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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찰의 향탄봉산 관리

조선후기 산림황폐의 비극 피하기 위한 산 증거

▲ 1902년에 향탄봉산으로 지정된 문경 김용사의 들머리 숲.

조선 조정의 산림시책은 주로 소나무재와 땔감의 원활한 조달에 초점을 맞추었다. 건축재와 조선재로 쓸 소나무 조달용 산림시책은 송목금벌(松木禁伐)로 통칭되는 소나무 행정[松政]이었다. 연료조달 시책은 조정의 각 관사에 쓸 관용 땔감은 관용시장(官用柴場)에서, 각 능원용 땔감은 향탄산에서 조달되게끔 분리하여 시행했다.

왕실능원 땔감 조달 위해
사찰숲 향탄봉산으로 지정

경기 일원 몰려 있다가
조선후기 남부지방 집중

사찰이 지정을 요청하고
산림관리까지 직접 맡아

산림황폐의 비극상황에서
양반 수탈 피할 유일 대안

조선 조정은 능원의 향탄산을 대부분 경기 일원에서 획정하였지만, 21대 왕 영조부터는 원거리에 위치한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물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시도도 잠시, 정조 이후에는 대부분의 향탄산은 남부지방의 사찰림에 집중되었다. 남부지방의 사찰림에 집중된 이유는 경기 일원에서는 더 이상 향탄산으로 획정할만한 산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산림황폐가 심화되어 여타 지역에서도 능원의 제향자재를 조달할 향탄산을 물색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 상황과 맞물려 조선 왕실은 상대적으로 잘 보전된 사찰림을 향탄산의 대상지로 주시했다.

사찰의 향탄산 개입은 율목봉산보다 더 늦게 시작되었다. 연곡사 일대가 최초의 율목봉산으로 지정된 시기가 1745년(영조 21년)임에 비해 동화사의 팔공산 일대가 향탄봉산으로 지정된 시기는 1880년(고종 17년)이었다. 그러나 향탄봉산에 앞서 사찰림의 향탄산 지정 시도는 약 100년 먼저 있었다. 조선 왕실은 운문사의 운문산을 원릉(1776년 축조)의 향탄산으로 고려했지만, 최종적으로 남원 내외산과 광양 백운산을 향탄산으로 지정(승정원일기 정조즉위년)했기 때문이다.

▲ 1902년에 향탄봉산으로 지정된 문경 김용사의 들머리 숲.

사찰림을 향탄산의 대상으로 고려한 지 20여년 후, 사찰은 능원의 향탄 조달에 직접 관여하게 된다. 그 흔적은 전남 영암 도갑사입구의 금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금표에는 “건릉향탄봉안소 사표내금호지지(健陵香炭奉安所 四標內禁護之地)”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서, 도갑사가 건릉에 필요한 향탄을 생산하기 위해 4표내의 산림을 금양했음을 알 수 있다. 정조가 묻힌 건릉은 1800년에 축조되었고, 1821년에는 왕비가 합장되었으니 도갑사가 향탄봉안소로 지정된 시기는 1800년 이후라 추정된다. 도갑사의 건릉향탄봉안소는 현재까지 보고된 표석 중 사찰의 향탄산으로 명기되어 있는 첫 사례이지만 향탄봉안소의 정확한 역할은 확인할 수 없다.

사찰이 특정 능역의 향탄봉산을 관리했음을 나타내는 문서는 고종 17년(1880년)의 ‘예조첩지’이다. 이 ‘첩지’에는 “수릉의 능침사로 대구 동화사를 정하고, 석민헌으로 하여금 수릉에 공급하는 향탄봉산수호총습과 팔도승풍규정을 위한 도승통자로 임명한다(禮曺 釋敏軒爲  綏陵造泡屬寺 慶尙道大邱桐華寺 兼 香炭封山守護總攝八道僧風糾正 都僧統者  光緖六年 十一月)”고 밝히고 있다. 사찰림 관련 유물 중에 이 첩지는 왕실이 특정한 능원(수릉)에 향탄을 조달하기 위해 특정 사찰(동화사)에 향탄봉산의 관리를 책임지운 가장 이른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동화사에는 이 첩지 이외에도 향탄봉산을 나타내는 2개의 표석도 있다. 동화사 입구에 있는 ‘수릉향탄금계(綏陵香炭禁界)’ 표석과 팔공산 수태골 등산로에 있는 ‘수릉봉산계(綏陵封山界)’ 표석이 그것이다. 이 두 표석은 팔공산 일대가 수릉(헌종의 아버지 익종의 능)의 향탄봉산이었음을 오늘날도 전하고 있다.

동화사(1880년)의 향탄봉산 이후로, 해인사(1891년), 송광사(1900년), 안정사(1900년), 예천 용문사(1900년), 김용사(1902년) 등이 향탄봉산 관리 사찰로 지정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구한말의 짧은 시기(1900~1902년)에 4개소의 사찰이 향탄봉산으로 지정된 점이다. 왜 이 시기에 사찰 향탄봉산이 집중되었을까? 그 답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향탄산’ 항목에서 엿볼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향탄산의 소재지를 “사원(寺院)의 영역 안과 국유산(國有山)”이라고 밝히는 한편, “사찰에서는 주변의 산에 주민들을 못 들어오게 하고 봉산(封山)으로 해줄 것을 청원하는 한편, 마을사람들로부터 세금을 받을 수 있는 방편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이때에는 사찰의 승려들이 그곳 삼림을 간수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해인사에서 김용사에 이르기까지 20여년 사이에 여러 곳의 사찰림이 향탄봉산으로 지정된 이유는 나라 전역으로 산림황폐가 심화되어 사찰의 산림조차 도벌꾼의 마수는 물론이고 토호의 탐욕에서 지켜낼 수 없는 지경이 된 시대적 배경을 담고 있다. 이런 시대상황은 송광사와 해인사가 소장하고 있는 향탄봉산 문서와도 합치된다.

‘조계산송광사사고 산림부’ ‘향탄봉산’의 절목에는 “근래에 인심이 선량하지 못하더니 모든 서민이 준동하여 두려워하거나 거리낌이 없이 법을 어겨 장사지내거나 나무를 베어내는데도 금지할 수가 없어 민둥산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 절의 형편을 생각하니 지극히 놀랍고 한탄스러우니 지금 이후로는 본사를 홍릉에 부속시켜 향탄봉산으로 삼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해인사의 명례궁 완문(1891년)으로 확인된다. 이 완문의 주 내용은 해인사가 세자궁(순종)의 원찰이며 과도한 요역의 폐단을 혁파한다는 내용을 10개의 조목으로 지시하고 있다. 완문의 두 번째 조목은 “본사 사처 국내(局內)는 축원하는 향탄봉산으로 획하하니 동으로는 가질령, 서로는 마정봉, 남으로는 무릉지, 북으로는 비지령에 이르기까지 하사하여 표시하며, 능원의 수림과 같으니 일체 엄금하며 토호와 이속배·고노 등이 그 위협을 믿고 무단으로 난입하여 베어가면 해당 소임의 승려가 본동에 직보하여 형조로 이첩해 원배를 거행한다”고 밝히고 있다.

유사한 예는 용문사(예천)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용문사는 인빈궁(仁嬪宮)의 원당이자, 소헌왕후와 문효세자의 태실을 봉안한 태실수호 사찰이었다. “왕실에서 특별히 사방의 경계를 정하고 사패금양(賜牌禁養)하여 수호한 유래가 오래더니, 근자에 들어 금지하는 기강이 소홀해지고 백성들의 풍습이 무상(無常)해서 사방의 경계 안에서 제멋대로 묘를 만들어 매장하고 있음에 특별히 홍릉(洪陵)의 향탄봉산(香炭封山)으로 삼으라”는 내용이 장례원에서 용문사에 내려 보낸 완문에 기록되어 있다.

송광사와 해인사와 용문사(예천)의 기록은 이들 사찰이 사찰림을 지킬 목적으로 향탄봉산을 자임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향탄봉산을 자임한 또 다른 이유는 왕실 원당의 봉산 자격으로 사찰에 부과된 다양한 잡역을 회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송광사의 향탄봉산 절목은 율목봉산 절목과 달리, 잡역과 사역을 줄이라는 내용이 3분의 2이고, 향탄봉산의 관리와 보호에 대한 규칙은 오히려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율목봉산의 절목에 비해 그 내용이 상대적으로 간략한 이유는 봉산의 관리와 운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이미 율목봉산의 절목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

▲ ‘김용사소유지(金龍寺所有地)’라 새겨진 향탄봉산 표석.

▲ 김용사 향탄봉산 표석 뒷면. ‘향탄봉산사패금계 광무6년10월(香炭封山賜牌禁界 光武六年十月)’이라 새겨져 있다.

한편 가장 뒤늦게 향탄봉산으로 지정(1902년)된 김용사는 문서 대신에 들머리 입구의 숲 한편에 세워진 금표로 향탄봉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표석의 전면에는 ‘김용사소유지(金龍寺所有地)’가 새겨져 있고, 표석 후면에는 ‘향탄봉산사패금계 광무6년10월(香炭封山賜牌禁界 光武六年十月)’이 새겨져 있어서 1902년 나라에서 지정한 향탄봉산 사패지임을 전하고 있다.

사찰이 그 힘든 격동의 세월을 견뎌내고자 원당을 자임하면서까지 사찰림을 지켜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 이유는 그나마 온전하게 지켜온 사찰림을 향탄산으로 활용하길 원했던 왕실의 실리적 이유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찰 역시 부과된 막중한 요역을 감면 받고, 왕실의 권위를 빌려 주변 권세가들과 산촌주민들에 의한 사찰림의 도남벌과 산지 훼손을 막기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스스로 향탄봉산을 자임했을 수도 있다. 전자의 추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례는 송광사의 ‘조계산송광사사고 산림부’에서 확인할 수 있고, 후자의 추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례는 해인사나 예천 용문사의 완문에서 확인된다.

조선후기 사찰의 향탄봉산 관리는 18세기 후반부터 나라 전역으로 확산된 산림황폐의 비극적인 상황과 양반 권세가는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조차 사찰림을 호시탐탐 노렸던 냉혹한 20세기 초엽의 현실을 반추할 수 있는 산 증거라 할 수 있다.

전영우 국민대 산림환경시스템학과 교수  ychun@kookmin.ac.kr


[1290호 / 2015년 4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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