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칙과 착어>
(본칙은 굵은 글씨로 표기했고, 본칙의 각 구절에 대한 원오 선사의 짤막한 코멘트인 착어는 괄호 속에 넣었다.)
조주 화상이 수행승들에게 제창하였다. (← 이 늙은이, 무슨 짓을 하는고? 당치 않은 말을 하며 억지 부리지 마오.)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다(至道無難). (←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다.)
간택만 하지 않으면 된다(唯嫌揀擇). (← 눈앞의 이것은 무엇인가? 삼조 대사가 아직 있군.)
이런 말을 하는 순간 이미 간택이고 명백이 되어 버린다. (← 이랬다저랬다 교활하구나. 잘난 체하지 마라. 물고기가 헤엄치면 물이 흐려지고, 새가 날면 깃털이 떨어진다.)
나는 명백에도 머물지 않는다. (← 도적의 정체가 탄로나 버렸네. 이 늙은이, 어디로 갈 참인가?)
너희들은 명백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가?” (← 허점을 드러내었군. 만만찮은 놈이 한 명 정도는 있는 거야.)
그때 한 승이 물었다.
“이미 명백에도 머물지 않는데 무엇을 소중히 여기겠습니까?” (← 한 방 먹여야 한다. 혀가 입천장에 붙어서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구나.)
조주 화상이 말했다.
“나도 모른다.” (← 이 늙은이를 때려눕히려 했더니, 삼천 리 밖으로 멋지게 도망쳤네.)
승이 말했다.
“화상은 모르신다면서 어째서 명백에 머물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까? (← 자, 어디로 도망가야 하지? 나무 꼭대기까지 쫓아갈 거야.)
조주 화상이 말했다.
“질문은 그것으로 되었다. 절하고 물러가라.” (← 도망칠 묘수가 있었군. 이 노련한 도적아!)
〔참구〕
<본칙> 조주 화상이 수행승들에게 제창하였다. (착어 ← 이 늙은이, 무슨 짓을 하는고? 당치 않은 말을 하며 억지 부리지 마오.)
모든 것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정지·고정된 모습이 아니다. 눈앞의 항아리는 김치를 넣으면 김칫독이지만, 용변을 보면 요강이다. 또한 그것은 아이들에게는 장난감이지만, 그 속의 개미에게는 커다란 동굴이다. 어른들은 장난감으로 쓰이고 동굴로 보여도 그것은 항아리라고 믿지만, 아이들은 장난감을 항아리라 한다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렇다면 눈앞의 저것은 항아리가 아니다. 물론 장난감도 아니고 김칫독도 요강·동굴도 아니다. 저것은 무엇인가? 뭐라고도 말할 수 없다. ‘개구즉착(開口卽錯)’, 즉 무엇이라 말하는 순간 틀린다. 어느 무엇으로도 정지·고정되어 있지 않아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것, 이것이 곧 공(空)이며 모든 것의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다. 정지·고정되어 있지 않는 ‘있는 그대로’를 정지·고정시키는 것이 바로 말(언어)이다. ‘김칫독’이라는 말은 저것을 늘 김칫독으로 고정시켜 버린다. 일상적 생각은 말의 연쇄 작용으로 이루어지며 아무리 진행되어도 말이 보여 주는 관념 이외의 것에 이를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말에 의해 이루어지는 세계는 끝없는 분별, 이론적인 알음알이의 세계이다. 말에 빠져 들면 들수록 진리에서 멀어진다. 그래서 선은 말을 초월하여 ‘있는 그대로’를 보고자 한다. 선이 말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말에 의한 구속을 바로 그 말로써 해방시킬 목적으로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원오 선사는 조주 선사가 문하의 수행승들에게 제창하는 것에 대해, “이 늙은이, 무슨 짓을 하는고? 당치 않은 말을 하며 억지 부리지 마오”라는 착어를 붙였다. 말이 가져올 폐해에 대해 경고한 것이다.
비가 오면 우산이 잘 팔리고, 햇빛이 나면 양산이 잘 팔린다. 그런데 이 이상 더 무엇을 말하겠다고 판을 벌리는가? 보이는 것 들리는 것 그대로가 진리인데 새삼스레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하는가? 괜히 당치 않은 말을 하여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마라. 이렇게 원오 선사는 애초부터 조주 선사의 제창 자체를 송두리째 빼앗아 버린다.
<본칙>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다(至道無難). (착어 ←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다.)
중국 선종의 제3조 승찬(僧璨, ?∼606?) 대사의 저작으로 알려진 ‘신심명(信心銘)’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된다.
“지도무난(至道無難),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다.
유혐간택(唯嫌揀擇),
간택만 하지 않으면 된다.
단막증애(但莫憎愛),
싫어하고 좋아하지만 않으면,
통연명백(洞然明白), 확연히 명백하다.”
조주 선사는 이 구절, 특히 앞의 두 구절을 자주 거론한 듯하다. 여기뿐 아니라 ‘벽암록’ 제57·58·59칙의 본칙에서도 앞 두 구절이 주제로 등장하고 있다.
승찬 대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출가하기 전에 2조 혜가(慧可) 대사를 찾아갔다. 혜가 대사는 그가 나병(癩病)에 걸린 것을 보고 말했다.
“너는 나병 환자인데, 나를 만나서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승찬이 말했다.
“몸은 병들었지만, 병자의 마음과 화상의 마음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들은 혜가 대사는 그가 보통이 아님을 알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후에 승찬은 나병의 공(空)한 이치를 깨닫고 혜가 대사의 법을 이어 중국 선종의 제3조가 되었다.
병의 품성은 원래 공(空)하다. ‘공’은 자기(自己)가 없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자기’가 없으면 온 천지가 ‘자기’인데, 어디에 병이라는 품성이 따로 있겠는가? 자기를 방하(放下)하는 순간 나병도 홀연히 낫는다. 아니, 낫고 낫지 않고가 없다. 온 천지가 ‘지극한 도’인데.
‘나’가 없을 때 세상은 자기 아닌 것이 없다. 분별없는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보라. 온 천지가 ‘지극한 도’이고 ‘자기’이다. 보면 보이는 그대로, 들으면 들리는 그대로,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자기’이고, 이것 이대로가 ‘지극한 도’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 ‘지극한 도’ 속에 살고 있지만 스스로가 알지 못할 뿐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살지 못하듯이 우리도 ‘지극한 도’를 떠나서는 살지 못한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지극한 도’이다. 목마를 때 물 마시고, 배고플 때 밥 먹는 것이 도이다. 그래서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원오 선사는 이 구절에 대해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다”는 착어를 붙이고 있다. ‘지극한 도’, 곧 ‘진리’에 쉽고 어려움은 없다. ‘진리’라고 해서 특별한 어떤 것이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소나무는 저절로 곧고, 가시나무는 저절로 굽었다(松自直棘自曲). 이렇게 있는 그대로가 ‘지극한 도’의 단적인 모습이다.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다.” 이 한마디가 ‘전통적인 참구해야 할 화두’이다. 이에 대한 견처(見處, 화두에 대한 자신의 경지)를 보여 봐라.
여기서 잠깐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위의 내용을 읽은 독자들 중에는, 지금까지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다”에 대해 설명을 다 해 놓고는 새삼스레 무슨 견처를 보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이가 있을 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어디까지나 달을 가리키는 친절한 손가락에 불과했을 뿐, 달을 직접 안겨준 것은 아니다. 달은 어느 누구도 대신 안겨 줄 수가 없다.
화두를 직접 참구해서 자신의 경지를 얻은 것과 화두에 대해 머리로 이해한 것은 천양지차다. 위의 설명을 통해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다”에 대해 안 것은 머리로 안 것이다. 그것을 견처로 보이는 한 그는 평생 화두를 뚫지 못한다.
두 사람이 똑같은 견처를 보였는데도 스승은 한 사람의 견처만 인정할뿐, 또 한 사람의 견처는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왜 그럴까?
‘백화춘지위수개(百花春至爲誰開)’라는 게송이 있다. “봄이 되면 온갖 꽃들은 누구를 위해서 피는가?”라는 뜻이다. 봄이 오면 갖가지 꽃들이 만발한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서 필까?
꽃은 누구를 위해서 피지 않는다.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고 타인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러한 이유와 당위를 생각함이 없이 ‘그냥’ 필 뿐이다. 아니 ‘그냥’이라는 생각조차 없이 온 존재를 다해 핀다. 이와 같은 상태를 선에서는 ‘무심(無心)’이라고 부른다. 꽃은 무심(無心)히 피는 것이다.
위의 게송에 대해 “꽃은 무심히 핀다”고 두 사람이 똑같이 말했다. 언어 표현의 겉모습은 똑같다. 그러나 한 사람은 설명을 듣고 머리로 이해한 것을 말했고, 또 한 사람은 ‘그냥’ 피어 있는 꽃이 되어 말했다. 전자에게는 무심을 개념적으로 이해하여 대상화하는 ‘나’가 있지만, 후자는 무심 그 자체가 되어 ‘나’가 없다.
종이에 적힌 문장으로서는 같은 말이지만, 말하는 사람의 온몸과 육성에 실린 그 말의 메아리는 차원이 다르다. 눈 밝은 스승은 그 점을 놓치지 않는다. 제자가 독참하러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그 제자의 심중을 꿰뚫어 본다는 것이 선의 스승이다.
자기를 방하한 자가 보면 ‘지극한 도’는 참으로 쉽다. 누구라도 언제 어디서나 얻을 수 있다. 아니 얻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느냐가 문제다. ‘그냥’ 온 존재를 다해 피는 꽃이 되고 싶지 않은가?
장휘옥·김사업 오곡도명상수련원 원장 www.ogokdo.net
[1290호 / 2015년 4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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