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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조선시대 사찰림의 매매와 소유권 분쟁

사찰숲, 국가에서 하사받은 순간 사찰이 실질적 소유

▲ 부석사 전경. 무량수전 서편 능선 아래가 산송의 대상지였다.

조선시대 사찰의 산림 소유는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국가(왕실)가 사찰에 하사한 땔감숲, 왕실의 태실과 능침수호를 위해 사찰(원당)이 수호한 봉산, 왕실 의례용 임산물의 생산을 위해 사찰(원당)이 직접 관리한 율목봉산과 향탄봉산이 그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산지소유 불인정
무수한 산림소송 남발

매매문서·송사 기록에서
사찰, 산림소유 확인가능

순천 송광사·선암사 분쟁
산림소유분쟁 중요한 기록

조선 조정(왕실)은 형성 유래가 각기 다른 이들 산림을 사찰 소유로 인정했을까? 사찰은 국가가 하사한 이들 사패지(시지와 봉산)를 사유지(寺有地)로 인식하였을까? 만일 인식하였다면, 그 소유권을 지키고자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까? 이런 의문은 사찰 숲의 형성과 소유 과정에 대한 문헌으로 파악해야 할 내용이지만, 사찰 숲에 대한 기록 대부분이 사라진 현 상황에서 유형별 형성방법이나 소유 과정을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조선시대 사찰림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현실과는 별개로, 조선의 산림정책도 산림 소유의 불확실성에 한몫했다. 산림에 대한 조선(왕실)의 기본 이념은 ‘산림천택여민공지(山林川澤與民共地)’였다. ‘산림과 하천 바다는 온 나라 사람이 그 이익을 나누어 가진다’는 이념은 ‘원칙적으로 국가가 나라 전역의 산림을 소유하지만, 역제도, 진상공물제도, 잡세제도 등으로 백성 누구나 산림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조정(왕실)이 국가 산림의 소유권을 가졌지만, 산림 이용권은 백성에게 부여했던 이 정책에 한 가지 예외 조항이 있었다. 바로 묘소 주변의 산지에 대해서는 상제례(喪祭禮)의 하나로 사유화를 묵인했다. 성리학적 통치 이념으로 개국한 조선 왕실은 상제례를 강력히 시행하면서 매장을 권장했다. 그에 따라 산지의 분묘 면적을 “종친(宗親)인 경우, 1품은 4방(方) 각 100보, 2품은 90보, 3품은 80보, 4품은 70보, 5품은 60보, 6품은 50보를 한계로 한다. 문무관인 경우에는 10보씩 감하되 7품 이하나 생원, 진사, 유음자제는 6품과 같이 하고, 여자는 남자의 관직에 따른다”(‘경국대전’ 예전 상장 조)고 규정하여 산지 사유화의 길을 터 주었다.

조선 초기부터 국가주도의 분묘 제도가 시행되었고, 그에 필요한 산림면적이 법전에 수록되면서 산림의 사적 소유는 암묵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분묘 제도로 인해 산지 사유화는 실질적으로 진행되었지만, 소유권에 대한 법적 제도적 장치는 미처 준비되지 못했다. 국가는 개인이나 문중에서 쓴 분묘 주변의 산지를 ‘보호된 산지[墳山守護]’라는 개념으로 그 이용권을 인정하였지만, 법적 소유권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어정쩡한 산지소유의 불인정 정책은 구한말까지 지속되었다. 따라서 산림 사유화에 대한 국가와 개인의 인식 차이는 다양한 소유권 문제를 파생시켰고, 그 대표적인 문제가 조선 후기에 개인 간에 벌어진 무수한 산림 소송[山訟]이었다.

산지 사유화의 불확실성이 상존했던 조선 후기의 상황을 고려할 때, 사찰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왕실 사패지(땔감숲, 봉산 등)를 사유화하였는지 밝히는 기록은 없다. 사찰은 국가(왕실)에서 하사한 사패지의 소유권을 자동으로 부여받게 되었는지 또는 일정한 기간 산지 금양(禁養)의 실적을 쌓은 이후에 소유권을 확보하게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사찰의 산지 소유권 형성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비록 쉬 찾을 수 없을지라도, 산지 매매문서나 산송과 관련된 기록을 통해서 조선시대 사찰이 실질적으로 산림을 소유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817년 능주목(오늘날 전남 화순군)의 개천사(開天寺) 승려 태화 등이 토지세(結稅) 납부와 극심한 흉년 극복을 위해 사찰이 관리해 오던 산지를 전라도 남평현에 사는 정생원 댁에 팔았다는 기록은 사찰이 실질적으로 산림을 소유했을 뿐 아니라 매매도 했음을 나타내는 증거라 할 수 있다.

▲ 부석사 매매문기의 지도. 직지성보박물관 제공

▲ 부석사매매문기. 직지성보박물관 제공

이와 유사한 사례는 직지사 직지성보박물관에 소장된 부석사의 ‘토지매매문기(土地賣買文記)’에서도 찾을 수 있다. 직지성보박물관이 밝히는 ‘토지매매문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지를 올리는 자신들은 지난 무진년(1868)에 부석사 극락암 뒤편 산자락에 조부모의 묘를 쓴 사람들이다. 당시에 부석사의 사세가 기울어 자신들이 250금(金)으로 7두락(斗落)의 논을 사서 절에 들여놓고 그 대가로 산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계운(啓雲)이라는 이름의 떠돌이 승려가 사실도 모른 채 당시 이루어진 산지 매매를 탈취라고 주장하며 해당 산지를 사찰에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안장(安葬)하던 날 관가에서도 장례 행렬을 호송하였고 승려들조차 상례를 도왔던 일은 주민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이며, 당시 절에 사들인 토지가 절의 소유지에 명백히 포함되어 있고 매매문서 또한 남아 있어 문제의 산지는 자신들의 소유임이 분명하다.”

이 ‘토지매매문기’는 1868년에 부석사에서 안동의 김참판 댁에 산지를 방매한 토지매매문서이다. 이 매매문기에는 논란의 대상인 산지의 상황을 그림으로 도해한 지도와 함께 “사찰 소유의 극락암 화전(火田) 몇 두락을 비롯하여 뒷산 소나무가 서 있는 곳에서 산제당(山祭堂)의 작은 시내 서쪽까지를 경계로 한 땅, 그리고 절의 큰 석축 아래 삼밭 2두락을 모두 합하여 250냥으로 계산하고, 역시 같은 값으로 환산한 김참판 댁 소유의 봉양면 임야 7두락을 상호 교환하는 조건으로 매매한다”는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바로 사찰의 산지 소유뿐만 아니라 직접 산지를 매매했던 증거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사찰의 산지 소유권 형성 과정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는 또 다른 실마리는 ‘조계산송광사사고 산림부’에서 찾을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봉산이던 곳이 하루아침에 근거도 없는 승려에게 빼앗길 참이니 참으로 억울한 일입니다.”, “막중한 봉산을 빼앗기지 않도록 군수님께서 처분해 주시기를 천 번 만 번 손 모아 간절히 바랍니다.” 이 내용은 송광사 승려 각인(恪仁) 등이 고종 32년(1895년)에 순천군수에게 올린 장막동(帳幕洞) 산에 대한 송사 이유서의 한 부분이다.

송광사 ‘산림부’에는 송광사와 선암사 사이에 있었던 장막동 산림에 대한 분쟁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1895년 10월부터 1901년 2월에 이르기까지 모두 10차에 걸쳐 장막동 산림에 대한 두 사찰 간의 송사는 송광사 소유의 장막동 산에서 벌채한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선암사에서 탈취함으로 시작됐다. ‘산림부’에는 1909년 산림에 대한 소유권 증명원을 정부에 제출할 때, 장막동의 경계를 반으로 나누면서 소송이 끝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산림부’의 장막동 산림에 대한 분쟁 기록이 중요한 이유는 10차에 걸쳐 송광사와 선암사가 각각 봉산의 소유권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다툼의 기간도 14년간이나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산송에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구한말에 개개 사찰이 소유한 산림의 소유권을 얼마나 중요하게 인식하였는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송광사 ‘산림부’의 장막동 산림 분쟁 기록에는 봉산의 소유권과 관련된 다양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그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1차 소송에는 순천군수가 사찰의 봉산 경계를 해당 사찰 소유권의 담당 영역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2차 분쟁에 대한 판결로 봉상시는 분쟁 대상지가 송광사 봉산에 속하는 것이라고 표명하고 있다. 3차 분쟁에 대한 판결로 전라도 관찰사 역시 송광사 봉산의 경계를 인정하고 있으며, 4차 분쟁에 대한 암행어사의 회신도 이들 분쟁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조사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봉산의 소유권을 각각 주장하는 두 사찰의 송사에 대하여 국가(조정)를 대신하여 봉상시(중앙정부), 해당 도의 책임자(전라도 관찰사)와 지방의 책임자(순천군수)가 사찰의 봉산 소유 자체를 부정하거나 배척하지 않는 ‘산림부’의 기록에 비추어 볼 때, 사패지(땔감숲, 수호봉산, 관리봉산)는 국가(왕실)에서 하사받는 순간부터 사찰이 실질적 소유권을 획득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두 사찰 간의 14년 동안 진행된 산림 소유권 분쟁 기록은 결국 조선 후기에 사찰이 관리했던 봉산의 실질적 소유권은 해당 사찰에 있었음을 증언하는 귀중한 문서인 셈이다. 그래도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사찰은 오늘날 국유림과 같은 조선시대의 봉산을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을까?

전영우 국민대 산림환경시스템학과 교수  ychun@kookmin.ac.kr

1292호 / 2015년 4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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