형상의 달마를 말끔히 떨쳐 버리고 진짜 달마를 만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한마디로 지공 화상은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다. 이 말을 위나라로 간 달마대사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이해하는 양무제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어 상황의 전환을 꾀하는 동시에, 진정한 달마의 있는 그대로의 진실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지공 화상의 노련한 수완, 과연 매의 발톱이다.

원오 선사는 이런 지공 화상의 수완에 대해 “동쪽 집 사람이 죽으니 서쪽 집 사람이 슬피 우는 꼴이군”이라는 착어를 붙였다. ‘전등록’ 권27 ‘습득장’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당나라 시대 절강성 천태산 국청사의 풍간 선사가 길가에 버려진 아이를 발견하고 국청사로 데리고 왔다. 길에서 얻었다 해서 이름을 ‘습득(拾得)’이라 짓고 절에서 살게 했다. 인근의 바위틈에 살고 있던 한산(寒山)과 친구였다.

어느 날 습득이 절 마당을 쓸고 있는데 그 절의 감원(監院, 선원의 모든 일을 총감독하는 스님)이 물었다. “네 이름은 습득이다. 풍간 선사께서 너를 길에서 습득하여 데려 왔기 때문이다. 너의 진짜 성은 무엇이고, 어디서 살았는가?” 이 말에 습득이 빗자루를 놓고 차수하고 섰으니, 감원은 어리둥절했다. 보고 있던 한산이 가슴을 치면서 외쳤다. “아이고! 아이고!” 습득이 한산에게 물었다. “무엇 하는가?” 한산이 대답했다. “‘동쪽 집 사람이 죽으니 서쪽 집 사람이 슬피 운다’는 것을 잘알지 않는가?”

“동쪽 집 사람이 죽으니 서쪽 집 사람이 슬피 운다”는 진정으로 마음이 통하는 친구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 작용을 이르는 말이다. 한산이 습득의 마음을 읽고 “아이고!” 하며 대신 외쳤듯이, 달마대사와 지공 화상이 서로의 마음을 꿰뚫고 역할을 나누어 양무제를 잘도 이끌어 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풋내기에게 훈수를 두면 거기에 휘말려 도리어 자기 실력조차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양무제도 마찬가지였다는 암시를 이 착어는 주고 있다. 지공 화상이 “당연히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양무제로 하여금 자신의 달마를 찾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양무제의 어리석은 행동만 부추긴다는 것이다.

원오 선사는 이어서 “한꺼번에 나라 밖으로 쫓아내어야 좋을걸”이라는 착어를 붙이고 있다. 이쯤에서 양무제는 진짜 살아 있는 달마를 붙잡아서 가짜 달마와 지공 화상을 일시에 모두 쫓아낼 수 있어야 진정한 불심천자라고 일침을 놓은 것이다. 앞에서 30방망이를 제대로 맞았더라면 지금쯤 양무제는 자신의 달마를 붙잡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여기서도 지공 화상과 원오 선사는 양무제와 우리를 깨우치기 위해 서로 다른 방향에서 온갖 역량과 정성을 쏟아 내고 있다. 그것을 알아차리겠는가? 

오곡도명상수련원 원장 www.ogokdo.net


[1287호 / 2015년 3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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