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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비판하면 됐지, 사람이나 단체를 공격해서야”

  • 기고
  • 입력 2015.04.29 16:05
  • 수정 2015.04.29 17:43
  • 댓글 54

신규탁 연세대 교수의 우희종 서울대 교수 비판 기고문

교수로서 글쓰기 지적했음에도
‘글쓴이의 자격 거론’은 오독

우 교수의 ‘전칭’ 명제 남발은
방법과 형식의 좋지 못한 습관
비판할 때 꼭 범위 한정해야

정토학회장·선학회장 운운해
해당 학회 학자들까지 폄하

건전한 논쟁 기대했음에도
소모적이고 사실 접근도 못해

우희종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동국대 구성원 및 조계종 집행부를 노골적으로 비난한 가운데 장영우 동국대 문창과 교수가 우희종 교수를 비판했고, 이에 우 교수가 장영우 교수를 반박했다. 이런 가운데 신규탁 연세대 교수가 우희종 교수를 비판하자 우 교수가 다시 반박 기고문을 보내왔고, 이에 다시 신 교수가 4월29일 ‘잘못을 비판하면 되었지, 사람이나 단체를 공격해서야’라는 반론 기고문을 보내와 이를 전문 게재한다.  편집자

▲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
이렇게 일정한 사안에 대해 거의 비슷한 시기에 그것도 같은 신문에 전공을 달리하는 세 교수가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사람들은 일정한 사안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갖게 되고 또 그 견해를 표현하고 나아가 때로는 행동하기도 한다. 근대적 의미의 중고등학교 교육의 목표는 민주시민의 역량을 기르는 것인데, 민주시민의 갖추어야 할 요소 중의 하나가 위에서 말한 사회 현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갖고, 그 견해를 표현하고 나아가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책임지는 것이다.

사회 현상. 이번 경우는 불교계와 대학이라는 현안이다. 이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갖고, 또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서로가 지켜야 할 ‘형식’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사례이고, 특히 독자들께서 세 교수들이 드러내는 자신의 견해 ‘내용’과 그 견해를 드러내는 ‘방법’을 비교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어, 부득이 다시 글을 쓴다.

첫째, 이번 논쟁이 일게 된 계기는 우희종 교수가 불교계의 언론과 페이스북에 스님들과 동국대와 관련한 비판이 선행되어 있었다. 우 교수의 이런 글쓰기에 대해 장영우 교수가 비판을 가했다. 장 교수는 우 교수가 “절제되지 않은 막말”을 하고, “오만방자하고 무례한 어법”으로 글 쓰는 것을 비판했다. 또 “우 교수의 글에서는 대학교수로서의 객관적 논리나 품격, 상대에 대한 예의나 자기겸양 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라고 평가했다. “이것이 학교인가?”라는 표현 등도 문제 삼았다. 여기서 이것은 동국대를 지칭한다. 우 교수를 비판하는 장 교수의 말이 옳은지 틀린지, 그 판단은 어디까지나 독자들의 몫이다.

둘째, 장 교수의 비판 글이 언론에 게재되자, 이어서 우희종 교수의 ‘반론문’이 법보신문에 소개되었다. 우 교수는 동국대 사안과 관련된 자신의 견해를 이 글에서도 반복했다. 그런데 사실 장 교수가 지적한 것은 우 교수의 견해 자체는 아니었다. 장 교수가 비판한 것은 우 교수의 사실과 다른 “막말”과 “오만방자”였다. 이 점에 대해 우 교수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라고 발뺌만 할 뿐, 자신의 표현에 대한 반성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희 같은 문창과를 전공하지 못한 일반인들은” 또는 “문창과 교수님이시기에”라는 논지와는 관계없는 서술들을 늘어놓았다. 겸손을 가장한 비아냥으로 읽혀지기 쉽다. ‘문창과’를 운운할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 판단은 역시 독자들의 몫이다.

게다가 우 교수는 불교계 고위 스님들의 “외압”이니, 어떤 총장 후보의 “표절”이니 하는 자기주장만 반복한다. 그렇게 말해지는 저간의 사정 등 행간은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그것도 자신의 말로 하는 것이 아닌 타인의 말을 인용해서 말이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그랬을까 이해는 되지만, 그러나 이 문제는 아직도 시시비비를 따지는 과정이다. 해당 분야의 전문 학회와 또 동국대 내의 유관 기구에서 판단할 문제이다. 특히 이번 “표절” 문제는 학문적인 논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총장 선출 과정에서 특정 후보를 배제하면서 나온 이야기이다. 학자라면 학문적 인권을 서로가 존중해야 한다.

셋째, 이런 상황에서 필자는 장 교수와 우 교수의 글을 문제 삼고 기고를 했다. 먼저 장 교수에 대해 필자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동국대 구성원이 아니라도 동국대 사안을 왈가왈부할 수 있는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였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이제 생각하면 장 교수께 미안하다. 왜냐하면, 장 교수는 동국대 사안에 대한 견해를 표현하더라도, 우 교수처럼 “막말”과 “오만방자”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중점을 두었고, 그 과정에서 필자의 글을 사례로 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참여’에 대한 필자 자신의 견해는 드러났다.

다음으로 우 교수에 대한 필자의 비판을 보자. 이 대목에서 독자들께서도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는데, 필자는 이미 동국대의 총장과 이사장 문제에 대해 ‘불교신문’과 ‘불교저널’에 자신의 견해를 밝혔음을 고백했다. 그 내용은 해당 신문을 독자들께서 보실 수 있다. 그리하여 법보신문의 기고문에는 견해의 ‘내용’이 아닌, 견해를 드러내는 ‘방법’과 ‘형식’에만 한정했다. 사람마다 사안에 대한 견해의 내용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시비의 발화점은 역시 ‘교수로서의 글쓰기’였다. 교수는 저마다 전문영역이 있으니, 혹시라도 사회참여를 한다면, 해당 전문 영역의 연구와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참여를 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전제였다. 그런 전제에서 볼 때 동국대 현안에 대한 우 교수의 글쓰기는 전문성이 떨어진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쇠고기 수입과 관련된 우 교수의 전문가다운 수준있는 글쓰기에 비해서 말이다.

게다가 “표절”이니 “외압”이니 하는 우 교수의 주장 ‘내용’에 대해 필자는 아예 거론하지도 않았다. 기존의 우 교수의 주장을 무시나 하는 듯이, 또 우 교수의 “막말”과 “오만방자”를 ‘방법’과 ‘형식’ 운운하면서 넌지시 그것도 아래 사람 타이르듯이, 한 수 지도하듯이 했을 뿐이다. 독자들께서도 필자의 글쓰기의 행간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넷째, 이번에는 우 교수가 필자의 글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우 교수는 필자가 ‘내용’과 ‘형식’의 구분을 잘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다시 반복하지만 필자는 교수가 글쓰기를 할 때에는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전제했다. 교수가 무슨 ‘내용’을 말하는가는 자유이지만, 말할 때는 전문가로서의 ‘형식’을 갖추라는 것이 필자의 주문이었다. 이 주문은 필자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과연 필자가 그동안의 글쓰기에 그랬는가? 독자들께서는 이 부분을 허심탄회하게 검증해야 한다. 못했다면 필자 역시 비판 받아 마땅하다.

한편, 우 교수는 필자가 주장만 했지 주장의 근거를 대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정말 필자가 그랬는지는 우 교수도 독자들께서도 필자의 기고문을 다시 읽고 판단하시기 바란다. 필자가 근거를 제시했는데도 우 교수가 떼를 쓴다면, 그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고 강해서 타인의 글이 눈에 안 들어온 탓이다.

필자는 “글쓴이의 자격을 거론”한 적이 없다. 오히려 필자는 동국대 관계자가 아니라도 동국대에 관한 글을 쓸 자격이 있음을 주장했고, 또 그 근거를 밝혔다. 결국 우 교수 자신은 대학의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논지와 그다지 관계도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말았다. 게다가 우 교수는 토론하는 ‘방법’과 ‘형식’에 있어서, 좋지 못한 습관이 있다. 장 교수에게도 그러더니 필자에게도 반복한다. 즉, 우 교수는 전칭(全稱) 명제를 남발한다. ‘조계종’이 어떠니, ‘동국대학’이 어떠니, ‘스님들’이 어떠니, ‘문창과’가 어떠니, ‘연세대 철학과’가 어떠니. 무엇을 비판할 때에는 구체적으로 하고, 꼭 필요한 부분으로 범위를 한정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주장만 커지고 넓어져, 결국 근거 대기에 실패하기 쉽다. 또 어수선해진다. 소리만 컸지 부실하기 십상이다.

우 교수는 ‘대열반경’이니, ‘유마경’이니, ‘약산유엄 선사’니, 심지어는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이니, 게다가 ‘정토학회’와 ‘선학회’의 회장을 겸하느니를 들먹이고 있다. 이는 논지와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오히려 우 교수 자신의 논점만 흐리게 했다. 결과적으로 우 교수의 불교철학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다는 것을 드러냈고, 해당 학회 참여 학자들까지도 폄하하고 있다. 학회장은 개인이 하고 싶다고 다 하는 것이 아님은 상식이다. 필자는 선과 정토, 나아가 화엄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필자가 구성한 ‘법성교학’이라는 범주를 사용하여 학계에 이미 여러 번 논문으로 발표했다.

끝으로 우 교수의 글쓰기에는 자기비하적인 표현이 많이 보인다. 예를 들면, “수의학을 전공한 저의 짧은 철학적 지식”이니, “저의 글 읽기는 많이 부족할 수 있어” 등등 말이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겸손의 표현일까? 남을 비아냥거리기 위한 위장일까? 이는 온전히 독자들의 몫이 되었다. 필자는 건전한 논쟁을 기대했지만 끝내 기대를 접어야 했다. 본 사안에 대한 소모적이고 사실에 접근도 못한 논쟁은 여기에서 그친다.
 

[1293호 / 2015년 5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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