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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보시-하

대승보살 삶은 ‘받는 것’에서 ‘주는 것’으로의 전환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존재 그 자체가 편안함이 아니라 긴장을 선물하는 경우도 있다. 전에 어떤 건축가는 대학에서 미스 반 데어 로에라는 유명한 대가에게 배울 기회가 있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내 이름도 몰랐겠지만, 나는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만들려는 것이 그의 눈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긴장과 집중을 했고 그것이 내가 건축가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비약의 계기가 되어주었다.” 편안함이 아니라 긴장을 주었지만, 미스는 그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선물을 준 것이다. 자신이 준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는 채, 누구에게 주었는지, 무얼 주었는지도 모르는 채. 무외시도 그렇지만 이런 종류의 선물도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준다는 생각 없이 주는 선물이다. 존재 그 자체가 선물이 되는 그런 선물이다. 존재 그 자체가 선물이 될 수 있다면 아마도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선물일 것이다. 절대적 선물이고 무주상보시일 것이다. 아, 나도 누군가에게 그럴 수만 있다면!

매순간 무언가를 주지만
굳이 보시를 강조하는 건
늘 중생이익을 위해 사는
보살의 삶 닮으라는 의미

그러나 저런 대가가 옆에 있다고 그 대학을 함께 다닌 모두가 그의 존재를 선물로 받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심지어 애써 가르침을 설해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음은, 무언가를 가르쳐본 적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체험하는 것일 게다. 그러고 보면 선물은 항상 존재하지만 받을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받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선물이란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능력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다.

나의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수 있는 만큼, 반대로 나의 존재 자체가 누군가로부터 선물로 받은 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고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가 내게 준 선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받는 선물 가운데 ‘선물’로 받는 것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은 선물인 줄 모르고 받는 선물이다. 내가 오늘 아침에 밥을 먹은 것은 농사를 지어 쌀을 생산해준 이름도 모를 농민이 있었기 때문에, 그 벼를 품고 키워준 대지와 태양, 그리고 논 옆에 흐르는 물이 있었기 때문에, 흙 속에 사는 수많은 미생물과 흙에 스며든 영양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그걸 쌀로 도정해준 이, 그걸 내가 사는 곳으로 운반해준 이, 그걸 내가 살 수 있도록 해 준 이, 그리고 그들이 먹었을 어제저녁의 식사, 그 식사를 가능하게 해준 또 다른 농민과 대지 등등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게다. 그런 점에서 내가 밥을 먹는 것, 내가 공부하고, 내가 앉아서 글을 쓰는 것, 서서 강의하는 것 등등 순간순간의 존재 그 자체가, 우주적인 스케일로 이어진 저 수많은 이들이 준다는 생각도 없이 주는 선물이다.

이런 생각을 누구보다 멀리 밀고 간 것은 화엄학이었다. 의상 스님이 ‘법성게’에서 말하듯, ‘먼지 하나에도 시방삼세가 깃들어 있다(一微塵中含十方)’ 함은, 그 시방삼세에 기대어 그 먼지가 존재함을 뜻한다. 그 먼지의 존재는 내가 먹은 오늘 아침 밥처럼 혹은 그걸 먹고 있는 나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시방삼세의 우주적 스케일로 이어지는 무수한 존재자들의 연쇄로 인해 가능했던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 무수한 존재자들이 먼지의 존재를, 내가 먹은 밥의 존재를, 나의 존재를 선물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화엄학은 더할 수 없이 장대한 ‘존재론적 선물의 이론’이다.

먼지를 포함하여 모든 것의 존재는 시방삼세의 존재자들의 연쇄가 준 선물이다. 준다는 생각 없이 준 선물이다. 그렇기에 무주상보시는 어디 특별히 따로 있기 이전에 우리의 삶 속에 항상 있는 것이다. 나의 존재가 기대어 있는 것, ‘연기적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내게 존재를 선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연기에 대한 깨달음이란 자신의 존재가 매순간 자신의 삶이 이 우주적 연쇄의 존재자가 주는 선물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따라서 연기를 깨달은 이가 부처라면, 부처란 매순간의 존재와 삶이 거대한 스케일의 선물임을 알고 받는 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반면 깨닫지 못한 범인이란 그 기쁜 사실을 알지 못해서 기뻐할 기회를 갖지 못한 이들이지만 그렇게 깨닫지 못해도 여전히 존재를 선물로 받고 있는 이들일 것이다. 깨달으나 깨닫지 못하나 매순간의 존재를 선물로 받고 있음은 동일하다는 점에서 깨닫고 보아도 특별할 게 없다고 하는 것이겠지만, 그래서 범인과 부처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을 매순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얼마나 다른 것인지! 그늘을 나무의 선물로 아는 인디언들이나 그걸 모르는 백인들이나 똑같이 여름날 해를 피해 그늘로 들어가겠지만, 그늘을 만날 때마다 선물을 받는 이와 그렇지 못한 자의 삶이 같을 리는 없을 테니까.

부처와 중생이 이러하다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가 선물임을 알아차리는 만큼 부처가 되는 것이고, 그걸 알아차리는 능력만큼 부처에 다가가는 것이고, 그걸 통찰하며 사는 정도만큼 부처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의상대사는 “중생을 이롭게 하는 비가 허공에 가득하니, 중생들이 그 그릇[능력]의 크기에 따라 이익을 얻는다(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라고 했던 게 아닐까?

이렇게 생각을 밀고 나가 보니, 부처가 매순간의 존재가 선물임을 깨달은 이라면, 보살은 반대로 매순간의 존재 그 자체가 선물이 되게 하는 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재물을 남들에게 증여하고, 지혜를 남들에게 보시하는 이, 그러면서도 준다는 생각 없이 주는 이가 보살이라 하겠지만, 훨씬 더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차원에서 보살이 정의될 수 있다면, 존재 그 자체가 언제나 무주상의 선물이 되는 그런 이라고 해야 한다. 부처가 매순간의 삶을 오는 그대로(如如) 선물로 받아들이는 기쁨으로 긍정하는 이라면, 보살이란 매순간의 삶이 ‘옆’에 있는 존재에게 지혜로운 삶을 촉발하고 선물하는 이라고 해야 한다. 보시를 앞세운 육바라밀의 대승이란 이런 점에서 보면 ‘받는 이’로부터 ‘주는 이’로의 입장의 전환을 뜻하는 것이었다고 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 화엄학의 논법을 그대로 빌자면, 내가 알지 못하는 농부와 미생물이 나에게 존재를 선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존재를 선물하는 우주적 연쇄 속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나뿐 아니라 모든 것이 그럴 게다. 그런 점에서 사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준다는 생각도 없이 누군가에게 존재를 ‘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보살’이다. 그렇다면 굳이 따로 보시를 하고 선물하는 삶을 살려 할 필요가 있을까?

자기도 모르는 새 분노나 불안을 ‘주고’ 있는 이도 있는 것처럼, 우리 또한 항상 무언가 주고 있지만, ‘선물’이란 말과는 아주 다른 것을 주고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불법체류자’가 되어 손목이 잘려도 제대로 치료나 보상을 받지 못하는 이주노동자의 고통스런 삶을 ‘선물’하고 있을 수도 있고, 기초생활수급금을 받기 위해 부모와 연락도 해선 안 되는 장애인의 삶을 주고 있을 수도 있다. 선물이나 보시가 그저 ‘주는 것’과 다른 것은 이 때문일 것이고, 항상 이미 무언가를 주고 있는 보살들에게 굳이 보시를 설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부처의 깨달음이 자신이 받고 있는 게 무언지를 아는 깨달음이라면, 보살의 깨달음이란 게 있다면, 그건 자신이 주고 있는 게 무언지를 아는 그런 깨달음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중생들에게 좋은 삶을 주기 위해 자신의 삶을, 존재 자체를 거는 이, 그게 바로 보살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88호 / 2015년 4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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