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0. 충주 대원사지와 석불입상

기자명 신대현

마의태자 전설 간직한 석불이 전하는 차마 기록 못한 슬픈 역사

▲ 대원사지에 남아 있는 석불입상. 대원사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없으나 마의태자 창건 전설이 전해져 그 연관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오래된 작품에는 전설이 뒤따르곤 한다. 작품이 뛰어날수록 그것을 만든 배경에 얽힌 전설은 꼭 있기 마련이다. 이 같은 전설은 작품의 감상에 묘미와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가 된다. 그런데 어떤 작품에는 전설이 곧 역사요 사실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역사책에 차마 그대로 다 싣지 못할 이야기가 입으로 전해져 전설로 남은 경우가 왜 없겠는가. 이런 전설은 다른 형태로 ‘기록’되니, 책이 아니라 작품에 그대로 투영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설의 내용과 작품의 분위기와 양식이 일치하는  사례가 곧잘 있으니, 그 중 하나가 바로 충주 미륵리에 있는 미륵대원사지 석불상이다.

1977년 대원사지 발굴 이후
‘대원령’ 등 지명유래 드러나
대원사 역사 담긴 기록물은 없어

신라 멸망 후 마의태자 발자취
석불에 드러난 특징으로 유추

고려시대 조성으로 인식되나
조성기법·상호·귀 형태 달라
수척하고 파리한 인상에는
신라말 불안한 사회상 반영

미륵대원사는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고 오래 전부터 절터만 남아 있었다. 역사서나 다른 기록에 절 이름도 나오지 않지만 옛날부터 ‘대원지(大院址)’라고 불러왔다. ‘대원’이란 이름은 이 부근에 커다란 역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 부근은 옛날 교통의 요지였다. 고려와 조선시대 영남에서 서울로 가려면 반드시 문경 새재, 곧 조령(鳥嶺)을 거쳐야만 했는데, 조령은 여기서 대원령이라는 고개 하나 넘으면 된다. 이렇게 조령과도 가까워 이곳 역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고 또 조령이 개척되기 이전에는 바로 이 미륵리가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이 근처에 ‘커다란 역원’, 곧 대원이 있었던 것으로만 생각해왔다. 하지만 1977년 절터가 발굴되고 ‘대원사’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들이 출토되었다. 그러니까 ‘대원지’나 ‘대원령’ 등의 지명은 역원이 아니라 대원사 절로 인해 붙여졌음이 확인된 것이다.

이 대원사지에는 여러 유적과 유물이 전한다. 인공 석굴의 자취가 잘 남아있는 절터에는 거대한 석불상을 비롯해 오층석탑과 삼층석탑, 석등, 귀부 그리고 마치 석굴암을 떠올리게 하는 석불상 뒤에 남은 석굴의 흔적 등 아주 다양한 유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어 대원사도 그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이 유적들을 좀 더 세밀하고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여기에 신라 말의 흔적이 배어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대원사가 언제 창건되고 어떻게 경영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는 아쉽게도 책에 한 줄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다행히 전설이 전해져 그 자리를 대신해 준다. 통일신라가 분열되고 후삼국이 발호하여 다시금 치열한 통일전쟁이 시작되었고, 종내 신라는 935년 천년 사직을 내놓고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왕자였던 마의태자(麻衣太子, 912~?)는 고려에 귀순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 경순왕에게, “나라의 존망이라는 것이 천명(天命)에 달려있기는 하지만 충신(忠臣)·의사(義士)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해 스스로 지키다가 힘이 다한 후에 그만두어도 늦지 않습니다. 어떻게 가볍게 남에게 줄 수 있단 말입니까?(國之存亡必有天命只合與忠臣義士收合民心自固力盡而後已豈冝輕以與人)” 라며 항전을 주장하기도 했다고 ‘삼국사기’에 나온다. 하지만 결국 마의태자는 나라를 잃은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경주를 떠나 금강산으로 향했다. 덕주(德周) 공주도 오빠를 전송하며 여기까지 왔었고, 남매는 여기서 헤어져야 했다.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가기 전 이 자리에 절을 지으니 바로 지금의 대원사지이다. 덕주 공주는 여기서 좀 더 북쪽에 있는 월악산으로 가 덕주사를 지어 그곳서 생을 마쳤는데, 마의태자는 금강산에서 종적을 감췄다. 유점사나 장안사, 표훈사 등 금강산의 여러 사찰들에서 마의태자와 관련된 기록과 유적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마의태자가 금강산에서 수도했던 것은 사실일 듯 하다.

그런데 이 대원사나 덕주사와 관련해서는 그저 후대에 붙여진 전설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이 역시 역사적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아 보인다. 전설이 사실이라면 그 흔적과 자취가 이곳의 유적과 유물에 드러나 있지 않을까?

마의태자가 이곳에 절을 창건한 이유는 신라가 망하는 과정에서 말로 다 못할 고생을 겪었던 사람들을 위해 참회하고 그들의 복을 빌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자연히 대원사를 지으면서 신라의 흔적이 고스란히 스며들게 되었으니, 한 예로 여기에 경주 석굴암을 연상케 하는 석굴이 조성된 것을 봐서도 알 수 있다. 잘 다듬은 돌을 쌓아 올려 벽을 만들고 그 안쪽으로 감실(龕室) 같은 공간을 냈고 이 안에 석불상이 자리한다. 이 안에 서면 석굴암의 내부 장엄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난다. 이런 석굴의 구성 수법과 규모는 사천 보안암(普安庵) 같은 고려시대 석굴보다는 다른 작풍을 보이고 있다. 석굴의 남은 석재와 이 석불상의  고색이 완연한고태(古態)가 나는데 반해 이 석불입상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화사한 데 대해, 석굴과 석불입상이 같은 시대에 조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대원사에는 신라가 사라지고 고려가 등장하던 시절의, 끝나버린 시절에 대한 스산함과 비장함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시대에 대한 희망과 기대감 등이 교차되어 남아 있다. 절이 역사의 자취이니 이런 분위기가 반영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흔적은 미륵석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대원사지에는 다양한 유물이 전한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 불상은 미륵대원 절터 전체의 한 부분으로만 보곤 하여 그만큼 이 불상 자체에 대한 집중력이 좀 흩어진 느낌도 있다. 이 불상의 양식을 보면, 육계와 나발이 유난히 뚜렷하고 얼굴은 둥근 편이다. 눈썹 역시 둥글어 직선적으로 감은 듯한 눈과 작은 입을 두텁게 표현하고 있다. 목 아래는 삼도(三道)가 굵고 간략하게 표현되었으며, 어깨와 발아래의 너비가 거의 같아서 마치 일직선으로 깎은 듯한 느낌을 준다. 팔도 비교적 간략하게 표현했는데 오른손은 가슴에서 펴고 있는 시무외인을 하고, 왼손은 연봉 혹은 약합(藥盒)으로 보이는  지물(持物)을 들고 있다. 이 불상은 고려시대 초기에 많이 조성되었던 거불(巨佛)들과 궤를 같이 하는 작품으로 말해지곤 한다. 그런데 좀 더 유심히 살펴보면 마의태자 전설이 전하는 935년 가까운 시기로 좁혀볼 수 있을 만한 요소가 있다. 일반적인 고려 초기의 불상과는 세부적으로 다른 모습과 분위기를 지니기 때문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 수척하고 파리한 인상에는 신라말 불안했던 사회상이 반영됐음을 유추해볼수 있다.

우선 이 불상은 높이 11m로 고려 초기의 일반적인 거석불상보다는 작은 편이다. 고려 왕조가 안정되기 시작하던 967년에 세운 논산 관촉사 미륵불상은 25m에 달한다. 석불상의 조성 수법도 약간 다르다. 관촉사나 부여 대조사 석불상 등은 한 장의 돌에 새겼으나 대원사 석불상은 보관까지 모두 6장의 돌을 조립해 만들었다. 이는 확실히 시대적 차이를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고려 초기의 거석불상들이 대부분 신체 각 부분이 풍만하게 조각된 데 비해 이 대원사 석불상의 몸매는 상당히 마른 편이어서 주목된다. 전체적인 인상은 수척하고 파리하다고 해도 될 정도다. 굳이 여기에 나라를 잃고 고심참담했을 마의태자의 모습을 투영할 필요는 없겠지만, 분명 신라 말의 불안하고 가라앉아 있던 사회상이 이 불상에 반영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을 듯 하다.

▲ 석불입상의 옆모습. 두터운 귓바퀴 등은 신라불상의 특징이다.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불상 얼굴의 옆모습이다. 높이가 10m가 넘는 불상은 얼굴과 같은 높이에서 바라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대체로 불상의 얼굴, 곧 상호(相好)를 옆에서 관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불상은 옆모습 중에서도 특히 귀의 형태에서 시대적 양식이 잘 드러난다는 점을 자주 놓치곤 한다. 대원사 석불상의 귀는 얼굴 길이의 반 이상이 될 만큼 크지만 고려시대 불상의 기다란 귓불만큼 기다랗지 않아 확실히 시대적 차이가 있다. 또 귓바퀴가 두텁고 윤곽이 또렷하며 고막을 가리는 돌출 부분이 크고 둥글어 복스럽게 표현된 것은 석굴암 본존불에서 시작되어 철원 도피안사 불상 등 통일신라 후기 불상까지 이어지는 신라 불상의 특징이다.

이런 점들을 상기하고 바라보면 이 불상이 고려 초기의 여느 불상들과는 좀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좀 더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논산 관촉사, 부여 대조사, 안동 제비원, 파주 용암사 등 고려를 대표하는 불상은 분명 대원사지 불상과 맥을 같이 한다. 양식사(樣式史)의 큰 틀에서 보면 대원사 불상은 고려 초의 작품이며 앞에서 든 불상들의 양식을 선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조금 더 세밀히 보면 신라 말의 작풍도 같이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비록 아주 짧은 시간이었기는 했지만 신라와 고려가 이어지는 사이에 자리하는 조성된 다리처럼 보이는 것이다. 특히 이곳 대원사지가 마의태자의 전설이 전하는 자리라는 점에서 이 불상에서 그런 전설의 구체적 흔적을 찾아보려는 시도는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이 불상의 상호에는 신라 불상의 위엄이 깨끗이 걷혀져 있고, 고려 불상의 무표정과도 확연히 다른 서민의 잔잔한 웃음이 자리하고 있다. 절 마당 끝에 서서 불상을 바라보아도 서로의 눈길은 마주 닿지만, 묘하게도 불상 앞쪽에 있는 석등과 석탑 사이에서 바라보면 상호가 더욱 화사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느낄 수 있다. 대원사지 옆에는 근래에 지어진 미륵세계사가 있어 중창불사에 한창이다. 옛날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을 보듬고 그들을 위해 대원사가 창건되었던 것처럼 미륵세계사가 다시금 사람들의 웃음을 되찾아 주었으면 좋겠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288호 / 2015년 4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