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4. 제2칙 조주의 지도무난(1)

“20~30년 참구해도 깨닫지 못하면 내 머리를 베라”

▲ 80세의 조주 선사가 처음으로 한 절의 주지로 주석했던 곳이 중국 하북성 관음원이다. 가난했던 관음원은 현재 백림선사라 불리며 웅대한 가람을 갖춘 하북성 불교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백림선사 관음전 전경.

‘벽암록’ 제2칙은 당나라 때의 조주 종심(趙州從諗, 778~897) 선사가 문하의 수행승과 ‘신심명’의 앞 구절에 대해 문답한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조주 선사의 공안은 운문 문언(雲門文偃, 864~949) 선사의 공안과 함께 ‘무문관’, ‘벽암록’에 가장 많이 실려 있다. ‘무문관’ 48칙 가운데 조주 선사와 관련된 공안이 7칙, 운문 선사 관련 공안은 5칙이 수록되어 있고, ‘벽암록’ 100칙 중에는 각각 12칙(조주)과 18칙(운문)이 실려 있다.

‘벽암록’에 12칙 실린 조주 공안
‘무’자 화두 제일 공안으로 중시
일상언어로 수행자 교화한 조주
유연하게 상대 어리석음 일깨워

온 경전 동원해 진리 설명해도
달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해

“그림 속 떡이 아무리 많더라도
직접 안 먹으면 배부르지 않아”

‘벽암록’에 운문 선사의 공안이 더 많이 들어 있는 것은 ‘벽암록’ 100칙을 선별한 이가 바로 설두 선사이고, 설두 선사는 운문 선사의 4세손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조주 선사의 공안이 ‘벽암록’에 12칙이나 실려 있다는 것 자체가 조주 선사의 선적 역량을 말해 주는 단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원래의 부처(元古佛)도 진짜 부처(眞古佛)인 조주 선사에게 고개 숙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조주 선사의 선적 경지가 얼마나 출중한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조주 종심 선사는 당나라 말, 선이 한창 번성하던 시대에 임제 의현(臨濟義玄, ?~866) 선사와 함께 중국 북방에서 큰 역할을 한 거장이다. 산동성(山東省) 조주(曹州)의 학향(郝鄕) 출신이며 속성은 학(郝)씨이다. 만년에 하북성(河北省) 조주(趙州)에 있는 관음원(觀音院, 東院·柏林寺라고도 함)에 오랫동안 머물렀기 때문에 ‘조주 선사’라 불렸다.

어려서 출가하여 아직 구족계를 받지 않은 10대의 사미승 시절, 남전 보원(南泉普願, 748~834) 선사를 참례하고 제자가 되었다. 처음 남전 선사를 찾아뵈었을 때, 남전 선사는 마침 누워서 쉬고 있었다.

“어디서 왔는가?”
“서상원(瑞像院)에서 왔습니다.”
“서상(瑞像)을 보았는가?”

‘서상(瑞像)’은 상서롭고 원만한 모습의 불상을 말한다. 특히 전설상의 최초의 불상, 즉 인도의 우전왕이 전단 나무로 만들었다는 석가모니 상을 가리킨다.

“서상은 보지 못했지만, ‘누워 계신 여래(臥如來)’는 봅니다.”

여기서 ‘누워 계신 여래’는 눈앞의 남전 선사를 지칭한 것이었다. 남전 선사는 물었다.

“너는 주인이 있는 사미인가, 없는 사미인가?”
“주인이 있습니다.”
“어디에 있는가?”
“바라옵건대, 엄동설한에 존체 만복하소서.”

남전 선사가 곧 자신의 스승이라는 말이었다. 남전 선사는 조주의 그릇을 보고 제자가 될 것을 허락하였다. 조주는 남전 선사의 문하에서 수행에 진력했다. 그러다가 “평상심이 곧 도(道)”라는 남전 선사의 말에 깨달았다. 그의 나이 18세 때의 일이었다는 설이 있다. 깨달은 뒤에야 그는 숭산(嵩山)의 유리단에 가서 구족계를 받았다.

구족계를 받고 다시 남전 선사의 곁으로 돌아온 조주는 40년 가까이 스승을 모셨다. 스승 남전이 입적하자, 조주 선사는 3년상을 치른 뒤인 나이 60에 행각에 나섰다. 행각 길에 오르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했다. “일곱 살 아이라도 나보다 나으면 그에게 물을 것이고, 백 살 노인이라도 나보다 못하면 그를 가르치리라.” 이렇게 80세가 될 때까지 약 20년 동안 각지의 선승들을 찾아다니며 선문답을 나누었다. 조주 선사가 20년 동안 만난 유명한 선승으로는 백장, 위산, 임제, 약산, 도오, 운거, 투자 등을 들 수 있다.

80세가 된 조주 선사는 처음으로 한 절의 주지(住持)가 되었다. 그 절이 바로 하북성 조주의 관음원이다. 이후 40년간 승속을 교화하다가 120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관음원, 지금은 ‘백림선사(栢林禪寺)’라 불리며 웅대한 가람을 갖춘 하북성 불교의 중심지이지만, 당시에는 찢어지게 가난한 절이었다.

관음원 시절, 조주 선사의 가사는 낡아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을 뿐이었고, 잠자리는 낡은 갈대 돗자리에 목침 하나, 덮을 이불도 변변찮았다. 좌선하는 의자 다리 하나가 부러지자 타다 남은 땔감 나무를 새끼로 묶어 사용했다. 하북의 실력자 연왕(燕王) 이극용과 조왕(趙王) 왕용이 조주 선사에 귀의하여 극진히 모셨으나, 40년 주지하는 동안 시주에게 편지 한 통 보낸 일이 없었다.

임제의 ‘할’이나 덕산의 ‘방’에 비견하여 조주 선사의 선풍을 ‘구순피선(口脣皮禪)’, 즉 ‘유연한 입술로 상대의 어리석음을 통렬히 깨우치는 선’이라 한다. 단지 일상의 언어만으로 어떤 수행자도 자유자재로 교화한 그의 선의 원숙성·소탈함을 일컫는 말이다. 조주 선사의 유명한 ‘무(無)’자 공안은 종문 제일의 공안으로 중시되어 왔다.

그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법어 하나를 소개한다. 수행자라면 잊지 말아야 할 금언이다.

“문제만 삼지 않으면 번뇌는 없다. (…중략…) 오직 스무 해고 서른 해고 고요히 앉아서 참구하라. 그래도 깨닫지 못하면 내 머리를 베어라.”

<수시(垂示)>
“천지(天地)도 좁고 일월성신(日月星辰)도 일시에 캄캄하다. 설령 비 쏟아지듯 몽둥이로 후려치고 우레 같이 ‘할’을 질러 댄다 하더라도, 지고(至高)한 선(禪)의 핵심을 정확히 찌를 수는 없다.”
“삼세제불이라도 스스로 알 뿐이고, 역대 조사라도 온전히 제시할 수 없으며, 일대장교(一大藏敎)로도 다 설명할 수 없고, 눈 밝은 납승이라도 제 자신조차 구하지 못한다.”
“이러한 경계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가르침을 청할까? 부처를 운운하면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선을 운운하면 개망신이다. 이것은 오랜 세월 참구하여 도에 통달한 자라면 말할 필요조차 없다. 후학의 초심자는 ‘지극한 도’를 끝까지 참구해야 한다.”

‘수시(垂示)’는 원오 선사가 본칙을 시작하기 전에 수행승들에게 선의 요체를 들이대며 그들의 마음을 다잡아 분발시키기 위해 제시한 것이다. 원오 선사는 위의 수시에서 본칙의 핵심인 ‘지도(至道)’, 곧 ‘지극한 도’에 대해 간명·직절하게 제창하고 있다.

“천지(天地)도 좁고 일월성신(日月星辰)도 일시에 캄캄하다.” ‘지극한 도를 체득한 자’ 앞에서는 한없이 넓게 보이는 하늘과 땅도 형편없이 좁고, 해와 달과 별도 일시에 그 빛을 잃어 캄캄하다. 이것은 암암리에 조주 선사의 진면목을 말한 것이다.

‘지극한 도를 체득한 자’의 경계는 비교 대상이 없는 절대(絶大), 곧 무한히 클 수도 있고 무한히 작을 수도 있다. 이 절대(絶大)의 눈으로 보면, 하늘과 땅은 하나의 티끌에 지나지 않는다. 또 해와 달과 별이 아무리 밝다고 하더라도 ‘지극한 도를 체득한 자’의 한량없는 절대(絶大)의 광명에 비하면 반딧불 정도도 안 된다.

그래서 ‘능엄경’에서는 허공을 의지하여 세계, 곧 천지와 일월성신이 성립되지만, 허공을 대각(大覺)에 비교하면 큰 바다의 거품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대각인(大覺人), 곧 ‘지극한 도를 체득한 자’의 경계가 얼마나 절대(絶大)인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설령 비 쏟아지듯 몽둥이로 후려치고 우레 같이 ‘할’을 질러 댄다 하더라도, 지고(至高)한 선(禪)의 핵심을 정확히 찌를 수는 없다.” 덕산 선사의 30방으로도, 임제 선사의 벽력같은 ‘할’로도, 지고(至高)한 선(禪)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을 수는 없다. 그림 속의 떡이 아무리 많아도 직접 먹지 않으면 배부르지 않듯이, ‘절대’ 경계는 자신이 직접 체득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삼세제불이라도 스스로 알 뿐이고, 역대 조사라도 온전히 제시할 수 없으며, 일대장교(一大藏敎)로도 다 설명할 수 없고, 눈 밝은 납승이라도 제 자신조차 구하지 못한다.” 이 ‘절대’ 경계는 부처도 오직 자신만 알 뿐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줄 수가 없고, 달마대사라 하더라도 이 경계에 대해 제창할 수가 없기 때문에 단지 면벽 9년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 모든 경전을 동원하여 이 ‘절대’ 경계에 대해 설명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다. ‘지극한 도’는 ‘언어 이전의 소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45년 동안 한 마디도 설한 적이 없다고 했다. 또 천하의 눈 밝은 납승이라도 ‘지극한 도를 체득한 자’ 앞에서는 자기 자신조차 추스르기 어렵다.

“이러한 경계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가르침을 청할까?” 부처도 조사도 경전도 눈 밝은 납승도 도저히 손을 댈 수 없는 이 ‘절대’ 경계를 무슨 수로 구하겠다는 말인가? 구하려고 하면 할수록 천리만리 멀어진다. ‘지극한 도’는 어디에나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구하고 말고가 없다.

“부처를 운운하면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선을 운운하면 개망신이다. 이것은 오랜 세월 참구하여 도에 통달한 자라면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 ‘절대’ 경계에서는 ‘지극한 도’를 체득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부처의 ‘부’자만 말해도 흙탕물을 뒤집어쓴 듯이 오염되고, 참선의 ‘참’자만 입에 올려도 개망신을 당한다. 오랜 세월 참구하여 도에 통달한 자라면 ‘부처’니 ‘참선’이니 하는 말을 듣는 순간 놀라서 귀를 막고 도망갈 것이다. 일상이 그대로 부처의 움직임이고 온 천지가 깨달음의 도량인데 ‘부처’니 ‘참선’이니 하는 말이 붙을 자리가 어디 있겠는가? 자유의 나라에는 ‘자유’라는 말이 없다.

“후학의 초심자는 ‘지극한 도’를 끝까지 참구해야 한다.” 때는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초심자는 곧바로 ‘지극한 도’를 참구하라. 한 치의 틈도 없이 온몸으로 ‘지극한 도’를 붙잡으라.

장휘옥·김사업 오곡도명상수련원 원장 www.ogokdo.net

[1289호 / 2015년 4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