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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마음, 전공 바탕한 글쓰기 아쉽다”

  • 기고
  • 입력 2015.04.27 16:30
  • 수정 2015.05.11 09:22
  • 댓글 30

[신규탁 연세대 교수 기고] 장영우·우희종 교수 비판

우희종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동국대 구성원 및 조계종 집행부를 노골적으로 비난한 가운데 장영우 동국대 문창과 교수가 “우희종 교수는 더 이상 요설로 선량한 동국인과 승가를 욕보이지 말고 자중하기 바란다”고 비판했다. 이에 우희종 교수는 “(표절 의혹을 받는 스님 총장 후보가) 사퇴는커녕 동국대 일부 교수들이 그런 행태를 지지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건강한 대학문화를 흐리는 것은 물론 대학의 일반 상식마저 무시한 상황”이라고 반론했다. 이런 가운데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가 장영우 교수와 우희종 교수의 주장을 비판한 기고문을 4월27일 보내와 이를 전문 게재한다. 신규탁 교수는 연세대에서 중국유학으로 석사학위를, 일본 도쿄대학에서 불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한국선학회 회장과 한국정토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편집자 주

장 교수 “동국대 우리학교”부적절
국민이라면 누구나 말할 수 있어
우 교수, 불교계 비판의 글들은

광우병 관련 글쓰기와 단절느낌

재가운동은 신행이 바탕이 돼야
몇몇 언론 “스님 잘못 까발리기
불교공동체 책임 갖추지 못한것”

▲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
동국대 총장임명에 관련된 이야기가 언론 매체에 공론화된 지도 벌써 4개월을 넘기고 있다. 필자도 그 공론화 속에서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의견을 내었다. 맨 처음은 ‘불교신문’ 2014년 12월 20자에 “대학의 본질과 동국대의 시대적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의견을 내었고, 다음은 ‘불교저널’ 2015년 3월 5일자에 “동국대 총장 인선, 의미 있는 다툼으로 승화하자”라는 제목으로 의견을 내었다. 첫 번째는 ‘총장’에 초점을 맞추었고, 두 번째는 ‘이사장’에 초점을 맞추어 의견을 내었다.

필자가 의견을 내자, 이에 대한 각계의 비평 심지어 비난까지 있었다. 물론 공감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공적으로 글을 쓸 경우에는 그 양쪽을 다 감수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또 그럴 자세가 있었기 때문에 공적으로 어떤 사안에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평소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평가의 ‘내용’이 아니라, 평가의 ‘방법’이다.

두 번의 기고를 통해서 필자가 하고 싶은 핵심은 드러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견 피력 방법’에 초점을 맞추어 동국대의 ‘이사장’과 ‘총장’에 인선을 둘러싼 논의를 하고자 한다. 이하의 글은 ‘내용’의 진실을 말려하는 것이 아니다. ‘방법’과 ‘형식’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먼저, 장영우 동국대 문창과 교수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2015년 4월 29일자 ‘법보신문’에 기고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이 글에서 장 교수님은 필자가 동국대 사안과 관련하여 글을 쓴 것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제삼자가 우리 학교 일에 왈가왈부하는 것이 거북스러우면서도 그 충정은 이해되어 묵인한 것과 같은 이유다” 결론부터 말하면, ‘제삼자’이니 ‘우리 학교’라니 하는 표현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한국의 모든 대학은 대한민국 정부의 지휘 감독을 받고 게다가 적건 많건 예산을 받는다. 때문에 대한민국의 구성원이면 다 말할 수 있다. ‘우리 학교’라고 경계선을 그어놓고 실재하지도 않는 너와 나를 갈라서는 안 된다.

‘참여’에 대하여 한국불교계 관계자들은 너무나 좁은 틀에 묶여있다. ‘출가’와 ‘재가’의 틀도 그렇다. ‘출가’라고 하지만 ‘세상’에 사는 한, ‘세상’을 벗어난 ‘방외(方外)’란 있을 수 없다. ‘사회참여’에 대해서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출가’라는 미명하에 등을 돌려는 안 된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화쟁문화아카데미 대표인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의 최근 발언과 활동에 주목하고 있다.

다음으로, 우희종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동국대의 현 사안에 국한하여 우 교수님의 글을 ‘불교닷컴’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 언론 매체에 기고된 일련의 글을 읽으면서, “대한민국에서 대체 교수의 역할이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문제를 나 스스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교수란 해당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를 하고 그를 바탕으로 학생을 교육하는 직업인이다.” 그런데 우 교수님의 최근 동국대 관련의 글들 속에서는 위에서 필자가 생각하는 그런 ‘교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수의학과’에 소속되어 있으니 그 경계선을 넘어오지 말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장 교수님의 부분에서도 필자가 언급했듯이 경계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교수라면 무엇보다 자신의 전공 영역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교수는 그것만 하라는 말인가? 그것은 아니다. 오히려 필자의 입장은 그것은 ‘필요조건’이고, 여기에 ‘충분조건’이 첨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충분조건’인가? ‘사회참여’이다. ‘자신이 전공하는 분야의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반드시 그것이 바탕이 되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다 갖춘 교수가 좋은 교수라고 필자는 생각하고, 필자도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시 우 교수님 이야기로 돌아가자. 우 교수님이 교수로서의 ‘필요조건’을 얼마나 갖추었는지 ‘불교철학’ 분야를 전공으로 하는 필자로서는 평가할 역량이 없다. 왜냐하면 교수로서의 전공 분야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충분조건’을 우 교수님께서 제대로 수행했는가에 대해서는 말 할 수 있다. 그 근거는 우리는 현재 그리고 같은 공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고 더 나아가 지구 공동체에서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 교수님께서 자신의 전공 연구 분야의 지식을 바탕으로 동국대 사안이나 조계종을 둘러싼 불교계의 각종 사안에 대해 글쓰기를 했는가? 그렇지 못하다고 본다. 글로만 보아서는 우 교수님의 글속에서 위에서 말한 ‘충분조건’이 읽혀지지 않는다. 글 속에 ‘수의학’을 전공하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세상을 비평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우리 사회는 ‘교수’라는 직을 갖은 사람들에 대해 필요 이상의 신뢰감을 보여준다. ‘교수’하다가 정부의 ‘각료’로 또는 정부의 중요 직책에 돈오돈수적으로 발탁되는 나라는 남한뿐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수라는 직책을 걸고 글쓰기를 할 때에는 위에서 말한 ‘충분조건’의 필연성을 담보해야 한다. 수의학을 연구하는 전공교수다운 글쓰기를 기대한다. 과거에 쇠고기 수입 및 광우병과 관련한 글쓰기가 아쉽다. 그것과 요즈음 불교계 비판의 글쓰기 사이에는 ‘큰 강’이 흐르는듯하다. 단절이 보인다. 필자만의 오해인가?

다음으로, 불교계의 각종 재가 단체들의 승단 비평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비평의 ‘내용’이 아니라 비평의 ‘방법’에 대해서 말이다. 우선 실명을 밝혔으면 좋겠다. 다음으로 재가운동을 하는 ‘방법’인데, 소속된 절(사원)의 신행활동을 바탕으로 그곳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불자는 ‘재자불자’이건 ‘출가불자’이건 반드시 수행 공동체 즉 ‘절’에 소속되어야 한다. 공동체를 떠난 불자는 불자가 아니다. 그리고 공동체의 핵심은 ‘출가불자’이다. ‘출가불자’의 핵심은 일정한 수행의 지위에 올라간 성중(聖衆)이다. 이 점에 대해 필자는 전문적 학술 논문을 통해 학계에 발표했으니 자세한 논의는 그곳으로 미룬다. 재가단체는 유령단체가 아니다.

끝으로, 불교계의 언론에 흘러나오는 기사를 읽는 방법에 대해 독자들께 당부드리고 싶다. 역시 ‘내용’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기사의 ‘형식’이다. 불교계에는 적잖은 언론 기관이 있다. 그 기관들의 기사 ‘형식’을 보면, 기자들이 쓴 내부 원고를 보도하기도 하고, 독자들의 기고문을 소개하기도 하고, 언론기관의 공식적 입장을 표명하기도 한다. 내용적으로는 승단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쓸 수 있다. 또 그래야 한다. 그런데 몇몇 언론기관은 ‘스님들의 잘못 까발리기’에 쏠려있다. 그런 기관에서 나온 ‘내용’이란 신뢰성은 물론 불교공동체의 소속원으로 갖추어야 할 책임을 갖추지 못했음을 독자들께서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언론이 ‘푸념의 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건전한 비평은 ‘내용’은 물론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1293호 / 2015년 5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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