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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지 집착에서 벗어나라-상

  • 해외
  • 입력 2015.04.20 15:19
  • 수정 2015.04.20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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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한 계행만이 그대 안에 있는 부처님을 일깨웁니다”
티베트 사캬 티진 특별법문
세첸코리아·봉인사·법보신문 기획

 
이 생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그대는 종교적인 사람(佛弟子)이 아니다 /
존재의 세계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그대는 출리심(出離心)을 얻은 게 아니다 /
자신의 목적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그대는 보리심(菩提心)을 얻은게 아니다 /
파악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그대는 아직 지견(知見)를 얻은 게 아니다.

올바르고 청정한 다르마 수행은
이번 생에 큰 집착하지 않는 것

윤회 자체도 고통이라 인지하고
이를 완전히 버리겠단 생각으로
집착 버리는 ‘출리심’ 일으켜야

해탈 도달은 위대하지만 이는 곧
깨달음 가로막는 장애물 될 수도
혼자만의 해탈 마지막 되선 안돼

이 가르침은 로종(修心)이라 알려진 범주에서 나온 것으로서 대보살 문수보살(文殊菩薩)께서 사꺄파의 대스승, 사첸 꾼가 닝포(1092~1158)에게 직접 전해주신 것입니다. 사첸 꾼가 닝포는 사캬 전승의 5조(五祖) 중 첫 번째 분입니다. 그분은 이 가르침을 살펴보시고는 이 네 구절이 경승(經乘)의 심오한 가르침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셨습니다. 저는 이 가르침을 근본스승이신 ‘응오르’ 사원의 담빠 도르제창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또한 이 가르침을 고명하신 최제 띠첸 린포체로부터 받았습니다.

이 가르침은 심요(心要)라 알려져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양한 유형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가르침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경(經)·론(論)과 같은 광대하고 일반적인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철저히 공부한 다음 천천히 수행으로 옮기게 됩니다. 두 번째는 폭넓고 자세한 공부를 위해 시간을 들이지 않는 자들을 위한 핵심 가르침(心要)입니다. 이것은 큰 깨달음을 얻으신 대스승께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간결하게 수행의 지침을 제공하는 심요(心要)를 쓴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제자는 그것을 곧장 수행으로 옮길 수가 있는 것이지요. 모든 사캬사원에서는 이 가르침이 예비수행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문수보살께서 직접 전수하신 아주 권위있고 의미 깊은 심요(心要)이기 때문에 티베트불교 전승 전체에서 깊은 가르침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로종(修心) 가르침의 하나로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 명상을 수행하기 위해 외적인 소란이 없는 장소에 앉아 분주한 사념과 같은 내적인 산란을 피해야 합니다. 결가부좌로 앉아 귀의문을 염송하고 보리심을 일으킨 다음 이 가르침의 첫 게송을 새겨보기로 합시다. 게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생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그대는 종교적인 사람(佛弟子)이 아니다.”

이 첫 게송이 지닌 보편적인 내용은 소승·대승·금강승에 모두 적용되는 부분입니다. 첫 게송은 다르마(法)를 수행하는 바른 방법과 바르지 못한 방법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올바르고 청정한 다르마 수행은 이생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생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다르마를 수행하는 것은 그저 세속적인 행위일 뿐입니다. 모래가 물로 보이는 신기루처럼 목마름을 달래주지 못하고 그러한 행동이 겉으로는 다르마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여러분을 상사라(輪廻)의 고통에서 건져주지는 못합니다. 여러분이 이 생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다르마를 수행한다면 여러분이 행하는 어떤 수행도 그게 계율이든 공부든 수행이든 이생에서 세속의 풍요를 누리는 것마저도 가져다주지 않을 것입니다. 다르마를 수행하는 목적이 명성이나 제자를 얻는 것이거나, 부를 얻는 것이라면 그 수행은 삼악취(三惡趣)의 씨앗이 될 뿐 성문(聲聞)의 해탈이나 보살(菩薩)의 깨달음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다르마 수행이 아닌 것이죠.

5세기경 인도 스님이자 불교사상가 바수반두(世親)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정한 계행(戒行)을 바탕으로 듣고, 되새기고, 자신을 명상에 적용해보라.”

청정한 법수행이 되려면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이생에 대한 집착과 섞이게 돼서는 안됩니다. 이생은 너무나도 덧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00년 이상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또한 이생은 아무런 본질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고 조금이라도 집착할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법수행의 목적은 다양합니다. 해탈이나 깨달음을 운운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이생을 넘어서는 목표를 가지고 수행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적어도 다음생의 이득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가르침의 첫 게송이 바르거나 바르지 못한 방법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간접적으로는 18가지 조건을 갖춘 귀한 인간의 몸을 얻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지체없이 다르마를 행하는 정진의 중요성을 지적해줍니다.

다음 게송에서 “존재의 세계(輪廻界)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그대는 출리심(出離心)을 얻은 게 아니다”라고 한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욕계·색계·무색계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다르마 수행은 깨달음으로 안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첫 게송에서 “이 생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그대는 종교적인 사람(佛弟子)이 아니다”고 했던 것은 인생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생은 언젠가 끝난다는 것이지요. 그 때가 오면 의식은 사라지지 않고 생과 생을 거듭하게 될 것입니다. 삶에서 부덕(不德)을 허용한다면 낮은 세계로 떨어질 것이고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삼악도(三惡道)의 고통을 두려워하고 삼선도(三善道)에 태어나기를 늘 기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덕행을 쌓아야만 합니다.

첫 게송은 소인(小人)의 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길이기는 하지만 윤회를 넘어서는 것을 목표로 하지는 않습니다. 그 목적은 그저 낮은 세계에 떨어지는 것을 피하고 인간계, 천신계 같은 높은 세계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두번째 게송은 커다란 고통으로 묘사되는 세 가지 낮은 세계에서뿐 아니라 세 가지 높은 세계에서 마저도 집착할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설명해줍니다. 집착할만한 가치가 없으므로 출리심(出離心)을 일으켜야만 합니다.

출리심이란 상사라(輪廻界) 전체를 완전히 버리겠다는 생각입니다. 출리심을 일으키려면 상사라 전체가 고통이라는 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를 깨닫게 되면 더 이상 머무르고자 하는 생각도 들지 않고 머무를 장소도 없다고 여기게 됩니다. 호수가 꽁꽁 얼어버리면 백조가 머무를 곳이 없는 것과 같고 숲이 타버리면 새가 앉을 곳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상사라 전체가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진심으로 온전히 윤회를 버리고 열반을 얻으려는 바람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처럼 자기 혼자만을 위해 찾는 해탈이 있는 곳을 중인(中人)의 길이라 부릅니다.

이 두번째 가르침은 두가지 큰 주제를 설명합니다. 출리심을 일으키는 상사라(輪廻界)의 결점과 자신의 행동이 자기 스스로를 상사라에 가둔다는 것을 말해주는 인과의 법칙입니다.

세번째 게송은 “자신의 목적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다면 그대는 보리심(菩提心)을 얻은 게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게송을 바탕으로 존재의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이러한 존재의 경험에서 벗어나려는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고서 우리는 크고 작은 덕행을 쌓고. 마침내 혼자만의 해탈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의 깨달음입니다.

이 두가지 유형의 해탈은 모든 거친 고통과 그 원인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에서 위대합니다. 그러나 혼자만의 해탈은 마지막 목적지가 아닙니다. 혼자만의 해탈은 윤회계에 비해서는 위대합니다. 고통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선자량(善資糧)이 완전히 쌓인 것은 아닙니다. 번뇌(煩惱)의 장애만이 제거되었기 때문입니다.

혼자만의 해탈에 도달한 자는 아직 소지(所知)의 장애가 남아있습니다. 혼자만의 해탈의 경지에 있는 자의 선자량은 아직 다 채워진 것이 아니기에 다른 중생들을 이롭게 할 수 없고 자신의 목적에도 다른 사람의 목적에도 도달하지 못합니다. 혼자만의 해탈에 도달하는 것은 또한 완전한 깨달음의 성취를 가로막습니다. 그 경지에 도달하고 나서 오랫동안 그 상태로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집을 짓는다고 해봅시다. 집을 부수고 나서 처음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혼자만의 해탈은 완전한 깨달음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정리=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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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서 자비 특강…300명과 관정의식

사캬 티진 법회 세부일정

티베트에서 사캬 티진 존자는 전생에는 티베트 불교 닝마파의 위대한 스승이었고 이번 생에는 사캬파의 법왕으로 나투신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사캬 티진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윤회를 벗어난 존자로 추앙받는다. 그가 이생에 연을 다시 맺은 것은 중생을 해탈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자비의 발로라는 게 티베트인들의 금강 같은 믿음이다.

 사카 티진 존자가 오는 5월5~11일 한국을 방문, 법회와 수행 전수법회를 통해 한국 불자들에게 삶의 전환점이 될 ‘자비법석’을 펼친다. 5월8일 동국대 법회에서 500여 한국불자들에게 사캬파의 독특한 자비 수행에 관해 법을 설한다. 자비 수행은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을 용서하는 자비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다. ‘나’를 해친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으면 모든 중생을 사랑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화두와 같이 받들어 일상에서 실천하는 수행이다. 티베트 불교의 아름다운 자비사상이 한국 불자들의 마음에 깃들어 있는 상처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법연이 있어야만 만날 수 있는 관세음보살 밀교 수행은 어렵지 않고 효율적이며 해탈로 가는 지름길로 알려져 있다. 5월9~10일 서울 탄허박물관서 펼쳐질 사캬 티진의 관세음보살 밀교수행에서는 300여 한국불자들에게 티베트의 마하씨다(대성취자) 탕통겔뽀가 관세음보살을 직접 친견하고 전수받은 사다나 수행을 전수한다. 사다나는 ‘성취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뜻으로 귀의, 보리심, 칠지공양, 진언, 관상을 통해 헌신적으로 법을 전하는 수행이다.

티베트에서는 사카 티진과 같은 위대한 스승이 마을에 오면 몰려드는 사람들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때 멀리서 돌을 던진다. 깨우친 보살과의 악연은 아예 없는 인연보다 나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티베트와 한국은 관세음보살과의 인연이 매우 깊다. 세첸코리아 용수 스님은 “사캬 티진 존자님이 방한하는 5월이 가피 가득한 시간이 되고 존자님을 친견하는 모든 이들에게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바란다”며 “사캬 티진 존자님과의 인연을 통해 관세음보살의 축복과 성취를 완성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문의 010)9061-2137

[1291호 / 2015년 4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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