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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장흥 보림사 사천왕상

기자명 신대현

신라·고려시대 ‘온화함’과 조선 후기 ‘위엄’ 동시에 드러나

▲ 장흥 보림사 사천왕상.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서방 광목천왕, 동방 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 북방 다문천왕. 모두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채색 가득한 갑옷을 입고 있다.

불교미술 가운데 본질적으로 가장 화려하게 만들어지고 꾸며지는 것이 사천왕상(四天王像)이다. 대체로 불보살상이나 다른 불교조각 등은 모두 외형이 검박하고 부드러운 표현으로 일관되게 마련이다. 불상에 내재해 있는 자비와 위엄 그리고 섬세함도 이런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 있다. 그래야 불보살 본래의 면목에도 부합하고 이를 본 사람들도 감복해 귀의하는 마음이 우러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사천왕상
소조 아닌 목조상으로 희소가치
1515년 조성기록 명확히 전해져

신라·고려 양식 전통 갖추면서
조선 후기 양식 선도하고 있어
불교조각사 비중 매우 큰 사례
임진왜란 등 전란 후 변화 유추

인왕상 함께 조성된 점도 이례적
과장 대신 부드러운 곡선미 강조
사천왕상과 동시대 조성 확실시

그에 비해서 사천왕상은 처음부터 위압적으로 만들어진다. 중후한 갑옷을 걸치고 칼 같은 날카로운 무기를 쥐며 험악한 얼굴 표정을 짓곤 한다는 점에서 여느 불교조각과는 다르다. 불법(佛法)과 사찰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수호하고 악도들을 물리치기 위한 수호신장들의 우두머리로서 이러한 모습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이었다. 적과 싸우려는 사람이 웃으며 두 상대에게 두 팔을 벌려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위압적인 무장(武裝)과 상대를 떨게 하는 험악한 표정만 보면 사천왕상이란 아주 거칠고 우악스런 존재일 것 같지만, 가만히 보면 뭔가 끌리는 부분이 있다. 그건 바로 화려함과 세련미가 있어서다. 사천왕상이 단순히 전사(戰士)로서만이 아니라, 외호신중으로서 사람들이 불세계(佛世界)와 사찰을 찾을 때 가장 먼저 나와서 마중 나오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런 차이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미술의 깊은 맛은 바로 이런 데 있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무장(武將)인 사천왕상에 화려한 스타일과 섬세한 이미지가 정착된 것은 특히 7세기 중국의 수당(隋唐) 이후다. 많게는 수 십 개의 작은 나라들이 저마다 약간의 영토를 지키려 오랫동안 서로 치열하게 싸우던 전란의 시대를 마감하고 처음으로 대륙을 통일했던 수나라, 그리고 곧 이어서 400년을 통치했던 당나라에서는 전쟁보다는 평화를 갈구했고, 사천왕상에도 이런 시대적 분위기가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 시대 사천왕상은 갑옷도 실전용이 아니라 평상복 또는 의전용으로 바뀌고 무기도 상대를 위협하며 겨누는 자세가 아니라 그저 장식마냥 달고 있다. 얼굴도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려 큰 소리로 호령하는 표정에서 아주 점잖고 위엄 넘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한마디로 최고의 신사, 멋쟁이 같은 모습으로 바뀐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감은사 금동 사리장엄에 조각된 사천왕상에서 이런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전남 장흥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에는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철조 비로자나불좌상, 남북 삼층석탑, 석등, 보조선사 창성탑 및 비, 동서 부도 등 우리 불교미술을 더욱 풍요롭고 빛나게 하는 문화재들이 아주 많다. 신라 구산선문 중 하나인 가지산문의 중심사찰이었다는 위상이 고스란히 문화재로 표현된 것인데, 사실 이렇게 무형의 역사에 걸맞은 유형의 문화재가 같이 전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 사천왕상이 자리잡고 있는 장흥 보림사 사천문.

앞서 든 문화재들 외에 사천문(四天門)에 있는 사천왕상도 조선시대 불교미술에서 아주 의미 있는 자리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조선시대 후기 사찰 건축의 단정함이 잘 배어 있는 보림사 사천문을 들어서면 좌우 양쪽에 각각 2위씩 들어선 사천왕상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이 사천왕상들은 현재 전하는 우리나라 사천왕상 중에서 가장 시대가 앞선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780년에 쓰인 보림사 천왕금강 중신 공덕기(寶林寺天王金剛重新功德記) 현판에 처음 만든 해가 1515년이라고 나오니, 지금으로부터 꼭 500년 되었다. 긴 시간을 지나오며 1668년과 1777년에 중수했으나 처음보다 그다지 바뀌지는 않은 것 같고 이런 모습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조선시대 불상을 통 털어서 봐도 이렇게 연대가 오래되고 확실한 예는 찾기 어렵다.

재질이 목조라는 점도 특징 중 하나다 이 사천왕상들은 대략 높이가 293cm나 된다. 이처럼 거상을 목조로 만들기는 재료 구득이나 조각 기법에서 쉽지 않아서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고, 현재 전하는 조선시대 사천왕상 대부분은 흙으로 빚은 소조상(塑造像)이다.

목조 사천왕상의 계보는 이 보림사 사천왕상을 필두로 청도 적천사 사천왕상(1690년), 남해 용문사 사천왕상(1702년), 하동 쌍계사 사천왕상(1704년) 등이 뒤를 잇는다. 사천왕상과 함께 있는 금강역사상 2위도 목조인데 높이도 250cm나 될 정도로 큰데다가 과장을 피하고 부드러움을 강조한 조각 기법으로 볼 때 사천왕상과 같은 시기에 만든 게 틀림없어 보인다. 사천왕상과 더불어 인왕상이 함께 조성된 경우도 드문 예다. 자칫 전형적이기 쉬운 사천왕의 배치에 이 인왕상이 더해지면서 배치에서 단조로움을 벗어나 한층 실감을 느끼게 해준다.

보림사 사천왕상의 배치는 사천문에 들어서서 오른쪽 공간에 양손으로 칼을 든 동방 지국천왕이, 그  옆에 한창 비파를 연주하는 중인 남방 증장천왕이 앉아 있다. 그 앞에 금강역사상이 있다. 왼쪽은 역시 앞쪽에 또 다른 금강역사상이 서있고 그 뒤로 두 손으로 단검과 칼을 든 서방 광목천왕이, 옆에 오른손으로 당(幢)을 잡고 왼손바닥에 보탑을 올려놓은 북방 다문천왕이 앉아 있다.

대체로 사천왕상이 사천왕문 같은 전각 안에 배치될 때는 동방 지국천왕과 남방 증장천왕, 서방 광목천왕과 북방 다문천왕이 각각 나란히 짝을 이루는 배치로 놓는 게 일반적이다.

다만 1853년에 그린 구례 천은사 아미타탱화에는 동방 지국천왕과 북방 다문천왕, 서방 광목천왕과 남방 증장천왕이 같은 열에 배치되어 있음을 근거로 해서 이 같은 일반적 배치 이론에 이견이 있기는 하다.
보림사 사천왕상을 전체적으로 보면 모두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고 채색 가득한 갑옷을 입고 두 어깨 위로 천의(天衣) 자락을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모습을 하고 있다. 각각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남방 증장천왕은 호화롭게 장식된 보관을 쓰고 두 눈가를 약간 찡그리고 있다. 조선시대 후기에 유행하는 화내는 표정까지는 아니지만 통일신라에 비해서는 좀 더 경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서 북방 다문천왕은 높직한 보관을 쓰고 미소를 띤 인자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선비형의 눈썹과 긴 턱수염에서 부드러운 문인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동방 지국천왕은 굳게 다문 입과 함께 근엄한 얼굴 표정을 하고 있고,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고 있으며 왼손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쥐고 있는 듯한 자세다. 당당해 보이는 신체에서 수호신으로서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서방 광목천왕은 눈을 부릅뜨고 입을 꾹 다문 모습인데 보림사 사천왕상 중에서 가장 박력 있고 힘 있는 표정을 짓고 있다.

보림사 사천왕상을 보면 신라·고려의 모습의 온화함이 남아 있으면서도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거센 모습도 나타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주된 흐름은 분노상(忿怒像)이다. 대부분 두껍고 둔탁한 갑옷을 착용하고 발밑으로 악귀를 밟은 채 분노하는 모습으로 큰소리로 외치듯이 입을 벌리고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나 고려시대만 해도 사천왕상은 그다지 무서운 존재는 아니었다. 화려한 보관에 바람에 흩날리듯 천의자락을 휘날리며 머리카락도 귓바퀴를 돌아 어깨 위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섬세한 모습을 하고 있다. 얼굴도 보살상처럼 인자하거나 자비롭다고 하기는 어려워도 바라보는 사람이 절로 긴장하고 겁먹을 만큼의 표정은 짓지 않는다. 보림사의 사천왕상은 신라와 고려의 전통을 간직하면서 조선시대 후기의 특성을 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조각사적 비중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보림사 사천왕상이 대중의 관심을 처음 끌 것은 1971년 보수 때 복장(腹藏)으로 150여 점의 경전이 발견되면서부터다. 그 가운데는 조선시대 국어 연구의 귀중한 자료인 “월인석보(月印釋譜)” 제17권도 포함되어 있다. 이후 보림사 사천왕상을 비롯해 조선시대 사천왕상에 대해 가장 두드러진 연구성과를 올린 것은 고(故) 노명신(魯明信) 박사였다. 우리나라 사천왕상의 특징과 가치가 1993년 이후 몇 년 간에 걸쳐 발표된 그의 저작에 잘 드러나 있다. 한창 연구가 무르익을 때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지금 사천왕상에 대해 훨씬 깊은 이해를 갖고 있을지 모른다. 노명신 박사의 연구를 바탕으로 사천왕상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어졌고, 이는 1995년 순천대 박물관의 정밀조사로 이어지며 사천왕상의 팔과 다리 부분에 들어 있는 다수의 복장물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이들은 모두 전적류로서 총 349책이나 되는데 특히 임진왜란 이전에 출판된 64책 중 “금강반야바라밀경삼가해”,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 등 1400년대 후반에 간행된 경전도 있어서 이 사천왕상이 1515년에 조성된 것이라는 기록을 뒷받침하고 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보림사 사천왕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사천왕상이며 임진왜란 이전에 조성된 것 중에는 유일하다는 희소성 외에도, 신라와 고려의 부드럽고 섬세한 모습을 잇는 작품이라는 양식적 특징을 지닌 점으로도 의미가 크다. 조선시대 중기가 지나서부터는 사천왕상의 표정이 위엄과 위세를 강조하는 쪽으로 바뀌어나간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란이 무장으로서의 사천왕상의 성격을 좀 더 짙게 나타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보면 이전까지의 낭만적인 사천왕상은 보림사 사천왕상을 끝으로 사라져버리고,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무장으로서의 모습으로 전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림사 사천왕상은 이렇게 고전의 끝자락을 장식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인 것이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290호 / 2015년 4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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