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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중생-상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개인과 전체, 개체와 집단, 혹은 개인과 공동체는 근대 사회의 정치나 경제는 물론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대립개념이다. 개인주의와 전체주의는 그런 대립을 표현하는 이념적 지향의 대표적인 이름이다. 그리고 이런 지향은 인간의 본성, 아니 생물의 본성과 결부되어 이해되기도 한다. 가령 개인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은 인간이란 이기적 본성을 가진 존재임을 가정하며, 다른 생물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반면 ‘전체란 부분의 합을 넘어 선다’고 보는 이들은, 개인의 이익을 넘어서서 행동하는 인간이나 생물들의 사례를 주목하며, 자기희생마저 감수하는 이타성을 주장한다.

몸속의 세포나 기관들이
서로 협조해 살아가듯이
중생은 분할가능한 개체가
하나로 모여 있는 집합체

어디서나 발견되는 이런 대립의 기저에는 ‘개인’ 내지 ‘개체’로 번역되는 ‘individual’이란 말이 자리 잡고 있다. individual은 분할을 뜻하는 divide에서 나온 ‘분할가능한(dividual)’의 반대말이다. 더는 분할할 수 없는 최소한의 단위, 그게 개체라는 것이다. 개인주의자는 그 유기체가 ‘분할될 수 없는’ 개인임을 강조하는 반면, 전체주의자는 유기체란 개인들로 ‘분할될 수 없는’ 전체임을 강조하며, 개인은 그 전체를 위해 복무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본다.

기이한 것은 원래 단어의 뜻을 보면 원자나 소립자처럼 더는 분할할 수 없는 최소단위에 적용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런 것을 individual이라고 하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개인이나 개체란 인간이나 생물들에 국한되어 사용하며, 대개는 유기체를 지칭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는 유기체가 생명의 기본 단위라고 보았던 19세기 서구인들의 생각과 결부되어 있다. 철학자 미셸 푸코가 지적한 바 있듯이, 19세기에 이르면 ‘생명’이라는 개념이 서양인의 사고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 이전에 생물에 대한 연구는 광물을 연구하는 지질학과 구별되지 않은 채, ‘자연사’라고 불리는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공룡이란 생물의 연구와 화석에 대한 연구가 하나임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사는 암석과 토양, 바다, 혹은 삼엽충과 공룡, 현화식물과 포유류 모두를 포괄하는 영역이었다. 그런데 19세기에 이르면, 생명이란 개념이 부상하면서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 간에 근본적 단절이 도입된다. ‘생물학’이란 말이 그때 새로 탄생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유기체는 ‘더는 분할할 수 없는(in-dividual)’ 것이다. 내 몸을 둘로 분할하면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죽는다는 의미에서, 유기체인 이 몸은 분할불가능한 것이다. 개체나 개인은 생명체의 분할불가능한 최소단위를 뜻하는 게 된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세포가 발견됨에 따라 세포가 생물의 최소단위라는 생각이 자리잡게 되고, 20세기로 넘어오면 세포가 유기체의 몸에서 분리되어 배양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체는 분리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분리가능한(dividual) 100조개의 세포들의 집합체란 점에서 multi-dividual이라고 해야 한다. multi-dividual이란 수많은 dividual들이 무리(衆)로서-함께-살아가는(生) 집합체란 의미에서 ‘중생(衆生)’을 뜻한다. 요컨대 내 몸은 100조개의 세포들이 무리로서-함께-살아가는 ‘중생’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인간 뿐 아니라 모든 다세포생물이, 생물학적 의미에서 정확하게 ‘중생’이다.

다세포생물 뿐만 아니라 각각의 세포 또한 그렇다. 미생물학자 린 마굴리스는 동물 세포 안에 존재하는 미토콘드리아가 어떤 홍색세균과 유전자구조가 정확히 일치함을 발견했다. 그는 이를 어떤 박테리아가 다른 박테리아(홍색세균)를 잡아먹었는데, 잡아먹힌 놈이 ‘소화불량’인 채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잡아먹은 놈의 일부가 되었음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뜻하지 않은 ‘공생’이 시작된 것이다. 그 뒤에 식물세포의 엽록체도 어떤 녹색세균과 유전자 구조가 일치함이 발견된다. 이 역시 다른 박테리아에 잡아먹힌 녹색세균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 공생체가 된 것임을 뜻한다. 이들 뿐 아니라 모든 세포소기관들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핵은 아직 실험적으로 증명되진 않았지만, 핵 또한 그럴 것이라고 가정하는 게 합당하다. 먹고 먹힌 것의 공생체란 의미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반대로, 핵 같은 세포소기관은 세포로부터 분할가능하기도 하다. 가령 체세포복제란 복제하려는 몸의 체세포에서 핵을 분리하여, 어떤 수정란의 핵을 떼어낸 자리에 대신 이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하나의 세포조차 수많은 박테리아들이 무리지어-사는 ‘중생’인 것이다. 내 몸은 그 자체로 중생인 세포들이 100조개 가량 모여서 내 몸이 된 것이다. 다세포생물의 몸은 모두 그런 공생체들이 모여서 구성된 ‘중생들의 중생’이다.

단순한 박테리아에서 세포소기관을 갖는 복잡한 세포로의 진화, 핵이 없는 원핵세포에서 핵이 있는 진핵세포로의 ‘진화’, 단세포생물에서 다세포생물로의 진화는 모두 소화불량으로 시작된 이 공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이를 일러 ‘공생진화’라고 한다. 먹고 먹히는 관계에서 시작된 공생을 실제로 관찰하여 보고한 이가 있다. 한국계 미국인 전광우 박사는 자신이 실험하기 위해 배양하던 아메바의 대부분이 치명적인 박테리아에 감염되어 죽어버린 것을 발견했는데, 그중 살아남은 놈들을 골라 다시 배양했다. 그리곤 그 놈들에게서 감염체인 박테리아를 제거했다.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다, 짐작대로 아메바 역시 죽어버렸다. 치명적 ‘침입자’로 온 놈과 어느새 한 몸이 되어 공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개체와 공동체, 개인와 집단을 대립된다고 보는 것은 이런 생물학적 지식에 비추어보면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우리가 ‘개체(individual)’나 ‘개인’이라고 부르는 모든 생명체가 사실은 항상-이미 공동체요 집합체인 것이다.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것이 ‘본성’의 차원에서 명확하게 대비될 수 있다는 생각도 착각이다. 말해보라, 어떤 박테리아가 다른 박테리아를 잡아먹었으나 소화하지 못해 살아남아 시작된 ‘공생’은 이기적인 것인가 이타적인 것인가? 박테리아에 감염되어 간신히 살아남은 아메바와 그 치명적 박테리아의 공생적 행위는 이기적인 것인가 이타적인 것인가?

모든 개체는 집합체다. 많은 ‘분할가능한’ 것들이 모여서 하나의 개체를 이룬 것이다. 복수의 요소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개체가 되는 것을 ‘개체화’라고 한다. 개체화를 통해 각각 존재하던 것들은 하나의 개체 속으로 말려들어간다. 그렇게 말려들어가 하나의 개체를 이룬 무리, 그게 곧 ‘중생’이다. 즉 중생이란 수많은 것들이 하나의 ‘무리(衆)’를 이루어 살아가는(生) 개체이고, 그 자체로 하나의 집합체를 이루는 개체다. 무리인 채 하나인 생명체다.

무리를 이루어 살아간다 함은 무리를 이룬 것이 서로 간에 협조하며 무언가를 주고받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존재함을 뜻한다. 가족이나 마을이 서로 간에 도우며 살아가듯이, 아니, 그보다 더 강한 의미에서, 내 몸의 세포나 기관들은 서로 협조하며 살아간다. 무언가를 주고 받으며. 허파는 위장에게서 영양소를 받고, 위장이나 다른 기관들에 산소를 준다. 심장은 그 영양소와 산소가 포함된 피를 돌려주고, 그 피를 받아 활동하는 뇌는 입력된 정보를 분석하고 처리하며, 그렇게 처리된 것을 근육에 전달한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속한 가족이나 마을 뿐 아니라, 나의 몸 자체도 하나의 공동체다. 수많은 기관, 수많은 세포들이 순환적인 계를 이루어 무언가를 주고받으며 사는 공동체다. 나의 세포 하나하나도 또한 공동체다. 핵과 미토콘드리아, 리보좀, 소포체 등의 소기관들이 서로 협조하여 무언가를 주고받으며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순환시키며 살아가는 공동체다. 동일한 의미에서 개개의 인간이나 동식물만 중생인 게 아니라, 가족도 중생이고, 마을도 중생이며, 내 몸도, 심장이나 허파도, 세포도 모두 중생이다.

사실 생명이 있는 것만 무리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생명이 없는 것도 구성요소들을 보면 무리를 이루어 존재한다. 그래서 생명 없는 것을 중생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이 구별되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자극으로 인해 자신의 신체 안에 발생한 변화를 지각하고, 그에 대해 유리한 방식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는가 여부에 따라서다. ‘정식(情識)’이 있다 함은 이런 의미다. 이 능력은 공동체 내지 공생체적 관계를 유지하거나 변화시키는 능력이기도 하다. 중생으로 번역된 범어 삿트바(sattva, ‘살타(薩陀)’)라는 말은 나중에 이런 생명력을 강조하면서 ‘유정’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유정으로 제한하든지 무정까지 확대하든지, 중생이란 말은 모든 개체들이 항상-이미 집합적으로 생존하는 공동체임을 탁월하게 표현해주는 말이란 점에서 매우 ‘현대적’이라 할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공동체다. 이런 점에서 중생이란 개념은 하나의 존재론을 포함하고 있다. 모든 존재자는 그 자체로 공동체라는 그런 존재론을.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89호 / 2015년 4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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