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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분별-중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모든 분별은 척도를 갖는다. 좋고 나쁜 것을 가르는 기준, 정사미추를 가르는 기준이 없다면 분별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좋다고 끌어당기는 것이나, 싫다고 밀쳐내는 것이나 모두 척도의 힘에 의한 것이다. 분별이란 그 척도의 힘, 척도의 권력을 실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힘이나 권력이란 말은 결코 은유나 과장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예쁜 얼굴에 대한 분별의 척도는 턱을 깎고 코를 높이는 물리적인 권력마저 행사한다. 연애도 취업도 그 예쁜 얼굴에 맞추어야 쉬워지기 때문이다. ‘남자다운 남자’가 되기 위해선 엔간한 일엔 눈물을 흘리지 않아야 하고, 건장한 몸을 만들어야 하고, 여성들을 주도하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그런 기준에 맞추어 자신의 신체와 감성을 단련시켜야 한다.

분별하지 말라는 참 의미는
판단·구별 말라는 게 아니라
호오미추 선판단 떠난 판단
분별 떠날때 바른 분별 가능

분별은 내가 갖고 있는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의 기준을 척도로 하여 행해진다. 그건 어쩌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기준 아닌 다른 것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순 없는 일일 테니까. 다른 이도 내가 하는 언행에 대해 자기 기준으로 분별할 것이다. 그로 인해 나는 나대로, 저 사람은 저 사람대로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다투게 된다. 그 다툼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애착을 갖고 많은 정성을 기울인 것일수록 심하게 된다. 각자가 잘 안다고 믿는 것, 확실하다고 확신하는 것일수록 다툼이나 논란은 해결될 가능성이 적다.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약 10여 년 전, 함께 공부하며 일종의 공동체를 만들어 활동하던 친한 후배들과 크게 다툰 적이 있다. 나로선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어떤 일들이 있었던 셈인데, 그런 비판에 대해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로 그런 나를 부당하다고 비판했다. 거기에 감정마저 섞여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나는 애정을 갖고 열성적으로 챙겨주었던지라, 그런 그들이 아주 서운했다. 앉으나 서나 그들이 무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지, 어떤 잘못을 하고 있는 건지 머리속으로 끊임없이 반박하고 비판하고 있었다. 하려 하지 않아도 그리 되었다. 만나서 얘기도 해보았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나를 비난하고 미워할 이유를 갖고 있었다. 그러니 문제가 쉽게 해결될 리 없었다. 그렇다고 쿨하게 헤어질 수도 없었으니, 정말 번뇌 속에 빠져 살았던 셈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절에 다녔어도 한 번도 절에 가본 적 없는 ‘유물론자’였건만, 그래도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당시 누가 준 불교서적을 읽고 있었다. 그 책을 보다 보니 번뇌를 벗어나려면 앉아 좌선을 하며 되나 보다 싶었다. 하여 방석 깔고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앉아 있었지만 번뇌가 사라지기는커녕 더욱더 치성하여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가슴이 울렁대서 앉아있기도 힘들게 되었고, 안되겠다 싶어 뒤에 있는 관악산 가는 길로 산책을 갔다. 가는 중간에 약수터가 있고 거긴 평상이 하나 있었는데, 무심코 지나가다 깜짝 놀랐다. 거기 누워있는 생면부지의 노인네가 심한 욕설을 퍼부어 댔기 때문이다.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나 말곤 그 욕을 먹을 이가 없었던 셈인데, 욕먹을 짓을 한 게 아니었으니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왜 그러시나 하고 다가가는데 그 분의 눈이 풀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내가 아니라 허공에 대고 그 욕을 퍼붓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섬뜩한 느낌이 전신을 관통했다. 아, 조금 전까지 내가 저러고 있었는데! 다른 거라곤 저 노인은 입 밖으로 내서 하는 걸 나는 입 안에서 하고 있었다는 것 뿐. 나도 미움에 눈이 멀어 정신이 나가 허공에 욕을 하고 있는 중음신이었던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얼른 몸을 돌려 다시 내려가서 동네 미용실을 찾아 들어갔다. “아주머니, 머리 좀 밀어주세요.” 놀라서 말리는 아주머니에게 거듭 부탁하여 머리를 빡빡 깎았다.

그러나 머리를 깎는다고 번뇌가 사라질 리 없었다. 다만 그때 그런 생각을 비로소 했다. 나는 지금 내가 옳다고 믿는 기준으로 후배들의 언행에 대해 이렇게 분별하고 비판하고 있지만, 그들 또한 자신의 기준으로 나를 분별하고 비난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야 내가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옳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자기생각이니 모두 자기가 옳을 뿐이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으로 남들을 분별하는 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에 들어올 리 없을 것이며,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도 그게 귀에 들어올 리 없을 것이다. 이게 바로 ‘아상’이라는 거구나 싶었다. 내 기준으로 분별하며 내 맘에 들지 않는 얘기는 싫다고 쳐내고 맘에 드는 얘기만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밀쳐내려는 마음과 탐하는 마음이요, ‘진심(嗔心)’이고 ‘탐심’이라는 거구나 싶었다. 나는 아무것도 탐하지 않았다고 믿었지만, 실은 내 맘에 드는 언행을 탐하고 있었던 것이고, 나는 자신이 배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실은 내 맘에 안드는 언행을 밀쳐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후배들에게 느꼈던 애증의 감정은 사실 이미 내가 갖고 있던 호오의 기준에 이미 예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번뇌도 번뇌지만, 내가 옳다는 믿음, 내 기준으로 남을 분별하려는 태도를 갖고 있는 한, 나와 다른 생각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법이고, 그렇게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과 함께 무언가를 하는 건 불가능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서로 간에 차이를 긍정하고 나와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를 만들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내가 옳다고 믿는 걸 기준으로 판단하는 한, 그런 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내 기준에 맞는 것, 내 마음에 드는 것만을 듣고 받아들이려 할 뿐임을.

분별은 모두 ‘나’의 기준을 척도로 행해진다. 거기에는 나의 척도에 남을 맞추려는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남들도 행해야 한다는 암묵적 가정이 분별의 행위 속에 숨어서 작동한다. 그 척도를 내려놓지 않으면 남의 처지가 보이지 않고 남의 생각이 이해되지 않는다. 내 척도에 맞는 것과 거기서 벗어나는 것만 보일 뿐이다. 내가 좋다고 끌어당기려는 것과 내가 싫다고 밀쳐내려는 것만 있을 뿐이다. 좋아서 가지려는 것인 탐심이고, 싫어서 멀리하려는 것이 진심임을 안다면, 분별이란 바로 이런 탐심과 진심의 작용임 또한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제대로 분별하고 올바로 판단하기 위해 이런저런 책을 읽고 옳은 견해를 세우려 애쓴다. 물론 옳은 견해가 있든 없든 우리는 분별하고 판단한다. 그러니 이왕이면 옳은 견해를 세우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나 옳은 견해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에 비추어 옳지 않다고 보이는 얘기는 듣지 않고 내쳐버린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틀린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되는 걸 두고, 왜 저 사람이 저런 얘기를 하는 건지, 무엇이 저런 생각을 하게 한 건지 생각하게 되진 않는다. 옳지 않은 생각을 갖는 데에도 나름대로 이유가 다 있을 터인데. 그래서 옳은 생각이 강할수록 분별하고 내치는 힘도 강하다.

따라서 ‘정견’이란 옳은 견해를 세우는 게 아니라, 내가 옳다고 믿는 견해를 내려놓는 것이고, 정사유란 ‘옳은’ 것을 사유하는 게 아니라 그런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다. 호오미추의 척도를 내려놓고 애증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저 사람이 하는 얘기가 들리고 그가 왜 저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애증을 떠나면 모든 게 통연명백해진다.” 사태가 통연명백할 때, 비로소 지혜가 발동한다. 분별을 떠났을 때 비로소 올바른 분별을 할 수 있다.

분별하지 말라는 것은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며, 구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호오미추의 선판단을 떠나 판단할 때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였을 게다.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게 없으니 다만 간택하지 않으면 될 뿐이라 하는데, 어떤 것이 간택하지 않는 것입니까” 하는 질문에 조주 스님은 “천상천하에 나 홀로 존귀하니라”라고 대답한다. “그것도 간택입니다”라고 응수하자 조주 스님이 소리를 빽 지른다. “이 맹추야, 어느 곳이 간택이란 말이냐?” 간택하면 안 된다는 말에 잡혀 어떤 간택도 해선 안 된다고 믿고, 간택이란 말에 매여 호오와 애증을 떠난 간택을 알아보지 못하면, 이렇게 ‘맹추’ 소리를 듣게 된다. 또 “말만 하기만 하면 그것이 곧 간택인데, 스님께서는 어떻게 사람을 지도하시겠습니까?”라는 물음엔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게 없으니, 다만 간택하지 않으면 될 뿐이니라”라고 대답한다. 간택하지 말라는 말 또한 하나의 간택이고 분별이지만, 그것은 분별심을 떠난 간택이고 분별인 것이다. 여기다 대고 논리적인 모순을 지적한다면, “묻는 일 끝났으면 절하고 물러가라”는 얘길 듣게 될 것이다. 분별과 지혜는 이렇게 종이 한 장의 두께를 두고 갈라지는 것이다.

이런 분별은 개인적으로 행해질 뿐 아니라 사회적·집합적으로 행해진다. 분별의 척도가 사회문화적으로 습득된 것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맛에 대한 감각은 물론 미감도, 옳고 그름의 기준도 많은 경우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상식’이나 ‘양식(良識)’은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분별의 기준들이다. ‘재산에 대한 처분권이야 소유자에게 있지’라는 상식이나 ‘결혼은 남녀가 하는 거지’ 하는 식의 양식이 그러하다. ‘부처란 이런 것이고, 중생은 이런 것’이라는 양식 또한 그렇다.

그런데 이게 종종 ‘재난’이 되는 경우가 있다. 가령 늑대들에게 그랬다. 알다시피 서구에서 늑대는 양과 같은 ‘착하고’ 순한 동물을 잡아먹고 괴롭히는 악한 동물로 간주되어 왔다. 미국인 역시 다르지 않았는데, 서부의 황야 가까이라면 어디서나 들리는 늑대의 울음소리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거기에 더해 양을 키우는 목장이 거대화되면서 늑대들에게 잡아먹히는 양들이 늘어나자 적대감은 더 늘어갔다. 늑대나 코요테 같은 동물에 대한 도덕적 적대감은 그들 모두가 공유하는 ‘양식’이고 ‘상식’이었다. 그들은 이 동물들을 ‘사악한 야수’라고 부르며 일종의 도덕적 ‘범법자’로 간주했다. 생물학자인 스탠리 영조차 이렇게 썼다. “늑대들은 피에 굶주려 살인하는 100% 죄인이며…모든 늑대들은 살인자들이다.”

그래서 1900년대 초 정부 관리들로부터 보수적 도덕주의자와 진보적 자연주의자들까지 손을 잡고 자연을 ‘정화’하겠다며 늑대와 코요테 박멸운동을 벌인다. ‘야수와의 전쟁’을 위해 농업성 생물보호국은 총을 든 사냥꾼과 덫, 독극물에 독가스까지 동원하여 이들을 사냥했다. 덕분에 얼마 되지 않아 늑대와 코요테는 거의 멸종 상태에 이르게 되고, 어디서도 늑대 울음소리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육식동물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데 무슨 악이란 말인가! 선악의 범주를 사용한 서구인들의 도덕적 분별이 늑대와 코요테에겐 더없이 끔찍한 재난이 되었던 것이다.

상식 이하의 일들이 흔히 벌어지는 곳에서는 상식을 회복하고 양식에 따라 살자는 호소가 자주 등장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양식과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는 집단적인 분별이, 그런 분별의 기준이 거기서 벗어난 다른 생각이나 감각, 행동의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것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재난’이 될 수 있음 또한 기억해야 한다. 분별간택을 경계하는 선사들의 말은 산속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간의 거리에서 더욱더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92호 / 2015년 4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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