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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중생-하

주변과 기쁘게 공생하는 지혜 있다면 중생도 ‘부처’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모든 중생은 공동체다. 각각의 중생이 공동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각각의 중생들이 어떻게 생존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공동체란 구성요소들의 공생체다. 즉 뜻하지 않은 ‘소화불량’으로 시작된 것이긴 하지만, 미생물의 공생은 이런 공동체들이 어떤 원리에 따라 구성되고 유지되는지를 보여준다. 잡아먹으려는 행위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그게 실패한 이후, 홍색세균은 자신을 잡아먹으려던 넘에게 에너지를 생산해주고 그로부터 영양소를 얻는다. 그러면서 미토콘드리아라는 소기관이 된다. 잡아먹은 넘은 반대로 영양소를 주면서 에너지를 얻는다. 어느 쪽이든 서로를 위해 무언가 이득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이타적이지만, 그것은 자신의 생존을 위한 것이란 점에서 이기적이다. ‘자리이타(自利利他)’, 그것은 심지어 서로 적대관계 속에서 만난 것들조차 하나의 공생체로 만들어주며, 서로 기대어사는 공동체로 묶어주는 것이다. 어떤 인연에 의해 만났든, 그것의 존재를 나를 위한 것으로 만들고, 나의 존재 또한 그를 위한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공동체인 중생이 살아가는 원리다.

호의적이든 적대적이든
공동체는 서로 공생관계
탐심·진심을 앞세우기에
중생이 부처와 다른 것

우리는 인간들이 모여 만드는 공동체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가족이나 마을 같은 공동체. 인간과 인간 아닌 것들이 섞여 만들어진 공동체들도 많다. 농업공동체조차 사실은 인간뿐 아니라 소 같은 동물, 풀이나 채소, 벼는 물론 흙과 물, 흙속의 수많은 미생물들까지 참여하여 만들어지는 공동체다. 인간이 있든 없든 생태계는 어느 것이든 모두 공동체들이다. 그래서 생태학에서는 공동체(communty)라는 말을 기본단위로 사용한다. 이 모두가 중생이다.

지구는 그런 식의 공동체 가운데 가장 큰 공동체일 것이다. 지구가 하나의 생명체라는 주장을 했던 것은 러브록이라는 대기화학자였지만, 이를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던 것은 최소크기의 미생물 공동체를 발견했던 마굴리스였다. 지구의 대기비율은 이산화탄소가 대부분인 화성이나 금성과 달리 산소가 21%, 질소가 78%, 그리고 이런저런 기체가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다. 반응성이 강해 어느새 다른 것과 달라붙어 산화시키는 산소가 매우 긴 시간 이 비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더구나 동물들이 호흡하며 매 순간 산소를 소모하고 있음에도 이 비율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누군가 소모하는 것만큼 생산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식물들과 미생물들이 햇빛을 이용해 이산화탄소를 소모하고 산소를 배설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식물과 미생물에게 동물과 인간이 산소를 얻고, 반대로 인간과 동물은 그것들에게 이산화탄소를 주는 순환적인 관계가 지금과 같은 지구의 대기비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산소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저런 생명체들이 없다면, 기체는 금성이나 화성처럼 이산화탄소 같이 활성 없는 대기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이는 엔트로피가 증가하여 도달하게 되는 ‘열역학적 평형상태’이다. 더 이상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없기에 ‘열역학적 죽음’이라고 불리는 게 이런 평형상태다. 생명체는 이런 열역학적 평형과 다른 항상성을 갖는다. 냄비는 100도 넘는 온도로 데워놓아도 조금 있으면 식어서 주위 온도와 같은 상태가 된다. 그러나 우리의 체온은 추워도 36.5도로 항상성을 갖는다. 그걸 유지하기 위해 신체 내부에서 세포들이 활동하여 열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도 비슷하게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그 덕분에 겨울이 와도 영하 20도 이하의 낮은 온도로는 잘 내려가지 않고 여름이 와도 40도를 잘 넘지 않는다. 지구는 자신의 체온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일정하게 유지되는 대기비율처럼, 지구의 온도 역시 그런 항상성의 하나다. 이런 이유에서 지구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일 뿐 아니라, 강한 의미에서 하나의 생명체다. 인간과 동물, 식물, 미생물뿐 아니라 대지의 흙과 바닷물 등이 서로 물고 물리는 거대한 순환계를 이루어 존재하는 거대한 공동체다. 하나의 중생인 것이다.

이 모두가 중생들이다. 인간이나 동물 뿐 아니라, 작게는 세포에서부터 심장이나 허파 같은 기관들, 크게는 인간들의 집단이나 생태계, 그리고 지구까지 모두 중생이다. 자리이타의 방식으로 서로가 기대어 살며, 서로에게 무언가를 주고 받으며 공생하는 공동체들이다. 생명의 비밀, 그것은 바로 이처럼 서로가 순환계를 이루며 기대어 사는 것이다. 인연으로 다가오는 것을 오는 대로 긍정하고 그것과 기쁘게 공생하는 법을 아는 것을 ‘지혜’라 하고, 그런 지혜를 가진 이를 ‘부처’라 한다면, 공동체로서의 중생은 소화불량으로 시작된 작은 미생물들의 결합체부터 모두 그런 지혜를 갖고, 그 지혜에 따라 살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부처라고 할 것이다. 이타적인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 됨을 아는 것. ‘중생이 곧 부처’라는 말을 이런 의미로 이해한다면 어떨까?

그러나 불행히도 이것이 사태의 전부는 아니다. 생태계가 그렇듯이, 서로 기대어 산다 함이 단지 호의적인 관계 속에 사는 것만은 아니다. 그 순환계는 ‘먹이사슬’이라 불리는 먹고 먹히는 관계의 연쇄이기도 한 것이다. 초식동물은 풀이나 열매를 먹고,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을 먹고, 그 육식동물을 다시 인간 같은 다른 동물이 먹고, 그것들은 죽어 미생물에게 먹히며, 미생물은 다시 식물을 키우는 영양소가 되는 식의 순환. 이타적인 것조차 실은 이기적인 것이다. 두 박테리아의 공생도 사실 그런 이기적 기원을 갖는, 먹고 먹히는 적대관계에서 시작된 것 아닌가. 농사를 짓는 이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작물을 좀더 많이 얻기 위해 ‘잡초’라 불리는 인근의 식물들을 반복하여 제거한다. 소를 키우는 목장을 만들기 위해 미국인들은 수많은 들소들을 학살했다.

내부적으로 긴밀한 상생적 연관을 갖는 유기체 또한 그렇다. 나를 위협하는 것은 나를 먹으로 덤벼드는 포식자들만은 아니다. 우리의 신체는 밖에서 오는 것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즉 먹고 마시고 숨 쉬어야 한다. 그러나 잘못 먹으면 몸을 상하고 잘못 마시면 죽기도 한다. 내가 먹고 마시는 것들에 포함된 미생물들로 인해 병들기도 한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공동체의 경계를 뚜렷하게 하고 드나드는 것을 관리하는 면역계들이 만들어진다. 면역반응의 요체는 내 몸 안에 있는 것과 바깥에 속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고, 밖에서 들어온 것을 처분하는 것이다. ‘나’의 안팎을 구획하는 ‘자아’란 이런 이유로 만들어진 것일 게다. 세포조차 이미 밖에서 들어온 것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사회도 그렇다. 이주민들처럼 밖에서 온 외부자들에 대해 경계하고 배타적인 태도를 갖는 경우가 아주 흔하다.

그러나 어느 사회든 이주자는 자신이 필요해서 불러들인 것이다. 몸 또한 그렇다. 어떤 생물도 먹어야 하기에, 밖에서 오는 것을 모두 제거하거나 ‘처분’해선 생존할 수 없다. 알레르기 반응은 내가 먹어야 할 것에 대해 면역계가 과잉반응할 때 발생한다. ‘자기’를 보호하려는 이런 반응이 과해지면, 자기 신체의 일부조차 밖에서 온 것으로 간주하여 공격하는 면역성 질환이 발생한다. 류머티즘이 대표적인 것이지만, 거의 모든 장기에서 이런 과잉면역으로 인한 질환이 존재하며, 루푸스병처럼 분자적인 수준에서 자기 신체 전반을 밖에서 온 침입자로 공격하는 극한적 질환도 존재한다. ‘자아’가 강하면 자기를 잡아먹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연으로 다가오는 것을 그대로 긍정한다는 것을 결코 쉽지 않다. 달려들고 소유하려 하며, 도망치거나 밀쳐내려 한다. 필요한 것을 가지려는 마음(탐심(貪心))과 싫어하는 것을 밀쳐내려는 마음(진심(嗔心))은 외부에 기대면서도 내부를 보호하려는 이런 사태에 기인하는 것이다. 생명체이기에, 살기 위해서 과하게 가지려 하고 과하게 밀쳐내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유지하려는 의지 자체에 의해 중생들은 오지 않은 것을 얻기 위해 치달리고, 갖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 집착하며, 가버린 것을 붙잡으려 애쓰고, 바로 옆에 있는 것을 피하려 하며, 피할 수 없이 다가온 것을 밀쳐내려 바둥거린다. 이런 의미에서 중생은 부처와 달리 지혜 대신 무명 속에서 산다. 하여, 중생은 부처와 다르게 사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입이 좋아하는 대로 사는 사람은 몸이 괴롭다. 입에 좋은 것을 과하게 먹고 마시는 걸로 인해 몸의 다른 세포들이 고통을 겪는다. 더욱더 난감한 건 팔기 위해서든 즐기기 위해서든 입에 맞도록 맛을 더하여 입마저 속이며 먹고 마신다는 것이다. 그리곤 그 맛에 집착한다. 입이 하는 분별이 공동체인 몸 전체를 망가뜨려 병들게 한다. 생태계도 지구도 그렇다. 자신들이 필요한 것을 지나치게 퍼다 쓰고 자신들의 편의만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인간들로 인해 지구라는 공동체는 망가지고 파괴되어 ‘지속가능성’을 의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리이타’가 제공하는 지혜로운 삶의 잠재성은, 좋아하는 것을 얻고자 치달리고 싫어하는 것을 내치고자 애쓰는 마음에 가려 무력화되고, 역으로 본성의 어찌할 수 없는 이기성을 인정하는 것만이 사실과 부합하는 ‘지혜’인 양 되어 버렸다. 덕분에 공동의 삶을 말하고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은 이념 때문에 현실을 오도하는 것이 되거나 사라진 과거에 대한 안타깝지만 헛된 노스탤지어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역으로 중생은 원래 공동체적 존재고, 항상-이미 공동체적 존재이건만, 공동의 삶을 만들어가는 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병들어가는 몸, 망가져가는 지구를 살리려면 입이나 인간의 호오 분별을 내려놓고, 몸이나 지구의 고통에 눈 돌리고 그것이 원하는 것을 통찰하는 게 필요한 건 이 때문이다. 좋은 삶을 위해선 지혜가 필요하지만, 선악호오의 분별을 떠날 때에만 지혜가 가능해지는 것 또한 이 때문일 게다. 중생이 바로 부처이건만, 부처가 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은, 혹은 부처가 못되면 부처와 비슷하게라도 살려는 의지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90호 / 2015년 4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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